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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영적 대적 : 분노

영적 대적 : 분노


노승수 목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분노는 대체로 돌이키기 힘든 결과를 낳습니다. 목회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성경은 분노에 대해서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진노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 자체를 금하지도 않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도록 해가 지기까지 분을 품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엡 4:26). 이는 분노 자체보다 그것을 쌓다두는 것의 해악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쌓아두는 것은 다른 문제도 일으킵니다. 실제로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을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용수철이란게 누르면 누를수록 그에 대한 반탄력이 증가하는 것처럼 분노라는게 우리 마음에 쌓이면 쌓일수록 반탄력이 증가하고 이 반탄력은 인격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분노라는 게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쌓아두기보다 인격의 통제 아래 두어서 적절히 잘 조절하도록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사람들이 가랑비나 이슬비는 적당히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내릴 때, 가랑비나 이슬비가 올 때 우산이 없으면 비가 내려도 무릎쓰고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에 비해 소낙비는 내리면 잠시 멈춰서게 되지요. 이는 소낙비가 특성상 장시간 계속되지 않고 잠깐 내리는 걸을 알기 때문에 기다리기도 하지만 소낙비는 사실 그걸 감수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분노도 소낙비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엔 잠잠하다가 한 번에 쏟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표현하는 사람도 조절이 안되고 그것을 받는 사람도 조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를 쌓아두는 것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자기통제력의 상실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자꾸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실상은 이렇지만 본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고 간단합니다. 왜 마음에 쌓아 두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대체로 마음에 언잖은 일이 생겨도 분노를 쌓아두는 사람들은 그냥 내가 손해보고 말지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도의적인 도리를 다 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언잖음을 상대에게 알려주지 않고, 혼자서 삭히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문제는 이들이 상대에 대해서 '그들도 상식이 있다면 내가 이런 마음일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항상 문제의 책임이 상대에게 있어서 '탓'하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상대가 알아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알려주지 않고 아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의 소소한 불편함을 상대에게 표현해서 나누고 상대에게 배려를 요구하고 나 스스로도 상대의 마음을 읽어서 배려하는 일을 어려운 일로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즉,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회피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급하다고 바늘 허리를 매어서 바느질을 할 수 없고, 벽돌을 아래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지 않으면 얼마 올리지 못해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관계의 전 과정에서 상당부분을 혼자서 처리합니다. 탁구로 치자면 서브와 스메시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랠리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 하나 주고 받는 일은 다 생략한 채 '버럭' 성질을 냅니다. 
분노과 습관화된 사람의 전형적 특징은 바로 '버럭질'입니다. 이것은 대화의 일련의 과정을 상대가 없이 혼자서 처리해 온 결과물입니다. 분노는 크게는 '버럭질'과 같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도 나타나지만 상대를 지배내지 통제하려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수단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대화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탓'을 하는 겁니다. 탓하려면 또 다시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지적 무장의 절차들을 갖습니다. '합리화'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자기무장의 도구로 삼아서 '완전주의적 성향'을 보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 되든 것도 바로 이런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탓'은 나에겐 '관대하기' 남에겐 '엄격하기'의 이중적 잣대를 가진 것인데, 자신은 그 사실을 자각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사실 분노가 가져다 주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판타지 중독' 증상을 보입니다. 이것을 가장 부추기는 것은 TV입니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관계들을 설정해놓고 만족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지요. 드라마의 주인공은 마치 전능자같아서 상대방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조정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언제나 톱니바퀴처럼 서로 이가 맞아져서 돌아갑니다. 중고등학생들이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줄 수 없는 만족을 그곳에서 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만족을 하다가 현실에 부닥치면 얼마나 실망이 크고 분노가 쌓이겠습니까? PC Game이나 TV는 현대 사회가 분노 노이로제를 갖게 하는 주범 중의 하나입니다. 분노의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공통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설명드린 '완전주의적 성향'입니다. 이 높은 기준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합니다. 대개 우리가 화가 치미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특별히 의중을 가지지 않는다면 화가 덜나거나 안나지요. 판타지는 이런 완전함에 대한 욕망의 발현입니다. 그리고 좌절이 클수록 분노도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판타지 중독의 부작용이 바로 분노입니다. 분노는 이 현실을 내 욕구와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욕구가 강해지면 거의 다른 현실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상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잠언 말씀에 이를기를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찌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7:22)라고 했습니다. 이 미련함을 인해서 분노의 마지막 상태인 완고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분노가 높을수록 완고하고 엄격하게 됩니다. 분노를 그나마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완고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바른 기준을 가지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기준이 정확하셨던 주님도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셨습니다. 원칙 중심이란 것과 완고함은 비슷해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원칙이란 질서를 온전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지요.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혼란이 생기거나 혹은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울타리를 치웠더니 전에는 여기저기 퍼져서 놀던 아이들이 운동장 가운데서만 놀고 가장자리로는 가질 않더랍니다. 이처럼 울타리는 우리 삶의 원칙과 같아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완고함과 엄격주의는 사실 사람들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며 효율적으로 만드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탓'을 계속적으로 하게 되면 상대도 가만히 있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그에 대한 부당함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 요구가 온다고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사람이 이것을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염치가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관계를 지배하려들고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지배를 성경을 통해서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완고함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의 벗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잠 21:9)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격의 용렬함과 속이 좁은 것을 유학에서는<소인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탕감받으면서 타인이 자신에게 지은 겨우 백 데나리온은 받기 위해서 완고함으로 그를 옥에 가둠은 그 마음의 근저에 바로 분노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은혜의 은혜됨을 무력화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 은혜가 무력화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요. 그런 까닭에 결코 실패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정원을 관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마음에 악한 열매를 거두는 분노를 내버려두는 일은 우리 삶에 은혜가 결실치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분노의 치명적인 결함 '탓'과 '완고함'은 마귀가 틈을 타는 결과를 만들어서 결국 어떤 은혜도 흘려버리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분노를 해지도록 쌓아두지 않아서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엡 4:27). 인격적 유연함이 없는 원칙주의는 완고함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옳은 원칙을 가지고 있다라도 자신 역시 연약하고 넘어지는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늘 자기 고집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제 고집대로 한다는 사실이 지금 그가 완고함의 함정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지도자를 세울 때는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했겠지요?(딛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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