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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종교개혁사

칼빈과 제네바 장로회의

칼빈과 제네바 장로회의
1. 들어가는 말 
루터와 츠빙글리를 1세대 개혁자라고 한다면, 칼빈은 종교개혁 제2세대로서 성경신학자이며, 조직신학자이며, 목회자이며, 설교가이다.1) 종교개혁자이자 그의 움직임과 발걸음은 당시 사회와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는 종교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분야를 망라해서 유럽역사에 한 새로운 실체를 남긴 능동적인 사회의 지도자였다. 언어에 남다른 학식을 갖추고 있었으며,2) 사회의 조직과 기관에 통찰력을 제시하였다. 도시의 광범위한 필요와 요구에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다. 칼빈을 단지 한 사람의 신학자로만 보려는 선입관이 고정관념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그를 이해하는데는 그 한계가 있을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교회의 관한 이론과 실제를 정립하였다. 그래서 제네바를 모범적인 기독교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541년 제네바에서 칼빈은 교회의 권징권 보장을 재입국 조건으로 내세울 정도로 목회와 신학활동에서 교회의 권징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3) 사실 칼빈의 연구가 기존의 초점에 맞추어서 주요 신학주제들만 연구 발전시켰다면, 최근 칼빈의 연구는 제네바 장로회의(the Genevan Consistory) 연구를 통하여 칼빈과 제네바를 자세히 소개한다. 이러한 칼빈의 연구는 칼빈의 제네바를 이해하고 동시에 칼빈의 신학과 목회적 실천으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특히 장로회의의 중요한 기능인 교회의 권징과 출교에 대한 칼빈의 신학과 장로회의의 실제적인 출교 활동도 살펴보고자 한다. 
2. 칼빈과 제네바 
제네바에는 칼빈의 원고들을 보관하는 고문서 도서관이 있고,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도 그에 관한 자료가 수집되어 있으며, 미국의 경우엔 칼빈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도서관을 따로 구비한 칼빈센터가 있다. 칼빈에 과한 방대한 자료와 기록들이 지난 수백년 동안 수집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왜곡된 수많은 말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떠도는 전설로 흘러 내려오고 있다.4)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제네바라는 도시를 호령하던 ‘신정정치의 독재’라는 전설이다. 요즘에, 칼빈의 시대 때 제네바가 처해있던 사회 상황에 대한 연구서들이 속속 출간되어서 칼빈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과 초교파적으로 칼빈에 대해 즐겁게 접근하도록 만들어 준다. 
제네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간의 교역 중심지였다. 레망 호숫가에 자리잡은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지대에 위치했으며, 명목상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16세기의 처음 10년 동안 카톨릭령 프리부르그(Fribourg)와 프로테스탄트 베른의 도움을 등에 업은 제네바는 봉건주의였던 사보이(Savoy)가와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종교적으로 제네바를 통치하고 있던 제네바의 주교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하였다. 1519년경에는 도시 발전과 상업의 번영을 억누르던 봉건적 세력을 격퇴시킨 바 있었다. 제네바도 스위스의 다른 주(州)처럼 시의회에 의해 자치(自治)를 실시했다. 이 시의회는 시정과 함께 종교적인 문제도 관장했으며,5) 시의회는 동업조합(guild)이 선출한 200인으로 구성된 단체 였는데 시장과 함께 계속해서 주를 다스리게 했다.6) 1536년 5월 21일 제네바 시민의 총회에서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정치적 상황이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제네바는 칼빈주의가 교회정치에서 수행할 역할을 보여준 최초의 시범지였다. 