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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학서론

Sola Ecclesia,,,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Sola Ecclesia,,,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유태화 교수


그리스도이면 누구나 “Sola Scriptura”라는 구호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종교개혁과 함께 전면에 떠오른 용어인데,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할 내용이 없지 않다. 우선, 종교개혁자들은 왜 이 슬로건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신약성경의 초기 형태의 교회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회중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회중을 인도하는 특별한 사역자들의 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사역 역시 성령의 은사의 범주에서 파악된다. 차이가 있다면, 성령의 직접적 역사에서 간접적인 역사 정도의 강조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경과하면서, 사도들, 속사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권위의 원천이 상대적으로 분명치 않은 교회의 리더십이 구성되면서 교회는 다양한 형태의 도전에 부침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단들의 출현과 도전은 무엇이 진정한 교회인가, 라는 질문을 낳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감독직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개 교회 감독의 건전한 이력과 리더십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급기야 “감독이 현존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라는 명제가 등장한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생활적 건전성을 위하여 감독이 등장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감독을 신성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만다. 이렇게 되어서는 곤란한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은 심화되어서 로마교회가 다른 지역의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가 되고, 따라서 로마교회의 감독이 다른 지역 교회의 감독의 감독이 되는 지경에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로마교회의 감독이 다른 교회의 감독 임명과 해임 권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부조리한 일이 발생하였다.

다양한 문제를 다 거론하지 않더라도,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감독의 권한은 이미 솟아오를 대로 솟아올라, 그리스도의 대리(Prolongatus Christus)로까지 인식되었다.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 추기경 위원회와의 공조를 통하여 형성된 교리적 결정을 대외적으로 공포하게 되면, 이것이 신앙과 생활상의 규범이 되고, 심지어 법조문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고 만다. 게다가 성경 해석의 지침까지 교황의 결정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적인 요소들이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인간이 악한 것만큼이나 잘못된 교리적 결정들이 신앙과 삶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모든 권위의 최종적인 원천이 되고 만 것이다. Sola Ecclesia!!!

오직 성경으로는, 바로 이러한 중세적 상황의 빛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교회가 모든 권위의 최종적 지위를 갖고, 따라서 교회가 결정한 결정 사항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상황에서, “오직 성경으로”는 대체적 권위의 원천으로 제안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모든 일의 최종적 권위였다면, 이제는 성경이 모든 일, 즉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권위의 최종성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성경이 심지어 교회의 판단까지도 판단하는 지위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교회가 교회적 결정의 산물로서 가졌던 것 가운데,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용도 폐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교회의 전통에 대한 비판과 상대화가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의 기치를 따라 기존의 교회가 결정했던 결정 가운데 성경에 따른 것이 아닌 한, 그것이 기존에 가졌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적 권위의 수위성에 따른 교회적 결정이 성경과 더불어 막강한 권위를 갖고 신앙과 삶을 규정해왔다면,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성경이라는 원천적 권위에 근거하여 거절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약간의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은 기존의 교회가 형성해온 신학에 전혀 의존하지 않았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을 저술하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삼위일체론을 섬세함과 주의로 성경을 따라 진술한 끝자락에, 칼빈은 자신의 견해가 고대의 교부인 나찌안젠의 그레고리의 입장과 동일한 것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의 글을 통으로 인용한 것이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교부들의 지혜를 존중하고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받았다. 칼빈이 오직 성경으로라는 관점을 택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신앙적인 글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교부들의 글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문맥을 따라, 건전한 신학적 판단을 가지고 이해한 결과물은 겸손함과 존중심을 가지고 기꺼이 활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말을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성경만 읽으면 되지 다른 무슨 잡다한 주변의 학문에 대한 수련이 필요하겠나 하는 생각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생각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칼빈은 인문주의의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이수했던 신앙인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갖추었고, 당시의 학문 전개를 위한 언어였던 라틴어의 문장력도 빼어난 수준을 유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적인 기초가 잘 닦여졌던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점이 종교개혁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총체적으로 수렴하여 정리하는데 칼빈이 사용된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신앙과 행위의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인 성경을 깊이로부터 붙잡아야 된다. 이 말을 조금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교회의 회중은 참 다양한 배경에서부터 온 사람들이다. 엔지니어, 환경전문가, 철학자, 사회과학자, 생물학자, 전업주부, 운동선수, 소방관, 정치인, 경제인, 시청직원, 변호사, 환경미화원..... 성경의 메시지가 실감나게 전달되도록 하려면, 이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인문학적인 공동의 기반에 대한 상당히 폭넓고 깊이 있는 식견이 요구될 것이다. 진화론, 환경이론, 경제상식, 동성애, 이혼, 낙태와 같은 많은 이슈와 철학적 담론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른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성령의 소통이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지식을 갖기 위해서 성경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되는 것인가? 물론,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판단을 분명히 제공한다. 그러나 세세한 모든 내용을 성경으로부터 끌어낼 수는 없다. 따라서 언급했던 주제와 관련한 내용은 전문 서적들을 통해서 얻어내는 노력이 필연적으로 동반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서적들을 읽어가면서, 이론의 홍수에 빠져들어 익사하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서적들을 읽어나가되, 성경적인 인식의 안내를 따라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제 이론들의 세계를 엿보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말이 우리로 부지런히 다양한 책을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배제하는 표현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제 이론들을 읽고 이것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논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이런 이론들의 홍수 가운데 세례를 받은 회중들을 바른 삶으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로 신앙과 삶의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관점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이런 영역의 관심사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자가 제 이론의 홍수 가운데서 정오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힘을 갖고 있어야,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한 나팔소리와 함께 들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신실한 섬김이 있을 때, 진정한 제자도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와 함께 성경을 맡은 자들이 깊이 있게, 또한 지속적으로 되새겨야할 중요한 측면일 것이다.

