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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정통개혁신학의 성립과 한국의 바른 개혁신학의 회복을 위한 긴급한 신학적 내용들

정통개혁신학의 성립과 한국의 바른 개혁신학의 회복을 위한 긴급한 신학적 내용들 
김영규 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합동신학원(M. Div.) 
독일 괴팅엔대학(Th. D. 조직신학) 
독일 괴팅엔대학에서 파피루스, 고대근동학, 신약학 연구 
現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 학술원, 개혁주의 성경연구소장, 안양대신대원 교수 
저서 
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일(Magualia Dei) 번역출판,1996.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주의교의학I 번역출판,1996. 
17세기 개혁주의 신학, 1996. 
조직신학 편람 I, Ⅲ, IV, 1998. 
기독교 강요 강독 1, 2000. 
과학과 인간의 미래, 2001.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 도서출판하나, 1998 외 다수 
정통개혁신학의 성립과 한국의 바른 개혁신학의 회복을 위한 
긴급한 신학적 내용들 
성만찬론에 관한 루터주의 신학자 요하키무스 웨스트팔루스에 대한 반박론에서 칼빈은 “교황주의의 어두움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건전한 교리에 대한 약간의 맛을 본 이후 나는 루터의 글들에 따라 성례들에 있어서 단순하고 공허한 그림들 이외에 오클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로부터 아무 것도 남긴 일이 없는 것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읽을 수 없을만큼 그들의 책들로부터 멀어져 왔음을 나는 고백한다”1)고 표현한 바 있다. 즉 칼빈은 오클람파디우스나 쯔빙글리보다 초기 루터의 글들로부터 많이 배웠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 모든 이들로부터 독립해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시대의 가장 쟁점이 되는 논제에 대해서 칼빈의 태도는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논제들에 대해서 그는 훨씬 단순하고 명료한 고백만으로 대응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태도 뒤에는 놀랍게도 “다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처럼 나에게도 그 일이 다시 한번 더 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도 슬픔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아 있는 하나는 나의 가슴속에 침묵(tacitus)으로 탄식하였다는 것이다”2)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침묵할 수 없는 이유는 글을 쓸 때마다 초기 참된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수를 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3)
따라서 침묵할 수 없는 칼빈이 변호하는 진리의 내용은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일치하여 그 잘못된 가르침을 증오하고 무언의 소리로 그렇게 가르친 자들의 절제하지 못함을 저주할 만한 것에 불과하였다.4)
루터주의자 웨스트팔루스가 그들의 가르침을 베렌가리우스의 이단사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비난한다면, 너는 왜 깃발을 들고 베렌가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교황의 집으로 옮기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5)
그러면서 그 루터주의자가 오클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부쪄, 페트루스 마르티르, 불링거, 요하킴 아 라스코와 같이 세상에서도 아주 경건하고 공평한 사람들은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의 일치된 견해를 완전히 파괴하고자 하는 저의가 궁금하다는 것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빙글리의 교리를 고백하는 다른 제세례파들이나 다윗파 혹은 다른 광신주의자들과 함께 한 분파로 묶여서 칼빈을 같은 이단이라고 몰아되는 루터주의 입장들에 대해서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평화를 지키고자하는 열심은 수 백의 웨스트팔루스보다 삭소니아 안에서 더 권위를 가질만한 자들에 의해서도 숨기여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표현되어 있다.7)
칼빈의 이런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1543년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그들의 교회로부터 떠났던 우리(... nos ...qui ab ipsorum Ecclesia recesserimus)”에 대해서 분명히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카톨릭 교회가 칼빈과 함께 한 무리들을 ‘저주의 말과 공포의 말로(anathematibus et diris)’ 추방해 왔을 때, 그들은 ‘분리주의자들(schismatici)’ 혹은 ‘이단들(haeretici)’이라는 오명을 받으면서 고난을 감수하였던 것인데, 그 때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에 대해서 마음대로 외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즉 요한복음 16장 2절에 근거하여 카톨릭주의자들의 그런 행동 자체가 오히려 분리에 대한 부담감을 그들로 하여금 충분하고 그 넘어 덜 수 있었다8)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쫓겨난 자들이 된 것은 분명한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일어났던(Quum ergo eiectos esse nos constet, idque propter Christi nomen fuisse factum)’ 일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확신을 좀 더 분명히 표현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oportuisse nos ab ipsis recedere ut ad Christum accederemus)’고 한 것이다. 이것으로 종교개혁자의 분리의 근거가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런 분리와 연합의 원리를 자신과 그 시대로부터 산출된 신학적 입장에서 찾지 않고 교회 안에 잘 알려지고 공인된 키프리아누스의 견해로부터 칼빈은 발견하고 있다. 즉 이단사상들과 분파들이 일어나는 것은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은데 있고 머리를 찾지 않으며 하늘 교사의 교리(coelestis magistri doctrina)를 지키지 않는데 그 근원이 있다는 내용을 칼빈은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키프리아누스는 바울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그 근원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감독으로 있도록 하는 곳으로부터 온다’는 사실9)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고백적 내용이 칼빈에게 있어서 분리의 정당성을 얻는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만이 교회를 보존할 수 있다고 보는 종교의 총화(religionis summa)가 거기에 없을 때 교회는 붕괴된다고 하였고 역시 오류와 거짓이 지배하는 그곳에 교회가 없다10)고까지 선언하게 된 것이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와 그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때, 어거스틴의 전통적 삼위일체론보다 그것의 실천적 의미에 더 강조를 두고 언급한 것이 특징이다. 즉 우리로부터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대로 만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취하여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근거로 인하여 공허한 영광으로 강탈당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선과 덕과 의, 지혜의 순수한 찬송과 영광이 하나님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것, 말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우리에 대한 기쁘고 행복한 모든 것들을 그로부터 걱정 없이 기대한다는 것, 그러나 인간 자신 안에 그의 의와 덕, 생명과 구원을 찾을 이유가 그에게는 없다는 것, 죄로 인하여 인간이 그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그 유일한 하나님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최고선으로서 유일한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이런 강조와 함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들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죄로 인하여 멀리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연결하셨다. 자신의 죽음의 공로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탕감하였고 죄의 형벌을 그의 몸에 담당하시사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그의 진노를 무마하셨다. 이렇게 땅으로 내려오실 때, 하늘의 은택들의 모든 보화, 즉 성령의 선물들을 가져 오셨다. 그 성령을 통해 우리는 중생되고 마귀의 권세와 사슬로부터 해방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의 자녀들로 채택되고 모든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성화된다. 역시 그를 통해서, 우리가 죽을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부패된 정욕들, 육체의 욕망들과 우리의 본성의 뒤섞이고 부패된 왜곡들을 낳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게 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되고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거닐며 의의 새로움 가운데 살아간다.”11)
“이 모든 것들, 즉 죄 은혜로운 용서(remissio peccatorum gratuita)와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해(pax et reconciliatio cum Deo), 성령의 은혜의 선물들(dona et gratiae spiritus sancti)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되고 선물되었다(offeruntur ac dantur).“12) 그 그리스도 “자신이 항상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자로서 성부의 영원하고 유일한 모사(aeternus ac unicus patris consiliarius)이셨기 때문에,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omnes scientiae et sapientiae threauros)을 동시에 그 안에 감추셨던 대로 그는 그렇게 성부로부터 받는다.”13)
즉 “그렇게 그의 참여자가 되도록 채택하신 것도 부족하여서, 우리가 아직도 미련한 자일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이시다.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의이다. 우리는 정결치 못한 자들일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순결이다. 사탄에게 무기 없이 맞설 정도로 우리는 약할지라도, 그것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부서뜨리고 지옥문을 파괴하시는 친히 받으신 하늘과 땅에서의 권세가 우리의 것이다. 죽을 육체가 지금 우리를 둘려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시다. 짧게 말하자면, 그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 모든 것을 갖고 우리 안에서 아무 것도 없다,”14)
그러나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sola intercessione iustitiae Christi)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의인으로 회복되는 그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에 의해서(imputatione) 그와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이기(communicatur)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의가 있고 그의 모든 부요한 것들(omnes eius divitias)을 그와 더불어 소유한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에 참여자(participes)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전가의 법칙에 따라 주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우리와 나누신다(communicat)15)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우리를 위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더불어 성부를 역사의 원리(principium agendi)와 만물의 샘과 근원(rerum omnium fons et origo)으로서 이해하고 성자를 역사의 지혜와 의논(sapientia et consilium agendi)으로서 이해하며 성령을 행위의 능력과 유효성(virtus et efficacia actionis)이라고 이해하였고 그 표현아래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독특성들(tres proprietates)16)을 강조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동일한 본성과 본질 안에 위격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을 그 자신의 고유한 것을 가진다17)는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성부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라고 불리는 것은, 참으로 성부 자신이 고유하게 행하신다고 말하지만, 그의 말씀 혹은 지혜에 의해서(per verbum ac sapientiam suam) 행하시고 그의 능력 안에서(in virtute sua) 행하시기 때문에, 원인에 있어서(in causa) 우리가 전에 역사의 원리로서 성부에게 돌린 그 독특성이라고 하였던 그것에 의해서 구별된다”18)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 위격들의 공통된 사역(communis trium personarum actio)이 있었지만, 그 ‘우리’(창 1:26) 안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숙고한 것이거나 자신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와 능력에게 변론한 것(non cum angelis deliberat, non seipsum alloquitur, sed sapientiam suam et virtutem advocat)19)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런 구조아래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하나요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서 참된 하나님을 갖는다(habemus verum esse Deum creatorem coeli et terrae). 그리고 성부 안에 모든 신뢰를 이룬 대로, 한 하나님이신 한, 역시 성자 안에서 그렇게 (모든 신뢰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칼빈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참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되,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제 3위(tertiam personam sacrosanctae trinitatis)로 믿고 성부와 성자와 동일본체적이고 함께 영원하며 전능하신 만물의 창조자(patri et filio consubstantialem ac coaeternum, omnipotentem, omniumque creatorem)이심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 하나님 안에와 그의 독생자 안에 돌렸던 모든 신뢰를 성령 안에도 똑같이 돌려야 한다”20)고 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각 위격들의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본질과 속성, 경배와 신뢰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 외에 성부께 이르게 하는 지도자(ductor)나 인도자(director)가 없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은혜의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은혜와 더불어 성령 자체가 능력이요 역사로서 그것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안에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만물을 역사하시며 보존하시고 기운나게 하며 활력있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화시키며 깨끗케 하시되, 우리가 구원을 결과로 얻도록 자신에게 부르시고 이끄신다(롬 8; 엡 2; 고전 12)”고 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성령이 이런 방식으로(ad hunc modum) 우리 안에 거하시사, 성령이 주체로서 우리 안에서 모든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며 지금도 그 믿음 안에서 굳게 남아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요 능력임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 사역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운 사역으로서 어떤 것도 우리의 공적의 탓으로 돌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지막 강조에 있어서 그런 통일성과 관련해서, 칼빈은 “이런 일들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pariter) 일어난다”고 고백하고 있다.21) 이런 표현이 그대로 예정론에 의해서 설명하는 교회에 대한 고백에서 다시 반복이 되고 있다. 