칼빈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제네바의 새로운 교회 정치와 시 정치에 관한 조직은 중요한 것이었다. 칼빈은 시로 돌아오자 우선 시의회를 설득하여, 법전을 기초하기 위해 자기를 책임자로 하고 5명의 목사와 6명의 속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 결과로 ‘교회규정’이 작성되었다. 이것이 개혁파 교회 헌장이며, 시 당국도 그것을 지지했다. 이로서 종교적인 영역에 민주주의가 적용된 셈이다. 헌장에 의해 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로서 구성된 장로회가 설립되었다. 장로의회는 의식을 거행했고 제네바 전 시민의 풍기를 단속했었다. 죄를 범한 사람을 파문시킬 수도 있었다. 파문 당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가하지 못하였고, 다른 시민과의 교제도 금지 당했으나, 더 배우고 알 기회를 갖도록 설교에는 출석하게 되어 있었다. 파문당한 자는 6개월 이내에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제네바 시외로 추방되었다. 1542년이래 칼빈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제네바 시정은 그의 사상을 실현한 것이며 정치사상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제네바 시정은 하나의 교권정치로서, 종교면에서 신정정치를 택했고, 운용면에서 귀족정치를 취한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조직이다. 그러나 제네바 시정은 전제 또는 독재 정치가 아닌 민주정치였다. 이런 점에서 교회와 국가가 통일체인 일원제로 교회와 국가, 그리고 종교와 법이 일체가 된 정치인 로마정치와는 구별된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실실한 교회나 국가의 제도는 대의원제였다. 물론 이 제도가 중세기의 수도원에 의하여 사용되긴 하였으나, 이것이 칼빈으로 말미암아 더 보편화되었으며, 그 후 칼빈주의가 가는 곳마다 이 정치체제를 사용하게 되었다.7) 이 제도가 후일 민주주의 발단에 공헌을 한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교회에 대하여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둘째는 가정에 대하여 신앙과 이성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셋째는 시 전체에 대하여 보잘 것 없었던 조그마한 도시를 일약 세계적인 도시로 유명하게 함으로, 전 유럽에서 압제를 받던 개신교들의 도피성이 되게 하였다.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표본이요 중심지였다. 칼빈은 공중도덕과 법규와 법령을 제정하는 사회적인 면이나, 공정한 가격을 규정하고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것 등이 상업적인 면이나, 가르치고 도전하고 글을 쓰는 등의 교육적인 면에서 체계화를 시켰다. 1541년 9월부터 1564년 5월 27일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활은 제네바에서의 개혁주의가 뿌리내리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제네바는 어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유럽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가장 특출한 성공을 보였다. 
칼빈이 종교와 규율과 세력을 가진 한 새로운 형태의 도시 국가를 수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네바는 칼빈이 정성을 쏟아서 재창조한 도시로서 유럽세계 중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8) 특히 칼빈이 제네바에서 파렐을 만나게 된 것은 장로회의의 근거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41년 9월에 제네바 교회 헌법9)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장로회의의 중요한 원리가 된 것이다.10) 칼빈은 제네바가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다.11) 또한 칼빈은 장로회의 기본 원칙을「기독교 강요」12)에서 언급한 바 있었으나 제네바에서 일하면서 그 적용을 위해 구체적으로「정치조례집」(The Articles, 1537)과「교회규율서」(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1561)를 마련하여 실행에 옮겼다.13) .
