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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학서론

영적 해석 왜 필요한가?

영적 해석 왜 필요한가?
변종길 교수
개혁주의 성경 해석 원리는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이라고 배워서 익히 잘 알고 있다. 성경 본문을 문법적으로 설명하고 역사적 배경을 살핀다고 해서 성경 해석이 다 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뭔가 더 있어야만 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이것을 ‘신학적 해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모호한 용어이다. 
화란의 개혁주의 신약학자 흐로쉐이드(F. W. Grosheide)는 문법적, 역사적, 심리적 해석 위에 ‘깊은 의미 찾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깊은 의미’는 ‘어떤 구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의미’를 말한다. 곧 살아 있는 의미,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이다. 이런 깊은 의미를 찾는 것을 그는 ‘종합적 주석’라고 불렀다. 어떤 독일 학자들은 이것을 ‘영적 주석’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것을 ‘영적 해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잘못된 영해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적 해석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바탕 위에 오늘날 우리를 위해 주시는 살아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벌코프가 ‘신학적 해석’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흐로쉐이드가 ‘깊은 의미 찾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영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성경은 지나간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경 본문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영적 의미를 찾아서 설교해야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된다.
그러면 영적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소위 ‘깊은 의미’ 곧 ‘영적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다음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이에 대해서는 Grosheide, Hermeneutiek, 64-69, 183-215 참조).
첫째, 성경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 본문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문법적-역사적 주석을 자세히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종합’하여 하나님이 오늘날 나에게 주시는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적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이 영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주관주의(subjectivism)’의 위험이 따른다. 자칫하면 알레고리적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필로(Philo)나 오리겐(Origen)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잘못된 영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법적-역사적 해석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영적 해석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그리스도이다(요 5:39, 벧전 1:11 등). 그런데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역사책이나 소설책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독론적 해석을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각 구절, 각 단어들에서 기계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성을 찾으려고 할 때에는 잘못된 알레고리화가 발생하게 될 위험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론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기독론적 해석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문자적 의미의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가 많지만 때로는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도 있다. 특히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는 말씀은 단지 문자적, 육적 이스라엘에만 한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와 함께 또한 영적 의미를 읽어야 한다. 곧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생각해야만 한다.
넷째로,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를 위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했다(롬 15:4; cf. 왕하 22:13, 롬 4:23-24, 딤후 3:16, 고전 10:6,11). 우리는 성경을 그냥 지나간 과거의 역사로만 읽으면 안 된다. 구속사적 해석도 자칫하면 지나치게 객관적인 해석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찾는 것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만 찾으면 안 되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반응도 살펴야 하며, 거기서 생생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가 활성화되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역사 속에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모든 민족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며 역사하신다. 살아서 역사하는 이 말씀을 오늘날 이 시대에 전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며 또한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카페 ‘말씀나라’에 올려놓은 강의 동영상 참조 바람. http://cafe.daum.net/mrbible/5ME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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