그렇게 기독교 강요 초판에 나타난 근본적 흐름이 그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에서 비로소 정확하게 그 구조로서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칼빈의 글에 있어서 놀라운 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이라고 말할 때,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식과 그 역사에 대한 내용을 교리로 한 통일성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이 되고 있다.
칼빈은 후에 본질(essentia)이나 실체(substantia)와 구별하여 위격(persona)과 본체(subsistentia)라는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처음 위격들의 고유성에 강조를 둔 표현이 좀 더 정교해져 하나님의 본질 안에 다른 위격들과 관계하는 본체는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에 의해서(proprietate incommunicabili) 구별된다고 한 것이다. 그 때 사용하는 본체라는 말은 나누어지지 않은 끈으로 본질과 결합되는 것처럼(etsi individuo nexu cum essentia coniuncta est)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개념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그 자체와 구별되는 특별한 표지(speciale nota)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이해가 베자와 파티우스에 의해서 편집한 제네바의 신학교재22)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그런 신학적 정신이 대표적으로 멀리 1563년 헝가리 고백서에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칼빈의 이런 신학적 이해를 직접 의식하였든 하지 않았던 우르시누스 또한 루터주의 교회로부터 밀러나 노이스타트로 옮겨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강조한 하이델 베르그 문답서를 다시 해설할 때 하나님의 지식과 역사에 관한 전체적인 이해에 그런 삼위일체에 대한 구조가 반영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23) 즉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단일하고 유일한 참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한 실체 안에 자신들의 고유성들에 의해서 실재적으로 구별되면서(proprietatibus suis realiter) 동일실체적이고 함께 영원한 세 위격들이 아래 존재한다(subsistunt)고 정의하고 있다.24) 여기에서 칼빈과 같이 우르시누스가 각 위격들과 관계해서 본체(u`posta,seij,subsistentia)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사모사테누스와 세르베투스에 반대하여 사용된 것으로 사벨리우스에 반대하여 구별되면서도 아리우스, 에우노미우스, 마케도니우스에 반대하여 동일하게 동등하다는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5)
그래서 실체는 절대적이고 공유할 수 있으나(communicabilis) 위격은 상대적이고 공유할 수 없다(incommunicabilis)26)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철학적인 묘사와 특별히 구별된 개념들(완전성과 그 결과 혹은 열매)이 사용된 것은 본성이나 자연의 빛에 의해서 그런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 의미에서 사용되었고 또한 참된 신이 거짓 신들 혹은 우상들과 구별되기 위해서 세 가지 방식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속성들, 위격들 및 사역들에 있어서(attributis, personis et operibus) 구별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27)
그런 기반 위에, 우르시누스에 따르면, 세 위격들에 공통적인 것들(communes)은 첫째로 영원성, 무한대성, 전능성, 지혜, 선 등의 하나님의 본질적 모든 속성들(omnes proprietates Dei essentiales)이고 둘째로 세계의 창조와 보존, 통치, 교회의 모음과 보존과 같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 대해서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행사하시는 외부를 향한 신성의 외적 행위들이나 역사들(actiones seu opera divinitatis externa, ad extra)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위격들은 두 가지 방식에서 구별이 된다고 한 것인데, 첫째로 내부를 향한 역사들에 있어서(operibus ad intra) 구별이 되고 둘째로 외부를 향한 역사들과 역사하시는 방식에 있어서(operibus seu operandi modo ad extra) 구별이 된다고 한 것이다.28)
전자의 사역(opera seu actiones diinitatis ad intra)은 위격들이 서로 상호간에 대하여 취하고 행사하는 역사들로서 그 역사들을 통해서 위격들이 처음으로(primo) 서로 구별이 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처음’이라고 표현했지만, 아리우스와 같이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성부는 다른 자로부터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고 성자는 영원히 성부로부터 발생되었고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특별히 성자가 신적 실체를 갖는 것은 성부로부터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ineffabiliter) 교통된 것으로 이해되었고 성령이 동일한 신적 실체를 갖는 것도 성부와 성자로부터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통된 것으로 이해되었다29)
는 점이다. 또한 성부가 첫째 위격이고 성자가 두 번째 위격이며 성령은 세 번째 위격이라고 한 것도 성부는 신성을 어떤 자로부터 그에게 교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성자는 영원한 발생에 의해서 신성을 성부로부터 그에게 교통되었기 때문이며 성령은 영원한 발출에 의해서 신성을 성부와 성자로부터 그에게 교통되었기 때문이라고30)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내적인 역사들인 영원한 발생과 영원한 발출이 신적인 실체의 교통(communicatio essentiae divinae)으로 해석했던 점이 특별한 것이다.31)
우르시누스가 이것과 관련해서 독자에게 주의를 준 두 가지 점들은 첫째로 창조와 같은 역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무로부터 어떤 것이 일어난 것인 반면, 발생과 발생은 다른 위격의 실체로부터 영원히 한 위격이 산출된 것32)이라고 지적한 점과 따라서 둘째로 신적 실체가 교통된다는 말은 표현될 수 있어도 신적 실체가 발생되거나 발출된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33)고 지적한 점이다. 이런 주의 점들에 따라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에 순서가 있을지라도, 신성의 어떤 위격도 시간이나 위엄, 정도에 있어서 다른 위격들보다 전이거나 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질서에 따라서 혹은 존재의 질서 안에서만 선행성이 있다34)고 했던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내적 역사에서 존재와 신성의 위격들의 질서와 같이 각 위격들이 자신들로부터 그들의 피조물들을 향하여 그 피조물들 안에서 그리고 그 피조물들을 통해서 행사하시는 외적인 역사들에 있어서도 같은 질서가 보존된다고 한 것이다. 다만 이런 외적인 역사들은 성부와 성자, 성령의 공통된 의지와 행위에 의해서(communi quidem patris, filii&Spiritus sancti voluntate&operatione) 일어난다는 점35)이 다를 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제적으로 창조를 성부의 사역으로, 구속을 성자의 사역으로, 성화를 성령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을 부정하면서 각 위격들 사이의 사역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의미에서 나눌 수 없는 삼위일체적 사역(opera trinitatis)과 각 위격들에게 고유하게 돌리는 역사의 질서와 방식(ordo et modus agendi seu operandi)이란 개념들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부는 만물을 자신으로부터 성자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시고 성자는 만물을 성부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시며 성령은 만물을 성부와 성자로부터 자신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렇게 모든 위격들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성화하시지만, 성부는 간접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성자는 간접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직접적으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러나 간접적으로 (그가 중보자이신 한) 성자로 말미암아” 행하신다36)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나 중보자, 그리스도란 개념들도 다양하게 이해함을 볼 수 있다. 다음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37) 성육신 전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성에 따른 그리스도의 경우, 성부의 신적 실체가 전체로 교통된 본성적 하나님의 아들(filius Deu naturalis)의 개념으로 이해되었고 성육신 이후 인성에 따른 그리스도의 경우, 은혜를 통해서 낳되 창조나 채택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에 의한 잉태와 로고스와의 연합에 의해서 낳은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으로 구별하여 이해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표 안에서는 분명하게 분류되어 있지 않지만, 천사들도 창조의 은총에 의해서 본성적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38)
그러나 같은 태어난 개념일지라도 골로새서 1장 15, 18절에 근거하여 성자의 영원한 발생에서 사용되는 태어난 자(genitus)의 개념과 마리아의 몸에 의해서 태어난 자(natus)의 개념 사이를 구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 전의 성자의 발생은 본성과 발생의 방식에 있어서 전 인류의 발생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성육신 시의 인성에 따른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른 발생에 의한 것이지만, 그의 본성에 따라 우리와 동일본체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고 그의 발생의 방식에 따라 기적의 방식에 의해서(miraculoso) 다른 것일 뿐이라고 정리되고 있다. 따라서 성자가 독생자(filius Dei unigentus)라고 부른 것은 인성에 따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신성에 따라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결론하고 있다.39)
Typus filiorum Dei
Filii Dei alii sunt
Nati
Adopti
Ex parentibus per generationem, qui proprie sunt naturales, quibus communicatur essentia parentum suorum
Ex Deo per gratiam
A Deo, ut
ab hominibus,&c.
creationis fit
conceptionis e Spiritu sancto,&unionis cum lovgw|, ut Christus secundum humanam naturam.
