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핵심감정 부담감과 참 신앙의 길

사람은 현실이 부정될 때, 도피하는 기제가 있다. 사람이 현실적응이 더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핵심감정-부담감이 있는 사람들은 어려서 계속적인 기대에 노출되어 자란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아이는 계속해서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드니 심리적인 압박감이 크다. 대체로 이 경우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도전을 포기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며 지금의 인정과 기대에만 고착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동반하는 것이 행동을 포기하고 위축되며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택한다. 가족간에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소극적이 되며 주로 음주를 통해서나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부담감이 부정적인 형태로 드러난 경우다.

 

다른 하나는 그 부담감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경우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담을 주는 정언명령들 곧 명분과 의리 옳음 등과 자기를 동일시 한다. 앞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 경우 경직도가 심하다. 사업을 할 때,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의 신호가 나타나도 제대로 감지할 수 없다. 그렇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며 자녀들에게도 엄격하게 군다. 그렇게 명분을 키워야 내면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분노 감정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타인의 이미지가 크게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나누라고 하면 "존경한다" "당신은 따뜻하다" 등의 타인에 대한 평가를 곁들인 감정은 나누어져도 그런 상대를 보면 어떤가라고 물으면 "좋다"라는 단조로운 감정 외에 드러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핵심감정-부담감은 내면에 이상화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보다 이상적 자기, 혹은 이상적 타인에 이미지가 지나치게 크고 거기에 비추었을 때, 자신의 초라함을 목격하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게 되고 후자는 명분있는 활동을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의식하게 되고 배려하려고 든다. 배려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이 마음은 그렇게 자신을 살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매우 잘 엄폐되어 있어서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율법의 완전함 때문에 이런 이상화된 힘은 명분으로 자기 삶을 옥죄일 뿐만 아니라 명분의 정당성에 반할 때, 분노감정을 표출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엄격하게 굴며 자라는 아이들의 유기적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며 성장에 필요한 격려의 자양분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다. 전자는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굴므로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마음을 다치게 되고 후자는 너무 적극적으로 명분으로 아이들의 삶을 끼워맞추기 때문에 사랑을 느끼기 힘들게 된다.

 

그리스 신화의 인물 테세우스가 아테네로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도둑 프로크루스테스는 자기 집에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나그네를 집으로 맞아 자기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려 죽이곤 했다. 그 이름이 뜻이 "늘리는 자"라는 것도 아마 여기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 신화의 은유가 담고 있는 바는 바로 이렇게 자연적인 성장보다 그것을 늘리려고 드는 욕심과 야망을 은유하고 있다. 부담감에는 이런 욕심과 야망이 은밀히 잠들어 있다.

 

그것을 갖은 명분과 명예들로 틀어막고 있는다. 이들의 내면에는 지나치게 확장된 자기와 타인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왜곡되고 소외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 인정이라는 것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이라고 이름붙여진 나만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처럼 타인과 세계를 내 세계에 늘여서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불어넣는 갖은 기대는 결국 자신의 올무가 된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곳으로 친히 인카네이션하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과 자기 삶에 끊임없이 상승의 힘을 불어넣는다. 이런 신앙의 토대는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양산해내게 된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 참된 신앙의 토양을 통해 삶속에 실현되는 신앙과 생활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자기만의 침대에서 나와야 한다. 하이데거의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안주에서 벗어나 기투(企投 ; Entwurf) 곧,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과거는 "있어 옴" 현재는 "마주 함" 미래는 "다가감"으로 설명하면서 우리 실존은 과거로부터 정체성을 얻고 미래로 자신을 내던짐으로 존재 가능성을 얻는다고 표현했다. 이는 과거의 현재는 기억(memoria)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관(contuitus)이고, 미래의 현재는 예기(exspectatio)라고 말한 어거스틴의 시간이해의 패러디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 실존을 불안으로 보고 불안을 안고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삶을 말했지만 신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미래로 자기를 기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내던짐은 바다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걷던 베드로처럼 믿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공포를 불러올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형사취수법에 의해 일곱 형제와 모두 결혼하고 죽은 여자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는 사두개인의 질문 속의 미래는 현재와 자기 경험에 갇힌 사두개인들의 하나님 이해와 자기 이해가 담겨 있다. 같은 방식으로 핵심감정 부담감은 하나님과 자신에게 갖은 좋은 것을 덧붙여 거기에 상승의 힘을 싣는다. 그리고 이 힘은 그의 현실 부적응을 부른다. 우리 삶이란 이런 법규로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이웃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다. 이 사귐에는 나를 벗어나 그에게 나를 던지는 과정을 수반한다. 마치 삼위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던지신 성육신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상처를 두려워하여 자기를 던질 줄 모르며 그렇게 자기 안에 갇힌 채 자기의 성을 쌓고 회칠을 하며 횃불을 들고 자기 웅덩이를 판다.

 

형사취수법에 예수께서 대답하신 "산 자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누가 산 자인가?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을 거슬러 사시는 하나님이 계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자가 산 자이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 미래적인 가능성을 향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우리 살아 있음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신앙이 참 신앙이다. 유한한 자가 초월자를 향해 자기를 의탁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은 "이미" 이뤄진 "칭의"를 근거로 "아직" 다 이뤄지지 않은 "성화"로의 나아감이다. 그 성화의 실제는 내 삶을 묶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인 핵심감정으로부터 놓여나서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와 맞닦뜨리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렇게 구분될 수는 있어도 나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됨을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아직 칭의의 증거를 얻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감정은 우리 자신의 습관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며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모든 것을 자기로 환원한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현재"에 갇혀 있다. 과거가 가져다 준 그 정체성이 만든 현재에 갇혀 있다. 여기서부터 벗어나 바다 위에 발을 올려 놓는 베드로처럼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나를 던져야 한다. 그 때 찾아오는 "불안"이 곧 "살아 있음"이다. 그 불안 속에 "사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진짜 현재이며 이는 영원이 잇닿아 있다. 바이러스처럼 무한 자기복제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하고 타자인 이웃에게 사랑과 인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의탁은 큰 용기나 믿음을 전제하며 그 용기나 믿음은 주체적인 삶을 전제한다. 그래서 타자를 향해, 세계를 향해 내던짐에도 우리의 관계는 상호주관적인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심이 의존을 뜻하지 않듯이 우리가 사랑과 인정의 관계를 의탁함이 의존하여 내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상대를 물화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