3. 칼빈과 제네바 사람 파렐14)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학자를 지도자로 만드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고 목청이 크며 수염이 붉고 자그만 한 전도자였는데 프리부르그와 베른 서쪽의 불어 사용 지역에서 종교의 국면을 전환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파렐은 도피네에 있는 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르페브르의 가장 공격적인 제자였으며 학자로서는 이류였으나 뜨거운 복음주의자였다. 일찍이 1523년 프랑스에서 탈출15)했는데 수년 후 루셀등이 귀국하라고 했으나 그는 자기가 할 일이 다른 곳에 있다고 보았다. 바젤에서 그는 오이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영향 때문에 그는 추방되었다. 바젤보다는 베른이 그의 후원지요 활동기지가 되었다. 그는 몽벨리아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세 권의 작은 책을 썼다. 그것은 주기도문 강해(1524), 예배지침서(1525), 그리고 신앙 개요(1525)가 그것이었다. 이 책자들은 그를 프로테스탄 예배와 교리의 개척자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최근에 새로이 역사가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아주 도발적인 설교자 파렐은 성난 군중들과의 경험이 많았고 신체적 위험들 속에서 단정한 생활을 유지했다. 1531년 10월 1일, 파렐은 쯔빙글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제네바 시민들에게 부여되고 있다(Christ was being imparted to the Genevese)’고 보고했다. 1532년 6월 2일, 면죄부 판매가 제네바에서 인허되자 교황 클레멘트 7세를 공격하는 격문이 시내 유포되었다. 파렐은 자기가 아무리 거칠게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몇 사람은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그의 협력자들은 곧 밀려 나갔다. 그러나 한 달 후에 그의 또 다른 조력자 앙뚜완느 프로만이라는 모범적인 용감한 청년이 제네바에 학교를 개설했다. 파렐의 연구적인 사역은 1533년 12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제네바에는 주교가 공석 중이었다. 비록 부교의 대리인이 주교의 재원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교회의 권위는 관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주교의 세력들의 공격을 맞아 시민들이 싸우고 있었던 성벽위에서 파렐과 비레가 드린 예배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파렐은 마들렌과 성 제르베 강단을 맡았고, 1535년 8월 8일 군중들에 밀려 성삐에르 성당으로 갔으며 그 존경스러운 대성당에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설교를 최초로 들을 수 있었다. 우상 타파의 무질서가 따랐으며 파렐의 열정적인 웅변에 감동된 공회들을 미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8월10일). 파렐은 그의 몽벨리아 예전에 따라 예배를 인도했다. 제네바는 사치를 금지하는 법과 정부 지시에 익숙했으나 그러한 것에 항상 순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락을 즐겼고 카바레에 출입하는 생활을 좋아했다.16) 
제네바 교회는 극도로 혼란했었다. 파렐과 그의 동료들은 재건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치리, 예배, 교육의 정리에 있어 상당히 의미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규칙들의 강요는 갈등이 따르는 일이었다. 파렐은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제네바의 사역에 칼빈을 동참시킬 각오를 했던 것이다. 파렐은 칼빈보다 20년 연상이었으며 불타는 열정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서재와 공부를 갈망하고 있었다. 파렐에게 있어 이것은 주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이 일에 헌신하기를 거부한다면…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후에 칼빈은 자신이 파렐의 무서운 엄명에 질려서 소름이 끼쳤으며 마치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당신의 손을 자기 위에 얹는 것같이 느꼈다고 간증했다. 그리고 파렐은, 칼빈의 임종시에, 그들의 예기치 않은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칼빈은 제네바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몇 사람의 청중들이 성 삐에르 성당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 관한 강좌였다. 그는 성문서(聖門書) 교수로 임명되었다. 1537년 초에 칼빈은 목사들의 모임에 가입되었던 것 같다. 스위스 방식으로 페이 드 보드(Pays de Vaud)의 모든 목사가 소집된 토론회가 1536년 10월 초에 열렸다. 칼빈은 비레와 파렐과 힘을 합쳐 미리 나돌고 있던 5개조를 주장했다.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제3조에서 칼빈은 교부들에게 호소하는 논적의 도전에 응했다. 터툴리안,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그리고 다른 교부들로부터의 유명한 구절들을 놀랄 정도로 풍부하고 재치있게 인용하면서 그는 반대를 가볍게 물리쳤다. 