Adam post lapsum
omnes electi renati
Tota, ut Christo secundum divinitatem communicatur essentia divina patris tota
Ex parte, ut nobis essentia parentum nostrorum communicatur tantum ex parte
Angeli
Adam ante lapsum
Alius typus
Filiorum Dei
Unus est naturalis, nempe
lovgou? aeterni patris 
Alii omnes sunt per gratiam
creationis, ut
Conceptionis e Spiritu sancto Unionis cum lovgw|,
Adoptionis, ut
Angeli
Adam ante lapsum
ut Christus secundum humanam naturam
Adam post lapsum
omnes electi renati
중보자의 개념의 경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은 그리스도의 직책에 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의 어떤 죄든 그들의 영원한 파괴에 의해서 속죄될 수 없을 만큼 죄악 된 것으로 그런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에 대한 형벌을 참아낼 수 있는 자이어야 하고 동시에 형벌을 받는 장본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중보자는 성부도 아니요 성령도 아닌 오직 성자만이 될 수 있다면, 그 때의 중보자(mdiator)의 개념은 사람인 중재자(medius)와 구별된 직책의 개념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중재자이시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중보자라고 한 것이다.40)
반면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중보자의 직책을 표시하는 예수보다 좀 더 충만하고 분명하게 표시한 것으로서 그 안에서 중보자의 직책의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 표현된 것이라고 하였다.41)
그러나 그리스도가 세 직책들을 가진 중보자이신 것은 신성의 관점에서만 중보자이신 것도 아니요 인성의 관점에서만 중보자이신 것이 아니라, 각 본성의 관점에서 중보자42)이시기 때문에, 그 중보자의 한 본성의 속성들은 속성들의 교류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전 위격의 것으로 돌린다43)고 하였다. 이런 정의 아래서 성경에서 성자가 성부보다 못하다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인성의 관점에서(respectu naturae humanae)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중보자의 직책의 관점에서(respectu officii Mediatoris)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44)
그러나 성자는 하나님과의 중보자 혹은 여호와와의 중보자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서 성자는 성부와의 중보자라는 표현이 허용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45)
따라서 성부께서 성자에 의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대로 처음부터 성부는 성자에 의해서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한 발생에 의해서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 영원 전부터 중보자의 직책으로 임명을 받음에 의해서 항상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46)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우르시누스의 신학적 입장이 기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에게 깔려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별히 이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발전된 구조로부터 이르기를, 성자와 성령이 보내어 졌다(missus)고 말할 때도 그 파송(missio)이 공간적 운동의 의미에서나 마치 하나님 자신 안에 어떤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성자와 성령에 의해서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한 영원한 의지와 작정에 대한(de aeterna voluntate&decreto aliquid per filium aut Spiritum sanctum perficiendi) 것으로 그리고 성자 혹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지의 집행과 계시에 대한(de hujus voluntatis per operationem filii&Spiritus sancti executione&patefactione)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7)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였을 때도, 그가 하늘로부터 와서 땅 위에 있었으나, 하늘에도 있었다는 것이요 성령이 전에 존재하여 이미 사도들 안에 거하셨으나, 그가 오순절 날에 보내어 졌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이런 위격들이 전에 존재하지 않은 곳에 존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들이 성부가 원하신 것들을 세상에서 유효케하시고 성부의 뜻에 따라 스스로 현존성과 유효성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한다는 것48)이다. 
오직 예정론에 대한 위치49)
가 오해되고 있었던 것 이외에 그렇게 칼빈의 신학적 근본의 틀을 우르시누스가 정확하게 읽고 발전시키고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구원의 서정 안에 예정론이 다루어지는 경향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체계 일반과 무관하지 않지만, 칼빈이 마지막 기독교 강요 판에서 예정론이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 1539년 판에서부터 신학교재로 사용하려는 방향 때문에 굵은 신학적 주제들과 함께 처음 예정론이 독립적인 주제로 등장하였을 때, 구원론에 대한 종교개혁의 주된 주제들이 모두 다루어 진 이후에 부록(appendix)으로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주제(제 7장)가 이어지고 제 8장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주제가 다루어 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서 그런 부록간에 이어지는 문맥이 중요한 데, 많은 학자들이 그 부분을 놓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지식으로부터 구원의 교통으로 들어가는 교리의 총체(summa doctrinae qua ex vera Dei nostrique notitia, in salutis communionem pervenimus)”에 관한 모든 주제들은 지금으로 끝났고 부록으로 첨가된 것이 바로 신구약의 유사성과 차이에 관한 주제였다. 제 7 장의 이 주제는 “창세 이후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부분으로 채택하셨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율법과 그 교리의 끈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은 자들”50)임을 다루는 주제였고 그 중심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종교와 경건의 다른 규범이 없었다는 것(non aliam unquam fuisse in Dei populo religionis pietatisque regulam)”이요 “우리의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은 실체나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아무 것도 다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것이며 경영에 있어서 다양하다(Patrum omnium foedus adeo substantia et re ipsa nihil a nostro differt, ut unum prorsuss atque idem sit; administratio tamen variat)”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룬 제 7 장의 마지막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이 거부되었다가 “이제 공개적인 부르심에 의해서(publica vocatione)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등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51)는 문맥으로 끝나고, 제 8 장의 시작은 “그러나 생명의 언약이 모든 인간들 사이에 일률적으로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그들 사이에 계속 동일한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에 있어서 경탄하리만큼 신적인 판단의 깊이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역시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자유성에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이다”52)는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구원이 값없이 제공되고 어떤 이들에게 그 기회가 닫혀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곧바로 크고 중대한 의문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문맥이 바로 예정론이 등장하였던 문맥이다.
이런 문맥으로 이어지는 그런 대 주제들은 이미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교회에 대해서 고백할 때 포괄적인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 큰 주제로 발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거룩한 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에 대해서 칼빈이 정의하기를, “천사들이든 인간들이든 사람들 중에서 이미 죽은 자들 혹은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요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 어느 땅에서 행하든 어느 민족 중에 흩어져 있든, 택자들의 전체 수(universum electorum numerum, sive angeli sint, sive homines; ex hominibus , sive mortui, sive adhuc vivant; ex viventibus, quibuscunque in terris agant, aut ubivis gentium dispersi sint)”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자요 군주이며 한 몸의 머리로 계신 한 교회, 한 사회, 한 백성”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모든 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들이 한 머리에 의존하는 대로 한 몸처럼 하나로 함께 자라간다(coalescant)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원과 관련해서는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선으로부터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로 모아지도록 택함을 입은 자들”53)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택자들이 얼마나 되든 그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교회의 지체로 채택되어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성화되도록 택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또한 놀랍게도 “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동시에(simul) 살고 영생의 같은 기업으로 부르심을 받는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소명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긍휼의 질서(ordo misericordiae Dei)는 칼빈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즉 “그들로 하여금 그를 하나님과 아버지로 깨닫게 함을 나타내어 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면서 부르신다, 그의 완전으로 장식하고 그의 불완전을 은폐케 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고,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히 거룩하고 흠 없이 나타나기까지 날마다 그의 육체의 부패로부터 깨끗케 하여 생명의 새로운 것으로 중생케 하시는 그의 성령의 은택들로 그들에게 물을 대면서 의롭게 하신다, 그의 왕국의 위엄으로 만물 안에 만물을 통하여 계시되면서 영화롭게 하신다. 그와 같이 주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면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를 위해 정하셨던 그의 영원한 선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선택한 전체 사람들 안에서 어떤 예외도 없이 그런 방도로(ad eum modum) 알리고 나타낼 때, 이런 방도로(in hunc modum) 부름을 받고 의롭게 되지 않는 사람들은 어느 때도(unquam)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자는 없다.”54)고 하였다. 그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정의하였던 것은, 첫째로 지구의 전체 틀(tota orbis machina)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그것을 허물거나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교회와 그것의 구원이 너무도 확실하고 견고한 자리 위에 있고 불변하며 실패할 수 없고(nec ..... variare aut deficere potest) 잘못하고 미끄러질 수 있어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렇게 정의한 것은 지구의 창조 이후로(ab orbe condito tempus) 주께서 땅 위에 그의 교회를 가지지 않으셨던 때가 없는 대로, 마지막 시기까지도(ad consummationem saeculi) 그가 그것을 가지지 않는 때가 없을 것이라는데 있었다. 어떤 시대도 그의 긍휼을 맛보지 못한 때가 없도록 하셨다는 데 있었다. 즉 모든 시대에 구원의 방식으로서 구원의 서정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칼빈의 강조는 교회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의 신뢰에 근거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믿음과 분리할 수 없다에 대한 강조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불가해한 지혜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조사하는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누가 선택을 받았고 누가 버림을 받았는지 우리에게 분명하다(Comprehendere quidem non possumus incomprehensibilem Dei sapientiam, nec eam excutere nostrum est: ut nobis constet, qui aeterno eius consilio electi, qui reprobati sint)”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확실히 붙들어서 그 믿음을 굳게 지킬 권리만 있다는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확실하게 판별하고 택자와 유기자 사이를 구분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니며 그런 조사행위가 우리의 믿음의 일(fidei nostrae opus)도 아니고 믿음의 확실성(fidei certitudo) 안에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의 특권(singularis Dei praerogariva)이라고 칼빈은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인간의 눈과 오직 하나님의 눈(solius Dei oculi) 사이를 구분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말씀의 사역자들에 준 교회 열쇠권도 누가 교회에 속하는지, 누가 외인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요 그런 권세를 통해서 우리 앞에 밝히 표시하거나 눈앞에 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해석이었다.