다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는 “성경 전부로”(Tota Scriptura)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약 1500여년에 걸쳐 36명의 저자가 기록한 66권으로 된 책이다. 다양한 문학적 장르와 형식을 취하였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상당한 다양성과 역동성이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은 또한 총체성과 통일성을 갖는다. 긴 기간에 걸쳐 많은 저자에 의해 다양한 문학적 양식을 따라 기록된 역사적 산물임에도, 그 중심에는 일관된 주제가 가로놓인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록된 책이다.

각 책과 각 저자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주제는 하나님, 인간, 타락, 구속, 교회, 하나님나라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통상 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요약하기도 한다. 성경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후 언약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으나, 인간이 반역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으로 이 일을 다시 회복하여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행동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런 주제들이 한 곳에 정연하게 모아져서 제공된 것이 아니라, 약속과 성취 등등의 구조 안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래서 어느 한 곳의 본문에 근거해서,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싶었는데, 다른 본문을 보니까 이전 본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이 소개되곤 한다. 특정 본문을 보면서 인간은 이런 존재이구나 확신을 가졌는데, 다른 본문을 보니까 조금 더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 등장하곤 한다. 이것이 교회인가 싶었는데, 성경의 다른 곳을 읽어가다 보니까 그 생각이 좀더 보완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곤 한다. 그래서, 성경은 부분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전반적으로 읽어야하는 책이다.

사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가는 것, 이것은 신학 작업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언약, 약속과 성취, 계시의 역동적 발전 등등에 대한 조직적이고 깊이 있는 관점을 형성하지 않고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내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기록된 이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묵상했던 연륜을 가진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개인의 이름으로 갖고 있지만, 사실 이 성경책은 공동체의 책이다. 우리 앞서 살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책을 읽고 묵상했고 그것에 수반되는 값진 발견들이 하나둘씩 쌓아올려졌다. 신학은 그것을 찾아 옥석을 가려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고, 그 중심을 파고들어가는 “지도”와 같은 기능을 한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우리 일상에서 지도를 대신하지만, 아직도 산세가 깊어지고 그 높이가 보통 이상의 지대에 도달하면, 손에 쥔 지도가 제법 힘을 발휘하는 시대이다. 성경이라는 깊고 높은 세계에 들어가려면, 정교하고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평이한 지도 말고 3년, 혹은 5년, 혹은 10년씩 직접 답사하고, 조사하고, 형세를 살펴 만든 깊이 있는 지도가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묵상하여, 그곳에서부터 생명의 물을 길러내는데 도움이 된다.

Sola Ecclesia에 대항하여 Sola Scriptura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이야말로, 성경의 깊고 높고 넓고 긴 세계를 경험했던 Tota Scriptura의 사람들이었다. 교부들의 도움을 흔쾌히 사용하고, 그리고 직접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정말 말씀하고 싶어 하는 통전적인 내용을 찾아냈고, 그것을 확신을 가지고 외쳤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동역하는 목회자들과 더불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짐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시간을 갖고 말씀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고, 거기서 나온 것으로 회중을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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