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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예배 갱신

예배 갱신
이성호 교수
여전히 예배갱신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관심이 많다. 이 말을 거꾸로 이야기하면, 성도들이 현재의 예배에 만족하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왜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에 만족을 하지 못할까? 목사에게는 참으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를 향하여는 개혁(refor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예배에는 갱신(renew)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교회를 개선(improve)'하자 혹은 '예배를 개선하자'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교회나 예배는 어떤 전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개혁은 잘못된 것을 원래의 모습 혹은 성경의 가르침에 맞도록 고치는 것을 말한다. 갱신은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으니 상황에 맞도록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갱신의 핵심은 본질을 더 살리기 위해서 형식을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배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형식이 본질을 구현하는데 방해가 되면, 당연히 형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이 형식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데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배 갱신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예배를 현대적인 예배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드럼을 예배당에 들어오고, 찬송가 대신 CCM을 부르는 것을 예배 갱신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형식의 변화가 본질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무분별한 악기 도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악기는 그야 말로 회중 찬송을 돕는 수단에 불과하였다. 
한 예로 보자. 내가 다니는 교회당은 전형적인 CRC (개혁교회)에 속한 건물이다(이 건물을 단돈 1불에 주고 구입하였다). 예배당 앞 가운데는 강단이 있고 좌우로는 세례단과 성찬상이 있었다. 우리 교회가 구입한 이후, 세례단과 성찬상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아니 한쪽 구석에 쳐박혀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자리에는 드럼, 엠프, 스피커 기타 등등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례단은 눈 잘 띄지 않고, 성찬상은 아예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얹어 놓는 탁자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마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상당 수 많은 교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제단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강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강단은 "예배 갱신"이라는 이름하에 "무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신학의 변화는 형식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 설교 중심의 예배는 "찬양" 중심의 예배로 바뀌고 있다. 이것이 정말로 예배 갱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도가 예배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예배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 일 수도 있지만, 성도들이 그 만큼 세상의 세속적인 문화에 잘못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예배갱신의 방향은 전혀 올바른 방향이 아니며, 성도들이 그 올바르지 않은 갱신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 그 증거 중의 하나이다.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 보자. 종교개혁에 있어서, 예배 갱신의 핵심은 설교, 성례, 그리고 찬송의 개혁이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예배 갱신을 생각한다면, 이 본질적인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말로 참되고 제대로 된 예배 갱신을 하려면, 
1. 설교가 갱신되어야 한다. 
특히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야 한다. 오늘날 현대 목회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설교 준비에 시간을 쓸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말씀에 전무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 순서를 바꾸고, 찬송을 바꾸고 변화를 주어도 설교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예배 갱신은 사상 누각에 불과하다. 
2. 성례의 갱신. 
2. 1.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나뉠 수 있다. 예배를 진정으로 갱신하고 싶으면, 세례를 갱신하여 한다. 한국 교회에 세례를 갱신한다는 것은 세례 문답 교육의 강화를 의미한다. 오늘날 세례는 너무나 형식적으로 집례되고 있다. 어떤 교회는 수십년 전에 사용되는 문답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세례 문답 교육 자체에 대해서 목사들이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일반화된 사랑의 교회의 제자화 훈련의 치명적인 약점은 세례와 분리시킨 것에 있다. 예수님은 지상명령에서 세례를 제자화의 수단 중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의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제대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삼위 일체 하나님은 이해 불가한 신비한 교리로만 간주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예배의 대상 자체가 희미해져 버린다. 오늘날 성도 중, 예배시간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의식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즉, 예배의 대상에는 관심 없고, 예배드리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2. 2. 한국 교회에서 가장 갱신되어야 할 부분 중의 하나는 성찬이다. 일년에 겨우 2-3 차례 드려지는 성찬은 성찬의 존재 의미를 거의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본인은 극심한 한국 개신교의 분열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찬의 능력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본다. 교회 회원들이 서로가 한 몸인 것을 가장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 부실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성찬에 대한 막연하고 희미한 이해(이곳에 쓴 "영적 임재설"을 참조할 것)는 성찬이 주는 유익을 반감시키고 있다. 
3. 찬송의 갱신. 
이 부분이 예배 갱신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대부분 찬송의 갱신이라고 한다면, 찬송가 대신 CCM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한국 찬송가도 여러 신학적 전통이 혼합된 짬뽕이기 때문에 문제가 적지 않지만, CCM은 훨씬 더 문제가 많다. 개인적으로 불려지는 것은 문제가 덜하겠지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교회의 공적인 검증없이,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음악이 교회에 들어온다면 궁극적으로 교회에 유익이 되기 보다는 해가 될 것이다. 
찬송의 갱신은 시편찬송의 회복으로 나타나야 한다. 물론 이 말이 16-7세기의 제네바 시편 찬송을 사용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좋은 시편 찬송이 사장되어가고 있거나 소개자체가 되어 있지 않다. 한국 사람에 맞는 시편송도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시편송이 나오기 전에, 구역예배나 성경공부 등등에서 시편을 같이 서로 읽는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예배시간에서 교도문은 시편낭송으로 바뀌어 시편이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참다운 갱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시편은 카톨릭, 그리스정교, 성공회 등 기독교 뿐만 아니라 유대교, 심지어 이슬람교인(다윗의 시편은 이슬람 경전 중의 하나임)들과도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개혁신앙은 교회의 보편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교회의 보편성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시편찬송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