신학 전반에 대한 칼빈의 그런 근원적 이해55)가 기독교 강요의 수정판들에서 계속 체계적으로 발전이 되고 증보되었던 것이다. 이런 칼빈의 신학의 발전이 후대에 좀 더 쯔빙글리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체계와 결합되어 작정이나 예정이 의지의 역사로 이해되었던 것이 칼빈의 신학을 넘어 교리적 체계로 좀 더 발전이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와 창조와 섭리(집행) 사이에 작정과 예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개혁신학의 자연스러운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카톨릭 교치체계와 구별된 확실한 표지로서 어거스틴에 따라 교리체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만물의 최고 마지막 근원적 원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개혁신학의 특징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바젤의 폴라누스에 와서는 그 구조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완성을 보게 된다. 그에 의하면, 신적 위격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들로서, 위격들이 동일하고 단일하며 수에 있어서 하나라는 위격들의 동일본질성(consubstabtialitas) 혹은 동일본체성(co?ssentialitas)을 가리키는 동일실체(?moous?a)의 개념과 신성의 본질적 속성들에 있어서나 본체적 행위에 있어서(actu subsistendi) 그리고 역사들과 위엄 및 영광에 있어서 서로 동등하다는 점에서 동등성(ivso'thj)의 개념 및 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한 위격이 전 다른 위격을 꿰뚫으며 포괄하되, 각 위격의 전체를 소유하며 수에 있어서 하나요 동일한 본질로 말미암아 항상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서로간의 통전(περιψ?w,ρησιξ evna, λληλοξ = εωμπεριψ?evmpericw,ρησιξ)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위격들 사이의 차이는 근원에 따라서(secundum originem)와 질서에 따라서 그리고 역사에 따라서 구별된다고 하면서 근원에 따라서 발생과 발출의 개념들이 이해되고 질서에 따라서 영원성에 있어서 전이나 후는 없되 본성(natura)과 원인(causa)에 있어서 선행성이 있다는 것이며 마지막 역사에 따라서 위격적 역사에 관계된 것(personalia)과 본질적 역사들 안에서 행위의 질서와 방식에 관계된 것(essentialia)으로 나누되, 동일한 구분으로 내부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opus Dei ad intra = interna)와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opus Dei ad extra = externa)로 다시 이해하고 있다.56)
이런 자신과 피조물과 관계해서 삼위일체 안에서의 구조에 대한 내용이 어거스틴이나 스콜라 신학에서와 다르게 칼빈의 신학적 안목에서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와 성육신 이후의 그리스도 및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논쟁점이 성만찬에 있었다면, 그런 논쟁점이 된 배경에는 기독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만찬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칼빈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원인으로서 자신의 동료들의 순교적 신앙고백의 내용이 표현된 그 파리의 벽보(Articles veritables sur les horribles, grands&import!!!ables abus de la Messe Papale, inventee directement contre la sainte Cene de nostre Seigneur, seul Mediateur&seul Sauveur Iesus Christ.)의 내용에 “둘째로 이런 불행한 미사에 의해서 온 세계가 우상으로 파묻혀 있다. 빵과 포도주의 형식아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가 살아 계신 것처럼 길고 넓으며 완전하게 육체와 뼈 안에 육체적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위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거짓되게 우리가 이해하게 되겠는가? 그러나 성경과 우리의 신앙은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가르친다. 골로새인들에게 사도바울은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썼다. 들으라 사도 바울이 미사 안이나 성소 안, 상자 안이나 잔 받침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르기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하였다. 그 몸이 하늘에 있으면, 땅 위에 없고 그가 땅 위에 있으면, 하늘에 없다. 참된 몸은 어떤 크기의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한 때 한 장소 보다 더 많은 장소에 계실 수 없다. 한 사람이 20년 30년 동안 그들의 제병처럼 조그만 반죽 덩어리 안에 감추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을 때, 성 어거스틴은 이것을 잘 알아서 쓰기를,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진리(veritas Domni, la verit? du Seigneur)는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는 부활하였던 몸은 한 곳에 계셔야 한다. 참으로 그의 진리는 어디에나 편만되이 계신다(ubique diffusa est)’고 하였다. 그리고 풀겐티우스도 그와 같이 쓰기를, ‘주님은 땅 위에 계실 때 그의 인성에 따라(secundum humanam substantiam) 하늘로부터 떠나 있었고, 그가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땅을 떠났다. 그러나 무한하신 신성에 따라, 그가 땅으로 내려 오셨을 때, 하늘을 떠나지 않았고 그가 하늘로 올라갔을 때, 땅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57)고 표현되었다.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뿐만 아니라 1536년10월 5일 로쟌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토론에서도 칼케톤 신조에 어긋나지 않은 무한한 신성에 따라 편재하실 수 있는 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에 대한 분명한 고백에 대한 논증58)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그런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그대로가 칼빈의 기독론의 중심내용이 되어 왔고 루터주의와 논쟁된 개혁신학 일반의 독특성이 되어 왔다. 편재하실 수 있는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와 성육신 이후에 하늘에 없었고 승천 후에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전체(totum Christi) 사이의 구별에 의해서 모든 일반적 역사들과 구원의 역사 및 교회 안에서의 성례일반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 진 것이다. 우르시누스 이래 창조의 중보자에 대한 개념이나 코케이우스의 구원의 언약에 대한 내용은 17세기 이전으로 돌아가 예정론에 있어서 예정의 대상들과 수단들에 대한 명확한 구별과 삼위일체 구조 안에서 성자와 그리스도 혹은 중보자에 대한 명확한 구별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잘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룰 내용이 아니다고 본다. 다만 신성과 인성에 따른 두 의지론에 대한 입장은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제한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칼케톤 신조를 버리지 못한 이상 성육신 이전의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고 해야 되고 인성에 따라 완전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자로서 또한 다른 의지를 가질 수 있으나 한 위격으로 계신 이상 두 본성이 분리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의지로 나타났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전체에 따라 한 의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전 그리스도에 따라 한 의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도 한 위격에 따라서는 두 의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에 따르면 다른 의지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한 의지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에 따라 속성의 하나로서 그리스도의 의지가 이해되어야 하고 대상과 관계해서는 다른 속성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 구원의 먼 원인들과 가까운 원인들과 관계된 타락 전 선택설에 대해서 
칼빈의 예정론의 가르침에 대해서 위선자요 거짓말쟁이며 범죄인의 후견인으로서 사탄보다 악하다고 정면으로 비난하였던 Hieronumus Bolsecus가 선택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어떤 이가 선택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파멸을 위한 예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 때문에 제네바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리를 받는 그 심문과정에서 그는 선택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 근거가 구원에 유효한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제공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가 그것을 받아 드리고 어떤 이가 거절하는 근거는 모든 인류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지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공로라는 용어도 증오하였다. 제네바 교회가 이런 Bolsec의 잘못들을 열거하여59) 쮜리히, 베른, 바젤 등의 교회들에게 보낸 결과, 그 당시 쮜리히 도시의 입장은 첫째로 롬 9: 16 과 엡 1: 4-6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공로 없는 자들과 죄인들을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케 되는 선택은 모든 이들에게 값없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하나님의 값없으신 긍휼의 모든 구원이 인간들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하였다.60)
제 2차 답변의 경우에도 이런 입장들이 근원적으로 변경되지 않았다. 즉 선택의 대상은 죄인들이요 선택은 모든 이들에게 값없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역사들에 있어서 죄를 원하시지 않았고 죄책에도 예외가 되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유기자들에 대한 고백도 생략해 버렸다. 바젤교회는 더 혼돈되게 답변을 보내 왔다. 즉 엡 1:4 ; 막 16: 15-16 ; 딤전 2: 4 ; 요 6: 44; 요 3:19의 성경구절들을 열거하면서 마지막 짧게 우리는 예지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예정과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며 우리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61)
베른교회는 Bolsec에 대해서 좀 더 호의적이어서 어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보편성에 대해서 성경적임을 인정하였고 신적인 선택이나 예정은 인간의 부패된 정신으로부터 판단하기에는 신비로운 문제로 넘기고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의 보편적 선포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네바 교회 밖의 교회들의 그런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판단에 기초하여 Bolsec를 치리하였다. 결국 1551년 12월 23일 펠라기우스주의자로 판결되어 최종 제네바로부터 쫓겨났다. 그 무렵에 문제의 배경이 되는 피기우스와 게오르기우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서 비판한 영원한 예정과 섭리에 관한 글(1552)에서 칼빈이 처음 조직적인 예정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밝혔다. 칼빈에 따르면, 문제로 삼고 있는 피기우스와 게오르기우스 모두가 친히 채택의 은혜 속에 누가 심어질지는 우리들의 자유에 있다고 주장하고 누가 택자들이고 유기자들인지는 하나님의 의논에 달려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각 자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둘 중 어느 운명에 처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복음을 믿고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은 자들로 남아 있는 이 구별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이나 그의 신비한 의논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개인적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기우스의 경우,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불변의 의논에 의해서 차별 없이 모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창조하였다(Deum immutabili consilio creasse Note indistincte omnesad salutem)는 주장을 펼쳤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불변의 의논에 의해서 창조하였을 때, 그의 의논의 내용이 모든 이들의 차별이 없는 구원을 의도하셨다는 의미에 가깝도록 표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의 결점을 예지 하셨을 때, 그 선택이 확고 부동하도록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공통적인 것이 되는 치료수단을 더한 것이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선택이 확고해 졌다는 논리가 내세워졌음을 칼빈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인류의 구원의 선택의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의 경우 자신의 완고함에 의해서 극단으로 악과 은혜의 멸시 가운데 계속해서 고집하는 일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 예지에 의해서 유기한 자들이 있었다는 그들의 논리를 칼빈이 끝으로 첨가하고 있다.62)
이런 논리에 의해서 그들이 어거스틴의 예정론 입장을 잘못되었다고 주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이 그들이 첨가한 하나의 논리를 더 소개하고 있는데, 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을 예지하기 이전에 생명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자 하시는 의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것, 따라서 하나님 자신 안에 질서에 있어서 인간의 구원의 사려가 죽음의 예지보다 선행하였다(Quod Deus scilicet prius creandi ad vitam hominis consilium ceperit, quam eius lapsum praesciret, ideoque salutis humanae cegitatio mortis praescientiam ordinein ipso Deo praecesserit)는 하나님의 이중예지(duplex Dei praescientia)63)의 논리를 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타락의 예지 전 생명을 위한 창조의 의논, 죽음의 예지 전 인간 구원의 사려를 주장한 셈이다. 종합하자면, 소위 타락 예지 전 만인의 구원 의논설, 죽음 예지 전 만인구원 사려설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칼빈의 소개 앞에서 그의 답변 가운데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어떤 논쟁점이 발견될 수 있는지를 사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로마서 8장, 디모데후서 2장 19절, 베드로전서 1장 20절, 사도행전 2장 23절, 요한복음 6장의 증거들보다 로마서 9장의 증거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는64)
증거로 칼빈은 보고 있다. 칼빈은 그런 개념을 그 선택이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선악을 알기 전이라는 표현에서 찾고 있다. 그런 표현들 속에서 “그 자격은 행위들에 의하여 야곱에게 얻게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행위를 고려해서 야곱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선도 악도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와 같이 구별하였다”65)
는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칼빈의 다른 증거에서도, “그들에게 선이나 악이 일어나기 전에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공적에 대해서 모든 고려를 제거하기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쌍둥이 형제에게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렸을 때, 그 근거로서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에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확증하기 위한”66)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의 예견된 행위들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바울이 쓰고 있다면, 내용적으로 선택에 있어서 선행이나 타락 등 어떤 행위들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표현이 칼빈에게서 발견이 되고 있다. 즉 “바울은 그런 선한 신학자들에게는 믿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무가치하다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본성의 부패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기 시작할 때, 그로부터 당연히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우신 작정에 의해서 누구든지 그가 선택한 자들을 선택하시고, 장차 순종하는 아들들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 밖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사려하였다( quum Paulus pro confesso sumeret quod bonis istis theologis est incredibile, omnes ex aequo esse indignos, aequam naturae in omnibus esse corruptionem, secure inde constituit, Deum gratuito suo proposito eligere quoscunque eligit: non quos obsequentes fore sibi filios praevideat. Denique qualis extra Dei electionem sit hominum natura Paulus considerat:).”67)는 표현이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선택에 있어서 예지된 행위들을 고려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였으나, 바울이 마지막으로 선택 밖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사려하였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었다. 그러나 타락 후 선택설처럼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사려하였다는 표현은 아니였다. 다만 바울이 선택 밖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사려하였다는 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지만, 모든 이가 죄인들이라는 고백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택이 성립한다는 문맥에서 보면, 무엇인가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란 사실을 선택과 연결시켜 볼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선택 밖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사려했다고 했기 때문에,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본다. 