제네바의 관원들과 시민들은 단지 1536년 5월의 절정-하나님의 법과 말씀에 따라 살고 우상을 버린다는 것과 관련해서만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채택했었다. 1537년 1월 16일, 소의회는 목사들로부터 ‘제네바의 교회와 예배 조직에 관한 조항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받아들여서 채택했다. 이 일련의 항목들은 교회의 헌법으로 마련되었는데 정부가 취하는 일시적인 조치들과는 별도로 계속 존재하게 될 성질의 것이었다. 지금은 유실되어 버렸지만 파렐이 썼고 그전 11월 10일의 것을 승인한 항목들이 1월 헌법에 참고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칼빈이 그것의 주요한 저자였던 것 같다. 제네바는 종교개혁 전에 그러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카드놀이나 공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으면 형사상의 범죄가 되었었다. 1536년 2월, 새로운 금지와 제약의 목록이 채택되었다. 1537년에 도입된 새로운 요소는 사적인 사치의 제약 및 성찬 참가 자격이 문제시되는 부도덕에 관한 것이었다. 칼빈의 의도는 교회의 권위가 성찬 참가 자격을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교회의 출교 결정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 1530년의 바젤 계획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칼빈과 파렐은 교육의 체계를 세우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칼빈은 1537년 초에「신앙입문」(Instruction in Faith)을 출판했다. 그것은 평신도들을 위해「강요」의 주요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다. 칼빈은 성 삐에르에, 파렐은 성 제르베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찬 거행을 거부했다. 당면한 논란거리를 두고서 성찬을 거행한다는 것은 ‘거룩한 신비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공회들은 즉각 떠날 것을 명령했다. 칼빈은 그 일 후에 혼란스러운 제네바를 떠날 수 있어 기쁘다고 느꼈다. 파렐이 노샤델에 있는 그의 전임 사역지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자 칼빈은 그를 따라가는 것을 사양했다. 칼빈은 스트라부르그에 있었고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직을 제안 받았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바젤로 급히 돌아갔다.17) 
4. 칼빈의 신학과 장로회의(Consistory) 
칼빈의 단호한 요구에 의해 설치된 제네바 장로회의(the Genevan Consistory)는 도덕적 감독을 시행하던 그 첫 출발에서부터, 수세기에 걸쳐 도덕적으로 해이한 상태에 젖어있었던 제네바 도시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18) 교회의 권징에 대한 칼빈의 확고한 태도는 1541년 교회법령과 장로회의 설립취지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본을 세운 1541년 교회 법령에 의하면, 장로회의는 칼빈의 신학대로 속한 권징기구이다. 장로회의는 마태복음 18:17에 나타난 교회가 성직자와 평신도 연합의 대표제라는 칼빈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성직자만의 기구가 아니라 평신도 대표가 참석하지만 츠빙글리와 달리 군주는 준주하는 명목만으로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근거로 장로회의는 제네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 of Geneva) 소속 목사들이 직무상의 자격으로 참석하고 장로들이 참석하여 구성되었다.19) 장로들은 매년 2월 선거를 통해 선임되어 제네바 장로회의에서 일하게 되었다.20) 장로들은 회의에 참석한 만큼에 해당되는 급료를 연말에 받았다. 목사와 장로외에 서기21)와 소환관22)이 있었다. 서기나 소환관 역시 장로회의에 참석한 만큼 해당하는 급료를 받았다.23) 장로회의24)는 매주 목요일 아침에 모였다. 의장은 제네바 시의 4명의 행정장관중 한 사람이 임명, 파송되었다. 이 의장직이 제네바 장로회의가 겪은 시의회와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제네바 장로회의와 시의회 간의 갈등은 1541년 교회 법령의 초안과 개정실안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개정판에서는 시의회 권위가 교회의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구체적인 것은 장로회의는 종교적인 문제에 의한 출교도 시의회에 보고하도록 되었다. 목사들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장로회의가 조사하지만 그 처벌은 시의원들이 하게 되었다. 범죄의 정도가 중한 경우에는 시의회가 목사를 파직할 수 있었다.25) 
