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를 위해서만 살겠습니다는 대체로 거짓말입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거짓말이기보다 자기 기만에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자기 필요가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며 원함과 바람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원함과 바람이란 항상 자기만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역설적이게도 주를 위해서 사는 일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핵심감정이 열등감인 사람은 그 열등감을 무엇으로 보상하려고 하냐면,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통해서 보상하려고 합니다. 공부 예를 들었을 뿐이지 공부는 다양한 것으로의 변주가 가능합니다. 노래, 운동, 강의능력, 스피치, 등등 다양한 형태의 자기능력과 그에 대한 인정을 목적으로 노력해서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열등감은 그 열등감으로 인해서 이미 내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가 상상이나 환상 속에서 만족스러운 존재로서 그리는 자기 이미지가 현실적 대상보다 훨씬 뭔가 탁월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서로 맞지 않을 때도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심리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블의 슈퍼 히어로처럼 지나치게 이상화되면 현실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열등감을 지닌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이런 이상적 자기나 이상향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런 성향이 주로 나타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것도 약간 병리적 요인을 유발하는 형태의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정확히는 교회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가 이런 형태의 퇴행적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 됩니다. 이번에 대구 신천지가 코로나로 인해서 그 실체가 사회 전체에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만한 통계 중 하나는 대구 신천지의 60프로가 20대 젊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0-30대를 88만원 세대, 삼포 오포 세대, N포 세대, 잉여 인간 등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이들이 능력이 없거나 이전 세대보다 준비를 안 했거나 하지 않습니다. 정말 노력하고 많은 준비를 했지만 불황과 토지 가격 등이 상승하면서 취업이 힘든 세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청년들의 좌절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런 세대에서 어른 들은 "나 때는 말이야"라며 꼰대짓을 늘어놓습니다. 청년 비율 60프로라는 통계는 갈 곳을 잃은 이들의 마음을 좌절과 상처를 신천지가 파고 들었다는 소리입니다. 시사프로에 나오는 모략전도의 방식을 보니 각종 거짓말과 팀을 이루어서 내면의 바람을 공략하더군요. 그렇게 장기적이고 개인적인 오랜 관계는 결국 그들을 신천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됩니다. 그리고 신천지도 그 때 즈음 그런 사실을 상대에게 숨겼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보인 맹목적인 충성은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말의 공허함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자신의 내면의 좌절은 얼마든지 이런 방식으로 위장될 수 있고 열등감이 도피처로서 더 이상향을 선택하고 현실과의 거리를 두듯이 종교가 그런 기능을 하며 그렇게 매료된 사람은 실제로 삶에서 자기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건강한 신앙은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지하는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만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이런 것을 두고 염려하지 마라 여러 말로 구하지 말라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줄 우리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신다고 말씀하신다(마 6장). 하나님은 우리 필요에 적실하게 반응하십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느끼는 자기 상승의 힘, 즉, 이상적 자기를 꿈꾸거나 이상향을 꿈꾸는 방식은 병리적 증상이지 그 사람이 지닌 정상적 필요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염려는 필요 이상의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현실적 생활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건강염려증은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일상생활에 방해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필요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의 건강염려에 반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에게 있어야 할 것에 반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기만하게 되면 우리 의식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지나친 자기애나 이상향에 대한 비현실적 추구와 종교적 착취가 구조적으로 맞물리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 장사꾼들에게 착취 당하면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요. 당연히 몸이 지닌 필요가 있고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 당연히 관계적 필요, 곧 사랑과 인정받는 관계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필요가 자연스럽게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 영적 질서 안에서 허용되는 방식으로 자라도록 돕는게 건강한 신앙의 방식입니다. 결국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이란 주께서 나를 지으신 것이 내 삶에서 제대로 나타나도록 하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에 대한 정부의 대응 (0) | 2020.03.21 |
---|---|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 신학의 이해와 배경 (0) | 2020.03.19 |
TGI 코리아 기고글_가짜뉴스의 심리학적 이유와 성도의 대처법 (0) | 2020.03.18 |
공포와 인포데믹 (0) | 2020.03.17 |
청지기로 산다는 것 (0) | 2020.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