CO VIII, 360: " Habet in se ipso Deus absconditas quorundam factorum causas, quas rebus conditis non inseruit: eas implet, non illo opere providentiae, quo naturas substituit ut sint: sed quo eas administrat prout voluerit, quas prout voluit, condidit.."????????????????( CO VIII, 297: "Non ergo discussit Pighius, sicuti putabat, optimam et aptissimam symmetriam, qua inter se causa propinqua et remota congruunt"???????????(?Ħ????°??-분 하나님의 의논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고 따라서 앞선 표현대로 인간의 견해로 이해될 수 없다68)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나 피B!?? CO VIII, 295: "Etsi enim ante defectionem Adae, quid facturus esset Deus, occultas ob causas statuerat, nihil tamen ab eo damnari nisi peccatum in scriptura legimus."??????????????Ħ???????-과 먼 원인이 상호 조화되어 있는 최상의 그리고 최고의 균형을 생각하지 못한 것69)이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많은 이유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의지가 만물의 D!?? Loc. cit.: "Ita restat, ut iustas habuerit causas in reprobanda hominum parte, sed nobis absconditas: nihil autem in homine oderit ac damnet, nisi a justitia sua alienum."???????????!D???Ħ???????-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부터 멀지 않은 이상 인간 안의 어떤 것도 미워하시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70)는 것이다. 따라서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따라)!????????더미한다(procul adoret)71)고 한 것이다. 그렇게 칼빈은 아담 안에서 일어난 것은 어떤 것이든 신적으로 정해진 것(quidquid Adae accidit, divinitus fuisse ordin)Ŋ??.72)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 있는 피기우스의 견해가 아담의 타락 이전에 구원 안에 모든 이들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의논에 대한 입장73)이라면, 상기의 칼빈의 입장에 있어서 미묘한 성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만인의 구원에 대한 견해는 말라기 2:10, 로마서 10장 12, 로마서 16:26 등에 근거하지만, 칼빈이 성경 전체의 문맥이나 그 구절들의 전후 문맥에 대한 오해로 그런 결론에 이른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7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원인보다 앞서게 하는 모순으로 인하여, 아담의 창조 이전에 장차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것들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였던 대로 죄로 인하여 유기자들의 멸망이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피기우스의 반박에 대해셔, 칼빈은 그 말들은 참이라고 긍정하면서도 두 문장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들로서 칼빈은 인간이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불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창조되어 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예지하고 있었지만 파멸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확실히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75)
건전한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작정이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76)이라고 논박하였다. 
그러나 그런 전체적 문맥 가운데 칼빈의 글에는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있다. 즉 칼빈에 따르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멸망의 다수로부터(ex perdita massa) 그에게 보이신 자들을 선택하시고 유기하셨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친 후 바울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되었는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감격에 넘쳐서 오오 깊도다라고 말하였다77)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고백하고 그런 고백을 수차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전에는 어거스틴에 따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여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의지 밖에 일어난 것은 없다고 하였고 악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도리어 악으로도 선용하는 것이 그의 전능하신 선하심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입장에 동의를 보내면서 그 내용으로 신비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정죄된 아담의 자손들로부터(ex damnata Adae sobole) 보신 자들을 선택하고 원하는 자들을 유기하셨다는 부분도 믿음의 행사에 더욱 더 적당하고 더욱 많은 열매를 낸다고 하였던 것78)
이다. 거기에서 다만 칼빈은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강조하기를 원하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결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전에 전 인류 및 개개의 인간에게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정하였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확고히 정한 작정이었다는 사실과 아담 자신이 자신의 결점의 공로로 인하여 죽음이 더하여 졌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로 인하여 은혜롭게 선택하신 자들을 채택의 영광으로 가치화 하기 위해서 그의 파멸된 인격 안에서 전 후손들이 정죄하였다79)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따라서 칼빈의 경우, 창조 전과 타락 전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작정의 개념과 타락 후 선택설의 입장이 구별되어야 함이 제안이 되고 있다.80)
따라서 칼빈이 사용하고 있었던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개념과 도르트회의에 있어서 타락 후 선택설이란 개념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후자는 창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안에서 인간이 예정의 대상으로 타락한 자들 중에서 어떤 자들을 택하였다는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도트트회의의 결정이 내린 내용은 예지된 믿음의 조건으로 하는 선택에 대한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신학적 내용을 극복했지만 칼빈이 이해된 개념과 다른 그런 개념아래 아르미니우스의 타락 후 선택설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서 9장 18절을 중심으로 전 후 문맥에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원인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있어서 선과 악, 인간의 소원과 행위들 등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기본적인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신학의 전체적 열쇠를 푸는 정통개혁신학의 뿌리로부터 약간 벗어나기 시작한 부분이다. 그 후 웨스트민스터 성직자 총회에서 도르트회의에서 극복하지 못한 부분을 회복하고 모든 것을 다시 개혁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4. 교회의 실천적 영역들
1554년 여름 프랑크푸르트에 영국 피난민교회가 세워진 이래 교회 안에 사용되어야 할 기도서와 교회의식에 관해서 영국으로부터 망명한 형제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면서 제네바 교회에 자문을 구하는 일로 인하여 칼빈과 그들의 직접 편지교환을 한 일이 계기가 되어 개혁교회 안에 다른 양상의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논쟁은 단순히 기도서나 교회의식에 관한 문제라기보다, 목사의 제복, 절기들, 성만찬을 받는 자세, 사적인 성만찬 집례문제, 세례시 십자가 표식행위 등 다른 예식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칼빈에게 어려운 자문이 되겠지만, 그러나 영국의 계속적인 종교개혁의 근본문제들이 거기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칼빈이 명료하게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순수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추천할만하다고 하지만, 습관을 버리지 않으려는 어리석을 자들에게 외적 의식들에 관한 한 많은 것들이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유연하게 양보할 수 있어야 하고 다만 교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심을 죽게하고 파괴시키는 완고함에 대해서 더 경계하라81)
고 칼빈은 권고하였다. 이런 권고는 칼빈에게 당연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적 기도나 설교 및 신비적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예배에 있어서 시간들이 정해지는 것이나 설교 시간에 조용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 정소가 정해지는 것, 다같이 찬송하는 것, 성례집행을 위해 날들이 정해지는 것,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기타 유사한 것들(요리문답, 교회치리들, 출교와 금식, 동일한 목록에 속할 수 있는 것들) 외에 시대의 조건에 의존하고 어떤 한 형식이 모든 시대에 적합하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 주의말씀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의 말씀에 일반적 규범들에 대해서 분명한 더 한 것이 없다면,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민족이나 시대의 풍습들에 다양하게 적응해야 한다고 칼빈은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효용을 위해서 관습들은 변하고 철폐되며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씨름하였던 죤 낙스의 신학적 과제는 칼빈과 다른 좀 더 진보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이 후에 결국 프랑크퓨르트를 떠나 이제 칼빈의 보호아래 제네바에 영국의 다른 피난민 교회를 세울 때, 그런 진통의 과제들이 하나의 고백서82)로 발전되어 영국의 개혁교회의 참된 개혁에 있어서 방향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 후대 영국의 퓨리탄인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이나 스코틀란드의 멜빌의 종교개혁들은 이미 종교개혁의 유산들을 다시 회복한 것도 있지만, 아직 쯔빙글리나 칼빈으로부터 방임되었던 관례에 대한 종교개혁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냈던 퓨리탄 성직자들의 교회생활에 대한 신학적 개혁들이 장로교의 역사적 유산이 된 것이다. 
교회정치와 관련해서 베자나 우르시누스로부터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칼빈의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교회의 표지인 교회 권징을 위해서 장로회(consensus seniorum)와 공동의회(consensus plebis)를 추천할 때, 군주도 한 평민으로서 교회권징에 복종하여야 함으로 에라스투스주의를 비판하였고 역시 회중교회에 대해서 “완화된 권징을 바라거나 고의든 모르고 하든 회복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의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 스코틀란드 총대들에 의해서 주장된 장로회 자체(unitas)에 있다는 열쇠권에 대한 주장들까지는 칼빈과 그를 따르는 대륙의 개혁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전이 이루지지 못했다. 동시에 성경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노회나 장로회, 대회 그리고 총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징의 절차에 관한 성경적 확고한 기반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신약시대의 대부분 지역교회들을 장로회 정치가 이루어 졌던 노회로서 교회라고 해석하였던 것이 가장 큰 진보의 내용이 되고 있다. 