장로회의가 시의회와 겪은 가장 두드러진 갈등은 해벌(회복)권을 중심으로 생겼다. 1553년 11월 7일에 200인 시의회는 누구에게 출교의 권한이 있는지에 대하여 논했다. 이 모임에서 시의원들은 수차 정지를 당한 자들을 해벌해 주는 권한이 시의회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 달 16일에 시의회는 출교와 해벌의 고유한 권한을 장로회의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선포했다.26) 목사들을 대표하여 칼빈은 시위원들에게 나아갔는데 이때 그는 1541년 자신이 제네바 시에 재입국할 때 시의원들에게 받아 두었던 교회의 권징에 대한 약속 문서를 가지고 갔다.27) 교회와 시의회 간의 갈등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국면은 장로회의의 의장이던 시 행정장관(Syndic)의 존재이다. 문제는 이 행정장관이 장관의 위치에서 의장 자리에 앉아 있느냐, 장로의 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점이다. 시 행정관은 분명히 장로회의의 구성원으로 선발된 12명의 장로 중 하나는 아니었다. 그는 장로회의 의장으로 추가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장로회의 모임에 들어올 때에도 행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배턴을 들고 들어왔다. 이는 장로회의에서도 시의회의 권위를 주장하려 했음으로 단전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1561년 새로 발표된 제네바 교회법령에 의하면 이러한 행정장관의 모습은 1541년 교회법령을 잘못 적용시킨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28) 사실 1541년 교회법령에는 행정장관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런데 행정장관이 추가로 임명되어 1561년까지 시의회의 권위로서 장로회의를 주장하려고 애를 쓴 셈이 된다. 이는 결국 칼빈과 칼빈을 따르던 이민계 지식층 목사들과 당시 시의회로 대표되는 제네바의 원주민들과의 갈등구조로서 이해할 수 있다. 또 교회와 국가간의 세력갈등이라는 종전의 분쟁이 개신교 종교개혁에서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29) 
5. 칼빈의 목회와 장로회의의 출교상황 
1555년은 칼빈은 제네바의 목회에 중요한 전기를 가져다준 시기였다. 그 해 1월에 베르틀리에 사건이 종결되면서 장로회의의 출교, 해벌권이 재확인되고, 나아가 2월 선거에서 칼빈을 따르던 사람들이 정치적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556년 칼빈주의를 확장시키는 구체적 제도로서 일반 심방제도(general visitation)가 채택되어 장로회의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556년 이전에 제네바 시에 심방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1556년 특정집단, 즉 병자, 혹은 감옥심방이 있었다. 이제 일반 심방이 이루어지면서 개신교로 개종한 평신도들의 삶을 좀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목사회의 기록에 의하면 일반 심방은 신자들을 알아가고 성만찬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듣게 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30) 
일반 심방제도의 결과는 장로회의의 활동과 직결되었다. 제네바 목사들은 일반 심방을 통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적용하는지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장로회의가 처리해야 할 사건의 양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가 된다. 1556년에 등장한 또 다른 제도는 장로회의가 증언을 들을 때 증인들에게 신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법정 구실을 했던 장로회의는 실제로 가짜 증언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되었다.31) 이 사건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지만 경우 따라서 증언 진실의 여부를 자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로회의는 증언시 선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장로회의는 미심쩍은 증언들이 있을 경우 소의회로 보내어 선서를 하고 오도록 했다.32) 1555년과 1556년 장로회의는 각각 55회 57회 모였다. 전체적으로 목사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았다. 칼빈도 여행이나 병환을 제외하고는 다 참석하여 1555년에 87%, 1556년 74%라는 높은 참석률을 보였다.33) 이어서 장로회의의 운영과 결정과정에 제네바 시의 목사들과 칼빈의 영향력이 컸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환된 수는 동일 인물이 장로회의에 세 번 불러오게 되었다면 세 번으로 계산된 것으로 장로회의가 매 회합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반면 사건의 경우는 특정 사건이 끝날 때까지 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34) 출교자 분석에서 제네바 장로회의가 실제로 출교한 사람이 의외로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56년에는 전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출교 당하여 출교를 통한 제네바 시 정비가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성별 구분으로 보아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출교된 것으로 보인다. 1556년에 출교가 증가한 것은 일반심방의 결과로 제네바 시 교인들의 문제가 더 많이 장로회의에 드러나게 된 이유도 있다. 그리고 1555년 1월 성명 이후로 장로회의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더 활발해졌음도 한 이유로 본다. 장로회의에 불려온 사람들, 혹은 출교된 사람들의 죄목은 다양하다. 그러나 성도의 표지가 교회의 권징의 이유가 된다고 볼 때, 세 가지 성도의 표지, 즉 믿음의 고백(종교적 이유), 삶의 모범(윤리적 이유), 성만찬 참여(성례전 문제)는 다양한 죄목을 크게 분류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35) 당시의 출교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36) 
