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이전 시기에는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의 개념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이것을 법적 영역과 본질의 영역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즉, 칭의와 성화로 구분하지 않고 통으로 의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칭의와 성화는 종교개혁 전통이 만든 신학적인 해석의 틀이다. 이것의 시초는 바로 이신칭의의 루터 신학이라 할 수 있고 유럽 전 지역의 교회가 여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그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왜? 도대체 무슨 상황 때문에 신학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법정적인 영역과 본질적인 영역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까? 이런 질문함이 사실은 신학함이다.
종교개혁 시기는 바로 반펠라기즘 곧 은혜로 의를 주입받고 그렇게 주입받은 의로 자신이 순종을 해서 의를 얻으면 구원, 불순종해서 의를 얻지 못하면 연옥이라는 교리를 가르쳤다. 처음의 시작은 은혜로 시작했지만 그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는 우리 행위에 기대게 되고 이것은 마치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정죄되었던 펠라기우스 신학의 부활처럼 보였다.
당시 사용되던 성경인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 벌게익에는 복음서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번역했고 이 오역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반펠라기즘을 따른 교회론과 구원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 죄를 각성 2. 고해 3. 신부의 보속의 명령 4. 보속에 따른 고행, 헌금, 봉사 등의 실천 5. 신부의 사죄의 선언 이라는 형식으로 종교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사실 로마 가톨릭은 아직도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은혜로 원의가 주입되지만 이 원의는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구원이란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신학에서는 타락전 아담의 상태로의 회복인 셈이다. 아담이 자연 언약 안에서 순종을 요구받고 선악수의 열매에 대한 불순종으로 영벌에 대한 경고를 받은 것처럼 구원받은 백성은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아담처럼 자범죄를 짓게 될 경우, 그것을 자각한 순간, 이스라엘이 성막에 나간 것처럼 교회에 나가 신부에게 그 사실을 고해하고 신부의 보속 명령을 따라 보속을 실행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잘 알려진 면죄부 사건이다.
여기에는 신학적인 뒷 배경이 존재하는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한 대속 사건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담의 죄를 예로 들자면, 그리스도는 아담이 받을 사망의 형벌을 사하셨지만 아담이 선악수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에 대한 보속은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이것은 스스로가 보속해야 할 것으로 남게 되고 같은 이치로 이 시대의 신자들 역시 죽음은 십자가에서 대속을 받았지만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보속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 보속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이해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보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고 루터는 말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거기에 우리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 보속의 문제를 바로 그리스도께서 능동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실제 우리 죄의 형벌과 죄책에서 모두 사함을 입었다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우리 존재가 의롭게 되는 과정 때문에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에서 보듯이 우리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가톨릭주의자들에게는 도덕폐기론처럼 비치는 문제를 낳았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 형벌과 죄책의 치름이 본질의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법적 영역에 관한 문제라는 입장을 취해서 법적 영역과 본질의 영역을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것이 곧 칭의와 성화가 나눠지지는 않지만 구분되게 된 배경이 된다. 동시에 이 법적 영역의 치름이라는 개념은 언약적 개념을 진보시키고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법이라는 것이 상호관계에 대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사회계약론의 배경이 된 영국의 청교도 사무엘 러더포드의 Lex Rex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법의 아래 있다는 사상을 설파했고 러더포드의 이 사상은 홉스 등의 사회계약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칭의는 바로 이런 법적 개념 곧 언약 개념을 함의하는 신학적 해석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받을 형벌과 죄책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사하셨다고 말하고 나서 이 의를 우리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영역 곧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의 내재가 바로 펠라기우스주의로 기우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의가 있고 그렇다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것이 행위구원론을 불러들이는 신학적 단초가 된 것을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신학자들은 간파했고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 "의가 주입"된다는 사상을 명시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이 의는 우리 안에 주입되어 내재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며 이 그리스도에게 우리가 연결되는 내적인 습관을 주입받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결국, 믿음이라는 습관, 곧 이 도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의와 연결되게 된 것이다. 그 연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삶에 본질적 의가 점차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성화라고 했고 개혁신학에서 성화는 성령의 내주와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적인 의를 기반으로 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내주하시는 성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 짓는다. 이 연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 닮아감이 본질에서의 변화 곧 성화를 점진적으로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밭에 뿌리 씨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밭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며 거기에 뿌린 씨는 말씀과 그것을 들음으로 나는 믿음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까지 하고도 만족하지 않았는데, 이 성화의 과정조차도 행위구원론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의 변화를 말하면서도 인간의 타락이 단지 원의를 상실한 채, 하등한 육체적 특성이 빚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원의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와 거기에 깃든 영혼의 성향 자체도 부패로 오염되어서 인간의 전 영역이 부패했다는 교리를 채택한다. 잘 알려진 대로 도르트 회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으며 항론파에 대한 첫 교리를 "전적 부패"로 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전적 부패 교리는 부패가 그 심도에 있어서 인간의 깊은 부분까지 부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부패가 인간의 전 영역에 미쳤다는 의미로 부패의 범위를 다루는 개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는 상실했지만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정한 정도에 도덕적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형상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의견을 가진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에서 부패한 본성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칭의에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해야하는 것처럼 성화에서도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의 교리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 부패한 본성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의탁하면서 교회에 베풀어진 은혜의 수단을 사용함으로 은혜를 입어서 부패한 육체의 힘이 지양되고 성령을 따라서 영의 힘의 강화되어서 순종이 나타나는 구조를 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화는 철저히 개혁신학에서는 교회론에 기대어 있다. 교회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에 기대지 않고는 성화의 힘이 신자의 본질 내부에서 성장할 수 없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교회의 빛깔 (0) | 2020.03.27 |
---|---|
코로나에 대한 정부의 대응 (0) | 2020.03.21 |
자연스런 자기 인식이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0) | 2020.03.18 |
TGI 코리아 기고글_가짜뉴스의 심리학적 이유와 성도의 대처법 (0) | 2020.03.18 |
공포와 인포데믹 (0) | 2020.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