5. 과학의 발전과 개혁신학의 원리적 과제
그러나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으로부터 발굴되었으면서도 아직 개혁교회 안에서 크게 계승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칼빈의 과학에 대한 태도이다. 17세기 초기까지도 점성학과 천문학이 잘 구별이 되지 않아83) 별들과 항성들의 운동들이 조류나 기후와 같은 물리적 현상들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 기분, 행동들 및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많은 군주들이 별들의 운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예견하기 위해서 점성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여전하였다. 그래서 17세기 중엽까지 17세기 초의 대표적 점성학 저서인 William Lilly의 책은 수천 권이 팔려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특별히 의학자들이나 의사들은 몸 안의 네 기운들(피, 담, 화, 우울)이 몸의 차고 덥고, 마르고 습한 균형들을 깨지게 하여 병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달은 모든 습한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끼쳐 미친 행위의 증가와 관계하고 화성은 화를 증가시키며 금성은 우울을 증가시킨다고 생각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84)
그런 비과학적 의식은 연금술과 화학이 잘 구별이 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자기력과 전기력에 대해서 분리해서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어도, 볼타에 의해서 전기력과 자기력과 희미한 관계들이 알려지고 인간이 정전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기구들(electrophorus, a voltaic Pile 등)이 발명되기까지 사람들은 18세기 말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고체나 액체 상태에 대해서 기본 원자들에 의해서 구성들에 의해서 무게와 형상들이 같고 원자들 간의 상호 끌리는 힘에 의해서 설명하는 원리와 분석에 역으로 화학적 합성(a Chemical Synthesis) 실험들에 대한 기술 및 그것들을 분석한 기존 화학물질들의 원자들의 구성 표들(a Table of Atomic Weight)이 1808년 책으로 알려지기까지 그런 미신적 신앙과 행위들은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서 카톨릭 교회는 물론 일찍이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도 예외되지 않았고85) 루터나 쯔빙글리, 멜랑히톤 등의 의식 속에도 이런 점성학에 대한 긍적적인 이해가 남아 있었다.86)
그러나 칼빈의 경우, 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예외가 되었다. 칼빈은 점성학의 미신적인 성격을 강하게 비판하고 하나님께 감추시기를 원하는 것을 호기심으로 알고자 시도하는 일을 비난하면서 계시된 뜻 이외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불경건한 허구와 사탄적인 미신으로87) 비판하였다. 그 대신 건전하고 참된 천문학은 인간에게 크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를 찬양하는데 도움88)이 되지만, 점성학은 자연적 질서인 도덕적 질서를 뒤덮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연의 질서는 영원한 질서가 아니고89) 다만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서 미리 정하셨으며 그것에 따라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90)
그러나 성경에 따라 태양이 지구를 위에서 운동하고 열과 기근, 비와 폭풍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점성학의 전 원리와 실천이 미신적이고 무용하며 유해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역시 연금술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비판하였다.91)
오히려 무익하고 사소한 호기심을 버리도록 하는 사도 바울이 추천한 적정(sobriet?)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종으로 이끄는 고삐와 같고 선한 양심 가운데 복음의 말할 수 없는 보고가 보존되는 것처럼 열심히 행하게 한다92)고 하였다. 결론 부분에 와서, “첫째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유도하고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추구하게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을 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둘째로 영혼으로 하여금 그의 소명에 속한 것이나 적어도 선하고 유익한 것들에 전념하게 한다”고 하면서 짧게 이르기를, “어떤 학문도 하나님의 경외나 영생에 이르도록 주신 그 가르침과 충돌이 되지 않는다”93)고 결론하고 있다. 이런 글을 통해서 칼빈은 자연에 대한 참된 관찰이나 연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격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의 효용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개혁교회 안에 과학에 대한 적극적 장려가 이루어진 배경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맺은 말
그러나 결론적으로 모든 신학적 개혁에 있어서 전체적인 맥은 이미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초판에서 언급한 대로, 어떤 사람이 털끝만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라는 점이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주님의 의라도 불리는 것으로서,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라고 칼빈은 해석하였다.94)
성경에 자주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표현이 우리 행위가 그런 보상의 원인이 된다(opera a nostra huius retributionis causam esse)는 말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우리의 선행이 그런 상급을 가져다주는 공로가 되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성령이 인정하려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95)
보상의 소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올바르게 사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96)
특별히 이런 강한 입장이 중생 된 이후의 그리스도의 삶을 걸어가는 자에게 경고하는 칼빈의 말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결이란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된 자들이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되는 길에 불과하다97)고 생각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행의 찬양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나누는(inter Deum&hominem partimur) 그런 식이 아니라, 그것 전부를 온전히 통채로(totam integram&illibatam) 주님께 돌리는 그런 공로라는 것이다.98)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칼빈에게 있어서 맞물러 있다. 즉 인간은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어떤 것이 나오는 법이 없고, 인간이 가진 것이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주받을 것이라 선언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룬 것은 거의 죄 뿐이고 그런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가증한 것이어서 인간들의 모든 의를 전부 합한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의 죄에 대한 보상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김을 받은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들 자체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에게 이런 가치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이유들 외에도 예정론에 대한 특별히 이해와 관계된다. 즉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그리스도가 닦아 놓은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신자의 구원의 시작이거나 그가 그들에게 이제 공로를 행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 기쁘신 뜻의 작정에 따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 자신의 죽으심으로 사망의 형벌로부터 구속된 자들이고 멸망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이라는 것이며 그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그리고 유산자로 채택되었다는 것이요, 그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화목케 된 자들이며, 결코 멸망을 받지 않고 타락하지 않도록 아버지로부터 그들에게 보호함을 받은 자들이요, 그에게 접붙여 이미 영생의 참여자임을 의미한다고 대답하고 있다. 짧게 그리스도의 모든 것들이 그들의 것이요 그들이 그 안에서 모든 것들99)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런 논리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논리라고 본 것이다.
1) CO IX, 51: "Quum enim a tenebris papatus emergere incipiens, tenui sanae doctrinae gustu concepto, legerem apud Lutherum, nihil in sacramentis ab Oecolampadio et Zvinglio reliquum fierii praeter nudas et inanes figuras, ita me ab ipsorum libris alienatum fuisse fateorr, ut diu a lectione abstinuerim." 
2) CO IX, 52: "Mihi, ut plurimis aliis Dei cultoribus et Christi ministris, non parum tunc doluit, res denuo sic esse exulceratas. Quod tamen unum mihi restabat, tacitus in sinu meo gemui." 
3) CO IX, 57: "Quando tam stupidus es, Westphale, ut pro nihilo ducas sacrum illum sanguinem, quo obsignata fidei nostrae veritas fuit, scito quum ab annis quindecim centum vel etiam plures in Gallia non minus alacriter ad mortem imprimis terrificam se obtulerint, quam tu superbe in otio tuo tripudias, ne unum quidem fuisse, qui nobis non subscripserit. Nunc pluris sutorium tuum atramentum, quam illorum sanguinem aestima. Ante biennium uno die Lugduni quinque exusti fuerunt: ac ne quid ad cruciatus saevitiam deesset, lento igne ustulati. Sequuti sunt paulo post in eadem urbe alii tres, in vicinis oppidis duo. Nondum praeteriit quartus mensis, ex quo Cameraci (quae urbs non nisi unius dici itinere hinc distat) quinque etiam uno die simul cremati sunt." 
4) CO IX, 57: "Eorum confessio, quid passim sub tyrannide Antichristi sentiant pii omnes, prodidit. Quare ne posthac eos tibi suffragatores esse garrias, qui uno omnes consensu a tua doctrina abhorrent, ac tacitis votis tuam sodaliumque intempepriem exsecrantur." 
5) CO IX, 57: "Berengarii haeresim rursus a nobis excitatam esse dicit. Si tibi ille est haereticus, cur non protinus sublato vexillo in papae castra concedis?" 
6) CO IX, 59: "Sed dum tibi propositum esse vident omnes, Oecolampadium, Zvinglium, Bucerum, Petrum Martyrem. Bullingerum, Ioannem a Lasco labefactare, ut tota eroum existimatio concidat, quem omnino pium et aequum hominem in mundo esse putas, cuius stomachum in te non provocet tam maligna obtrectatio?" 
7) CO IX, 59: “Atque ut optimus quisque eius confessionis defensor rogetur, responsurum, non dubito, malis auspiciis turbari pacem, cuius retinendae studium non dissimulant, qui paulo plus autoritatis in Saxonia merentur quam centum Westphali.” 
8) Ioannis Calvinu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V, ii, 6: "Taceo autem quod anathematibus et diris nos expulerunt. Quod tamen ipsum satis superque nos absolvit, nisi Apostolos quoque schismatis damnare velint, quibuscum similem habemus causam". 
9) Ibid., IV, ii, 6: "Paulum quoque sequutus Cyprianus totius Ecclesiasticae concordiae fontem ab unico Christi episcopatu ducit". 
10) Idem., Institutio 1543, VIII, 163: "Corruat ergo ecclesia necesse est, ubi intercidit illa religionis summa, quae sola sustinere eam potest. Deinde si vera ecclesia columna est ac firmamentum veritatis (1Tim. 3, 15), certum est non esse ecclesiam, ubi regnum ocpupavit mendacium et falsitas.". 
11) Ibid., I, 48-49: “.... propter I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qui unus cum patre Deus cum esset (Ioan. 1), carnem nostram induit, quo nobiscum foedus iniret, ac Deo nos proxime adiungeret, quod peccat, longo intervallo ab eo distraxerant (Ies. 53). Hic mortis etiam suae merito, iustitiae Dei debita nostra persolvit, iramque eius placavit a maledictione ac iudicio, cui obnoxii eramus, nos redimens, ac peccati poenam in corpore suo perferens, ut ab ea nos solveret (Eph. 2, Col. 1). Hic omnem coelestium benedictionum opulentiam in terras descendens secum attulit, quas in nos larga manu effunderet (Ioan. I. 7. Rom. 8). Sunt autem dona spiritus sancti: per quem regeneramur, e diaboli potestate et vinculis explicamur, in filios Dei gratuito adoptamur, ad omne opus bonum sanctificamur; per quem etiam, quamdiu in hoc mortali corpore tenemur, emoriuntur in nobis pravae cupiditates, carnis desideria et quidquid naturae nostrae contorta corruptaque perversitas gignit; per quem de die in diem renovamur, ut in novitate vitae ambulemus ac iustitiae vivamus”. 