출 교 이 유
1555년
1556년
총 합
신성모독
22
17
39
구교신앙 및 실천
9
18
27
불순종
0
2
2
가정 문제
5
13
18
술 취함
3
4
7
출교자가 성만찬에 참여
4
2
6
우상숭배
1
0
1
욕(모독, 험한 말)
3
3
6
결혼 약속 파기
3
1
4
행동 문제
1
2
3
이웃간의 갈등
3
1
4
카드 놀이
0
1
1
일부다처
1
1
2
반항
0
2
2
개신교 신앙과 실천
9
21
30
스캔들
1
4
5
성적 타락
19
49
68
노래/춤
2
2
4
미신
0
3
3
불명확한 이유들
0
3
3
돈놀이/금전관계
1
0
1
인종차별
1
2
3
권위에 불복종
4
3
7
1555년 출교에서 가장 많은 것은 신성모독, 성적 방종, 개신교 구교적 신앙 및 실천문제 가정 문제들이고, 1556년은 성적 방종, 개신교 혹은 구교적 신앙 문제, 신성모독, 가정 문제 등의 순이다. 장로회의의 사건처리 과정과 출교의 선언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회의록을 통하여 당시 장로회의는 전 회원이 교회로서, 목회적인 차원에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적 신앙과 실천의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윤리적 타락이 문제가 된 이들은 경계와 권고, 권징을 실천했다. 구교적 신앙과 실천과 관련하여 출교된 자들은 여성들이 많아서 전제 출교자 수의 남녀 비율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타지방 여행 중 핍박의 두려움 때문에 미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새로운 종교, 즉 개신적인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구교적 행위를 유지한 경우도 있는데 장로회의는 이러한 죄목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 개신교의 확실한 정착을 추구하던 당시 개혁자들에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37) 

6. 맺는 말 
제네바는 교회와 시민사이의 대결의 무대가 되었다. 칼빈의 제네바는 그 시작부터 유럽종교개혁의 한 시험무대였으며,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사이의 고백과 신학의 구분은 그 유효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직 교회의 가시적 구성만이 하나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38) 칼빈은 어떤 특정한 죄가 문제가 자행되었고 전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교회는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교회 내에는 좋은 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스런 죄가 발견될 경우에 죄인들은 마태복음 18:15-17에 나타난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 츠빙글리가 출교의 목적을 악의 제거하는 데 그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칼빈은 세 가지로 출교의 목적을 설명했다. 1537년 교회 관계 조항에서 출교의 세 가지 목적을 강조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모독을 받지 않도록 불명예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출교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자들이 죄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교회에서 성도들의 나쁜 삶의 모습을 타락하지 않도록 예방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성숙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행해지던 장로회의의 출교는 칼빈의 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의 목회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출교를 집행한 장로회의는 무섭고 잔인한 법 집행의 모습이기도 했다. 반면에 상담, 중재, 교육의 기회를 강화시킴으로 죄인들을 돌아오게 하고,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사는데 관심을 높이고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 주는 모습도 보게 된다.39) 그러므로 성도의 훈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된다. 또 성도들의 영적 성숙에 일차적으로 죄인들이 출교하는 일시적인 부끄러움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교회 공동체가 죄의 결과를 보고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회의 출교문제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상 목회자들의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고 또한 효과적으로 개혁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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