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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종교개혁사

위그노는 왜 조국을 떠났나

위그노는 왜 조국을 떠났나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의 엑소더스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역사가들의 전반적인 평가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칼뱅파 신교도(위그노)의 종교개혁운동이 프랑스 왕정의 박해로 위기에 직면하자 위그노들은 독일·네덜란드·스위스·영국 등 유럽 전역으로 대대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북아메리카 등 미지의 대륙에도 진출, 신문명의 불씨가 됐다.
 위그노의 엑소더스가 역사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이자 엔지니어들이었다. 신교의 상공업 숭상주의 덕분에 위그노들은 일찌감치 제철·염료·화학 등 하이테크 분야에서 진면목을 발휘했다.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유럽 곳곳에 퍼진 위그노들 덕분에 기술 후진국이었던 독일은 프랑스를 추월, 기술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스위스는 시계산업 등 근대공업의 기반을 다졌다. 
18세기 초 미국에 정착한 위그노들이 전수한 탄약기술은 미국 서부개척시대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위그노 엑소더스의 결정판은 영국이다. 당시 영국의 찰스 2세는 위그노를 받아들이는 특별이민법을 제정해 수많은 위그노 기술자의 영국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참여정부 첫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지낸 김태유 서울공대 교수는 “위그노 기술자들이 증기기관의 기반기술을 개발하고, 이것이 식민지 시장 개척, 중상주의에 의한 자본축적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면직공업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개척과 자본축적에만 몰두한 데 비해 영국은 기술발전까지 추구하면서 산업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영국이 세계 패권을 잡는 데 숨은 공로자가 바로 위그노인 셈이다.
 위그노의 엑소더스는 요즘 우리 현실과 묘하게 중첩된다. 우리나라는 요즘 고급 두뇌의 해외 유출로 고민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지에 정착하는 비율이 지난 90년대 초반 20%에서 지금은 46%로 높아졌다. 고급두뇌의 유출로 국가경쟁력의 훼손이 우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독일·영국 등 선진국도 미국 등으로 빠져나가는 해외 이주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 고급 두뇌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빨리 마련돼야 하지만 아직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최근 이중국적 허용문제가 조심스럽게 거론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 외국인 이공계 인재들이 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중국·베트남·러시아·아랍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온 두뇌들이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첨단 IT나 과학기술을 공부하는 것이 낯선 풍경이 아니다. 국내 대학들이 글로벌화를 부르짖으면서 앞으로 외국인들의 국내 유학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외국인 이공계 인재를 포용하고, 이들을 국내 연구활동에 접목시키는 일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고급 두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외국인 이공계 인재들이 맡는 부분도 고려할 수 있다. 국가 또는 주요기업의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외국인 이공계 인력이 참여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외국인 이공계 인재들의 국내 활용 방안은 미묘한 갈등관계를 초래할 수 있다. 취업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청년실업문제를 외면한 채 외국인 이공계 인력 활용방안을 고려한다는 게 자칫 정서적 반감을 초래할 수 있고, 외국인 고급 두뇌를 통한 국내 기술의 유출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미국 정부가 외국인 기술자들에게 발급하는 H1-B비자의 쿼터를 둘러싸고 미 IT업계와 미국인 기술자들 간에 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게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외국인 이공계 인력 문제를 지금처럼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최근 유럽연합(EU)이 미국의 ‘그린카드’(영주권)를 본떠 기술인력에 2년 유효기간의 ‘블루카드’를 발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크다. 위그노 엑소도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때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