12) Ibid., 48-49. 
13) Institutio 1536, VI, 424. 
14) Institutio 1536, I, 92: “Hoc parum est: quod talem eius participationem adepti, utcunque simus adhuc in nobis stulti, ipse nobis coram Deo sapientia est; ut peccatores simus, ipse nobis iustitia; ut immundi simus, ipse nobis puritas; ut infirmi simus, ut inermes et satanae expositi, nostra tamen est quae ipsi data est in coelo et in terra potestas, qua pro nobis satanam conterat, et inferorum portas confringat; ut corpus mortis adhuc nobiscum circumferamus, ipse tamen nobis vita est. Breviter quod omnia illius nostra sunt, et nos in illo omnia habemus, in nobis nihil”. 
15) Institutio 1539., VI, 191(= Institutio 1559, III, xi, 23). 
16) Institutio 1536, II, 116. 
17) Ibid., II, 119: “Ut, quatenus Deus est, sit unus cum patre Deus, eiusdem naturae ac substantiae seu essentiae, non aliter quam persona distinctus, quam propriam ac distinctam a patre habet”. 
18) Ibid., II, 120. 
19) Loc.cit. 
20) Ibid., II, 135. 
21) Ibid., II, 136-7. 
22) Theses Theologicae in Schola Genevensi ab aliquos Sacrarum literarum studiosis sub D.D. Theod. Beza&Antonio Faio S. S. Theologiae professoribus&disputae. Genevae, M.D.LXXXVI, 3: "Ouvsia, ......&in quo toto ac eodem singulae personae sunsistunt suis proprietatibus distinctae; Uvposta,seij seu Personae in divinis, sunt illa ipsa ouvsia tota, suis relativis proprietatibus in communicabilibus inter se seipsa distinctae. Proprietates quibus personae distinguntur, sunt diversi u`pa,rxewj tro,poi, quibus, nullo modo secatur ouvsia, nec personae, eiusdem essentia separantur, sed ipse inter se reipsa distinguntur, ita ut una non sit altera ."; ibid., 7: "Etsi Trinitatis opera, quae ad extra vocant, inseparabilia sunt. tamen in iis efficiendis servanda est. ut personarum, sic etiam actionum personalium distinctio."; ibid., 8: "Sic igitur attributa a nobis dicuntur proprietates Deitatis essentiales, qui ..... ."; ibid., 9: : "Actiones porro ipsas quas Deitatis attributa fecimus, dividimus tum in eas quas Immanentes vocant, quod in ipsa Deitate agente sic permaneant, ut nullum opus extra agentem producant, quales sunt Providentia&Praedestinatio: tum in Transeuntes, id est, eas quae extra agentem opus relinquunt, vel passionem alicui inferunt, ut sunt Creatio&Redemptio." 
23) Ursinus, Z., Opera theologica, Heidelbergae 1612, I, 112, 114, 117ff. 
24) Ibid., 118. 
25) Ibid., 119. 
26) Ibid., 117. 
27) Ibid., 114. 
28) Ibid., 119. 
29) Ibid., 119: "Pater enim est a seipso, non ab alio exsistit: Filius a patre est genitus ab aeterno, hoc est, habet essentiam divinam sibi a patre ineffabiliter communicatam: Spiritus sanctus a patre&filio procedit ab aeterno, hoc est, habet eandem essentiam divinam sibi a patre&filio ineffabiliter communicatam." 
30) Loc. cit.: "Pater est prima persona,&quasi fons divinitatis filii&Spiritus sanctii: quia deitas ei a nullo est communicata, sed ipse deitatem communicat filio&Spiritu sancto. Filius secundas persona: quia deitas ei a patre communicatur per aeternam generationem. Spiritus sanctus tertia persona: quia ei deitas a patre&filio communicatur per aeternam spirationem." 
31) Ibid., 120. 
32) Ibid., 120: "Utraqeue vero differt a creatione, quod creari a Deo, est aliquid ex nihilo fieri divinae voluntatis imperio, nasci sive gigni,&procedere sivie emanare, est alium sive peronam aliam e substantia gignentis,&eius a quo fit emanatio, ineffabiliter ab aeterno produci: ..... " 
33) Ibid., 120: "Non recte, essentia divina genuit essentiam divinam, vel de essentia gignitur aut procedit persona. Recte essentia divina communicatur. Non recte, essentia divina gignitur, procedit: quia communicari&gigni non sunt idem." 
34) Ibid., 120: "Et tamen pater filio&Spiritu sancto,&filius Spiritu sancto non est prior tempore, sed tantum ordine existendi. Nulla enim persona altera est prior aut poeterior tempore, aut dignitate, aut gradu, sed tantum ordine, quo aliae ex alis existunt." 
35) Ibid., 120. 
36) Ibid., 112: "Omnes igitur personae omnia ad extra operantur, sed servato hoc ordine, ut pater omnia agat a se per filium&Spiritum sanctum, filius omnia a patre per Spiritum sanctum, Spiritus sanctus omnia a patre&filio per se. Sic igitur omnes etiam personae creant, redimunt, sanctificant: pater mediate per filium&Spiritum sanctum: filius mediate per Spiritum sanctumL Spiritus sanctus immediate per se: mediate autem per filium (quatenus videlicet is est mediator)." 
37) Ibid., 148-149. 
38) Ibid., 148: "Angeli enim dicuntur filii Dei non naturales, sed per gratiam creationis, ut&homo ante lapsum." 
39) Ibid.. 149. 
40) Ibid., 96. 
41) Ibid., 141. 
42) Ibid., 142: "Manet igitur, Christum esse unctum secundum utramque naturam: licet deversimode ut patet: Ergo etiam est propheta, Sacerdos, Rex&Mediator utriusque naturae respectu, id quod hae duae regulae in verbo Dei fundatae confirm!!!ant." 칼빈 이후 루터주의자들 안에서 Francescus Stancarus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에 동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신 이상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성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중보자라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르시누스의 입장일 수 있다. 
43) Loc.cit.: "1. Proprietates alterius naturae Mediatoris tribuuntur toti personae in concreto, secundum communicationem idiomatum, sed respectu ejus tantum naturae, cujus sunt propriea; ......" 
44) Ibid., 159. 
45) Loc. cit.: "Non enim quicunque est Iehova apud cum Filius est Mediator. Est enim Mediator apud Patrem." 
46) Ibid., 191: "1. .... Semper enim filius fuit persona alia, per quam pater omnia ab initio gubernavit, sicut per eandem omnia creavit. Hoc modo Christus ipsa generatione aeterna ad dexteram patris est collocatus 2. Quoad destinationem ad officium mediatoris aeterno factam. Nam ad hoc ab aeterno fuit destinatus, etiam secundum divinitatem suam." 
47) Ibid., 120. 
48) Ibid., 121: "Si filius dicit se a patrem missum esse in mundum: se de coelo descendisse:&taemen cum in terris esset, se in coelo esse. Et cum Spiritus sanctus jam ante esse&habitaret in apostolis, tamen missus illis dicitur in pentecoste. Missus est igitur in mundum uterque: non quia accepit exsistere alicubi, ubi prius non erat, sed quia in mundo, quae pater voluit, effecit, seque praesentem&efficacem juxta voluntatem patris ostendit." 
49) 하나님은 변할 수 없이 영원 전부터 만물들을 예지하실지라도, 그런 변할 수 없는 예지는 불변의 원인, 즉 영원한 의논과 작정에 의존한다(ibid., 129)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지는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기를 원하신 것만을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지식만이 아니라 그의 허락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행하고자 하는 것도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지식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섭리와 예정은 그 보다 제한적으로 모두 하나님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것만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의논(consilium Dei)이나 하나님의 작정 혹은 의지(decretum seu voluntas Dei)와 구별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 섭리와 예정의 차이는 전자가 만물과 하나님의 역사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지만, 예정은 합리적 피조물들에만 제한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loc.cit).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유기에 관한 영원한 예정론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교회론으로부터 기원되었고 정확하게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ibid., 212: "Locus hic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seu de electione&reprobatione, oritur ex loco de ecclesia: ideo recte cum illo coniungitur.")고 판단하였다. 
50) Ibid., VII, 225: “quoscunque homines ab initio mundii Deus in populi sui sortem cooptavit, eos hac lege atque huius doctrinae vinculo fuisse illi foederatos.” 
51) Institutio 1539, VII, 244: “Ista vero publica vacatione non modo Iudaeis aequabantur gentes, sed velut in demortuorum locum subire eas apparebat”. 
52) Institutio 1539, VIII, 244: “Iam vero quod non apud omnes peraeque homines foedus vitae praedicatur, et apud eos quibus praedicatur, non eundem locum perpetuo reperit: in ea diversitate mirabilis divini iudicii altitudo se profert. Nec enim dubium quin aeternae Dei electionis arbitrio haec quoque varietas serviat. Quod si palam est Dei nutu fieri ut aliis ultro offeratur salus, alii ab eius adituu arceantur: hic magnae et arduae protinus emergunt quaestiones, ......”. 
53) Institutio 1536, II, 137. 
54) Institutio 1536, II, 138-139. 
55) Cf. 김영규, 교회관에 있어서 칼빈의 신학적 발전과 그 의미,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3. 
56) A.Polanus, Syntagma III, viii, 624-625. 
57) Jean Crespin, Histoire des Martyrs, ed, Daniel Benoit, Toulouse 1885, III, 298-302. Cf.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WA 30/3, 116-7, 135 
58) CO IX, 881. 
59) 여기에서 필립 샤프는 그런 사건 당일에 칼빈이 과도하게 다루었고 그 후 개인적으로 여러 보내는 편지들에서 칼빈이 Bolsec를 속이고 건방진 자로 덮어 씌었다고 하나,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의미에서 Bolsec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답변들에 대해서 정리한 내용들은 사실들과는 전혀 다르게 정리하고 있다(Philip Schaff,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III, 504-505). 
60) CO VIII, 230-231: “..... Principio constituimus electionem, qua Deus ab aeterna immeritos et peccatores elegit, ac in Christo complectitur, per quem omnia vitae et salutis habemus, omnino esse gratuitam, ac omnem hominis salutem (quod fidei fundamentum est) gratuitae Dei misericordiae esse transscribendam, ... Deinde docemus, fidem, qua Christum complectimur, nullis impetrari meritis, sed mera Dei gratia per spiritum et verbum donari, eademque Dei gratia eandem fidem in nobis augeri et conservari, ...... Porro quod reprobi verbo Dei non credunt, sed impie contra Deum vivunt, id quidem ipsis imputari debet, non Deo, qui quos damnat, iusto et merito damnat. Sed et peccatum non in Deo sed in homine haeret. Deus enim, immaculata via eius: et Deus iniquitatem non volens ipse est. Iustus est in omnibus viis suis, et sanctus in omnibus operibus suis. Postremo non tollimus ordinem ex salutis negotio: non reiicimus aut commiscemus causas propinquas vel remotas. Confitemur Deum Iobo citra culpam suam intulisse manum. Confitemur illum opera usum esse Satanae et militum satanicorum, qui tamen culpa minime liberandi sunt, quum oculus ipsorum fuerit pravus. Sed et ipse Iob testimonium nobis ferens: Dominus, inquit, dedit, Dominus abstulit. Non autem: Dominus dedit, ait, diabolus abstulit.” 
61) CO VIII, 236: “................. et si quid recte voluerimus ad quietem nostram nosse, decere ut non a praescientia Dei, nec a praedestinatione et electione, nisi prout opus est, ..... sed a fide incipiamus, praesertim dum docemus simplices, .... hic enim non solum sophistam agit Hieronymus ille, sed et haeresim in quibusdam sapere videtur. ....... ”. 
62) CO VIII, 259. 
63) CO VIII, 260. 
64) CO VIII, 276: .... sed nunc altius conscendit; ibid., 277: .....quae longe remotior erat; loc.cit., ,,,,ultro huc deduxerit: 
65) CO VIII, 279: "Sed Paulus ultra etiamnum pergit: dignitatem hanc non operibus fuisse partam, neque operum respectu collatam ipsi Iacob. Neque id modo: sed Dei providentia sic discretos fratres, antequam boni quidquam vel mali egissent." Cf. ibid., 280: "Colligit Paulus, in electione Dei non haberi operum respectum, quia Iacob Deus fratri praetulit, antequam nati essent, et quidquam egissent boni vel mali." 
66) CO VIII, 279: "Boni quidquam vel mali ipsos fecisse, quorsum negat Paulus, nisi ut omnem meriti respectum tollat? imo nisi ut praecise affirmet, Deum non aliunde suspensas habuisse rationes, quum tam diversum de gemellis fratribus iudicium tulit?" 
67) CO VIII, 280. 
68) CO II, 891(1539): "sed quoniam eorum quae eveniunt, ordo, ratio, finis, necessitas, ut plurimum in Dei consilio latet, et humana opinione non apprehenditur: quasi fortuita sunt quae certum est ex Dei voluntate provenire." 
69) CO VIII, 297: "Non ergo discussit Pighius, sicuti putabat, optimam et aptissimam symmetriam, qua inter se causa propinqua et remota congruunt" 
70) Loc. cit.: "Ita restat, ut iustas habuerit causas in reprobanda hominum parte, sed nobis absconditas: nihil autem in homine oderit ac damnet, nisi a justitia sua alienum." 
71) CO VIII, 297: "quin arcanum Dei consilium, quo praeordinatus fuerat hominis lapsus, qua decet sobrietate, procul adoret fides nostra, et tamen quod propius apparet, conspiciat: totum humanum genus in Adae persona aeternae mortis reatu constrictum esse, et propterea morti esse obnoxium?" 
72) CO VIII, 298. 
73) Cf. CO VIII 297: "Quia enim illud de omnibus in salutem creandis Dei consilium, Adae lapsu fuisse superius, pro confesso sumit." 
74) CO VIII 295. 
75) CO VIII, 297: "Dicimus hominem hac conditione fuisse creatum, ut conqueri de suo opifice nequeat. Praevidit Deus Adae lapsum: nec certe nisi volens ruere passus est" 
76) CO VIII, 297. 
77) CO VIII, 316: "Postquam Paulus, Deum ex perdita massa eligere et reprobare quos illi visum est, docuit: quare et quomodo id fiat adeo non expedit, ut potius [ pag. 120] expavescens in clamorem illum erumpat: O altitudo! ( Rom. 11, 33.)" 
78) CO VIII, 317: " Altera autem pars, quod ex damnata Adae sobole Deus quos visum est eligit, quos vult reprobat, sicuti ad fidem exercendam longe aptior est, ita maiore fructu tractatur" 
79) CO VIII, 313: "Respondeo, tria hic esse consideranda: primo aeternam Dei praedestinationem, qua de toto genere humano, et de singulis hominibus quid futurum esset statuit, antequam cecidisset Adam, fixam et decretam fuisse: deinde, Adam ipsum, pro defectionis suac merito, esse morti addictum: postremo, in eius iam perditi et desperati persona sic damnatam esse totam progeniem, ut Deus, quos inde gratuito eligit, adoptionis honore dignetur." 
80) Cf. 김영규, 칼빈의 영원한 예정론에 나타난 타락 전과 타락 후 선택문제에 대해서, 안양대학 신학대학원 조직신학회(2007. 1월), §6. 
81) CO XV, 394: “...... Neque tamen eorum constantiam reprehendo qui, ut pro iusta causa depugnent, inviti in contentionem trahuntur: sed pertinaciam, quae sanctum formandae ecclesiae studium moratur et impedit, merito damno. Equidem ut in rebus mediis, ut sunt externi ritus, facilem me ac flexibilem praebeo, ita non semper utile esse iudico , stultae eorum morositati , qui nihil de consuetudine sua remittunt, obsequi. In Anglicana liturgia, qualem describitis, multas video fuisse tolerabiles ineptias. His duobus verbis exprimo, non fuisse eam puritatem, quae optanda fuerat; quae tamen primo statim die corrigi non poterant vitia, quum nulla subesset manifesta impietas, ferenda ad tempus fuisse. Sic ergo a talibus rudimentis incipere licuit, ut doctos tamen probosque et graves Christi ministros ultra eniti, et aliquid limatius ac purius quaerere consentaneum foret. Si hactenus in Anglia viguisset sincera religio, aliquid in melius correctum multaque detracta esse oportuit. ........” 
82) Cf. 김영규, 칼빈시대의 제네바 영국교회와 그 교회규례에 대해서,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회 2005. 
83) 칼빈에게도 astrologie judiciaire&naturelle 개념들이 알려져 있었고 이 중 astrologie judiciaire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그것은 참된 과학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CO VII, Advertissement contre Astrologie quu'on Appelle Iudiciaire(1549), 537). 그러나 참된 천문학은 “하나님께서 별들과 항성들에 대해서 적용하시는 자연의 질서와 경륜에 관한 지식이되, 그들의 직책들과 특성 및 힘을 판단하여 그 목적과 효용으로 만물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ibid., 516). 
84) Cf. http://history.wisc.edu/sommerville/367/367-121.htm 
85) G.Canguilhem, ?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des Sciences, Paris 2002(*1968), 44. 
86) Philip Schaff, op.cit., 551. 
87) CO VII, 515: “ Il y a eu de long temps une folle curiosit? de iuger par les astres de tout ce qui doit advenir aux hommes, et d'enquerir de l? et prendre conseil de ce qu'en avoit affaire. Nous monstrerons tantost, au plaisir de Dieu, que ce est une superstition diabolique.” 
88)Ibid., 516: “.... Quand Dieu ne nous auroit revel? de nostre temps la puret? de son Evangile, toutesfois, veu qu'il a resuscit? les sciences humaines, qui sont propres et utiles ? la conduite de nostre vie, et, en servant ? nostre utilit?, peuvent aussi servir ? sa gloire, encore auroit-il iuste raison de punir l'ingratitude de ceux qui, ne se contentans point des choses solides et bien fond?es, appetent, par une ambition outrecuid?e, de voltiger en l'air. Maintenant, puis qu'il nous a eslargy tous les deux, c'est qu'il nous a remis les ars et sciences en leur entier, et sur tout nous a restitu? la pure cognoissance de sa doctrine celeste, pour nous mener iusques ? luy et nous introduire en ses hautz secretz et admirables, s'il advient qu'aucuns, au lieu d'en vers champs que de se tenir entre les bornes, ne meritent ils pas d'estre chastiez au double?”; ibid., 529: “... Ie say que de savoir le cours des astres, leur vertu et ce qui est de semblable, non seulement apporte grande utilit? aux hommes, mais incite ? magnifier Dieu en ceste sagesse admirable qui se monstre l?. Car combien que les plus ignorantz et idiotz ne puissent lever les yeux au ciel sans avoir ample matiere de glorifier Dieu, toutesfois ceux qui ont estudi? pour comprendre les secretz de nature, qui ne sont point cogneuz de tous, doyvent estre beaucoup plus incitez ? en faire leur devoir.” 
89) Ibid., 517. 
90) Ibid., 520. 
91) Ibid., 530. 
92) Ibid., 540. 
93) Ibid., 540: "car quiconque, en premier lieu, s'adonnera ? craindre Dieu, et estudiera ? savoir quelle est sa volont?, s'exer?ant sur tout ? la practique de ce que l'Escriture nous ensegne: puis secondement appliquera son esprit ? ce qui est de sa vocation, ou pour le moins ? choses bonnes en utiles. ........... Surquoy ie 요 brievement, que nulle bonne science n'est repugnante ? la crainte de Dieu ny ? la doctrine qu'il nous donne pour nous mener en la vie eternelle, ...." 
94) I. Calvinus,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Institutio 1536), Basilae 1536, I, 100-101. 
95) Ibid., I, 99[원판에는 107로 페이지 오기됨]. 
96) Ibid., I, 97. 
97) Ibid., I, 100: "Sic&nihil erit incommodi, si vitae sanctitatem existimemus esse viam, non quidem quae ducat, sed qua electi a Deo suo in gloriam regni coelestis ducantur". 
98) Ibid., I, 95. 
99) Ibid., I, 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