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구원론

존 페스코가 말하는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1부)

 

 

역자: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존 오웬이 활동하던 청교도 시대에 청교도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이들은 주로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그리고 소시니안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역활을 강화시켰다는데 있었다.

 

로마 카톨릭은 최종적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알미니안도 마찬가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시니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기까지 이른다.

 

이들의 사고는 분명히 청교도들과는 대립되는 사상들이었지만, 청교도 내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청교도에 속하여있다고하면서도 행위 언약을 배제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기도하였다.

 

존 오웬의 많은 저술들은 대부분 이들과의 논쟁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는 시도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는 가장 대표적인 이들로는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는 존 오웬이 살아가던 청교도 시대에 개혁주의 신학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지만, 오늘날의 새관점주의자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존 페스코가 말하는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를 번역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그리고 전가 교리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한 현대신학에 적용해봄으로서 새관점에서는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새관점의 문제의 기저에는 인간 중심적인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뿌리가 자리잡고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종교개혁 이후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서 나타난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배제한 신론 중심의 신학을 도출해낸다.

 

종교 개혁 이후의 개혁파 신학과 영국을 중심으로한 청교도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믿음을 통한 칭의가 신학의 주요 주제였다.

 

그러나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모든 신학적 주제는 인간의 이성에 검증을 받아야만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은 퇴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신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특징을 나타내게 되며, 계시 중심의 위로 부터의 신학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칼빈주의나 개혁파 정통주의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라는 결과물을 낳게된다.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는 슐라이허마허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전통적 신학을 보호하고자 시작된 신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신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학의 이와같은 유형적 변화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에서 신론 중심의 신학으로 형태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독론을 배제한 인본주의 신학은 신론 중심의 칭의론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라는 주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주제가 되어버린다. 

 

존 페스코가 말하는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를 번역하기에 앞서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중심으로한 현대 신학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라는 주제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고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한다.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

 

최근에 들어와서 이슈가 되고있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하 새관점으로 약칭)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유대 문서들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성경을 재해석함으로서 나타난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의 한 가지 유형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문서들은 당시 에센파를 중심으로한 쿰란 공동체라는 지역적 제한성으로 인해서 이를 근거로 성경을 재해석하기에는 보편성이 결여되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경에서 제외된 외경들을 비롯하여 도마복음이나 Q문서들을 포함한 해석은 정경을 중심으로한 성경해석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해 1세기 유대주의 문서들을 분석해본 새관점주의자들은,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지켜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지켜진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된다.

 

즉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유대인들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기(get in)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언약적 신율주의는 이제껏 정통개혁주의에서 주장한 율법주의적 관점에 수정을 요구하고있다.

 

언약적 신율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참여하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개념이 자리를 잡을 곳을 없애버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통로이지만, 언약적 신율주의에서는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되었으며, 최종적 구원은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인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을 따르는 행위로 구현되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은 자리잡을 곳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은혜 안에 들어와있는 이들에게 은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라고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옳다면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뜻이 된다.



현대신학과 칭의

 

칭의는 신자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구원에 참여된 신자의 표징이기에, 칭의는 성경에서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정통개혁주의가 기독론 위에 칭의론을 정립하고있다면, 새관점을 비롯한 현대신학은 신론 위에 칭의론을 정립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새관점은 칭의에 대하여 정통개혁주의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대한 반박으로 저술한 "칭의 논쟁(The Future of Justificaion)"에서는 새관점이 제시한 칭의에 대한 개념이 정통개혁주의에서의 칭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지 잘 말해주고있다. 

 

칭의는 종교개혁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였기에, 루터는 칭의가 교회가 서고 넘어짐의 대들보(articlus standis et cadentis ecclesiae)라는 표현을 한다.

 

칭의는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 간에 맺어진 약속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의 공생애가 궁극적으로는 성도의 칭의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보고있기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옷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신론 중심의 칭의를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이 완성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삶의 본을 보여준 따름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전가교리와 칭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신자의 의가 되는 것은 전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죄의 자리에 있는 것과 의의 자리에 있는 것도 모두 전가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의 근거가되는 아담의 죄의 전가뿐만이 아니라, 칭의를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있다.

 

전가는 속죄와 칭의에 필수적인 개념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인 것은 아담의 죄를 전가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행함 이전에 아담의 죄를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바로 세례를 받아야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갓 태어난 아이라고하더라도 악행을 하기 이전에 이미 죄인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냐, 아니면 악행을 하였기에 죄인으로 규정되느냐의 차이는, 정통 개혁주의와 인본주의 신학의 중요한 차이점이 되기도한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행함에서 찾으려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신약에 제시된 또 하나의 행함의 기준으로 보고서 이를 행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려고한다.

 

인간의 행함을 죄인됨의 근거로 보기에 완전한 행함을 통해서 의를 성취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규정된 죄인은 구원을 이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한 형벌을 치루어야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또한 형벌을 치루었다고 의인으로 규정될 수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형벌 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행하여야만 한다.

 

존재론적으로 죄인으로 규정된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존재 안에 심겨진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는 것만이 아니라, 순종의 의를 전가해줄 둘째 아담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요구 조건, 즉 범죄로 인한 형벌과 완전한 순종이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전가 방식으로 죽은 인간은 전가 방식으로 생명을 얻어야한다.

 

신자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 죄가 없는 이에게 신자의 죄를 전가시켜서 대신 형벌을 치르고,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얻은 의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의 죄를 전가받아 신자가 치루어야할 형벌을 대신 치룸으로서 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과정으로서의 사역이다.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기에,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줄 이가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께 죄의 형벌이라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형벌로 값을 주고 성도를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의 의를 전가시키심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을 이루시는 연합을 완성시키신다.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신자는 더 이상 존재론적으로 죄인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가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믿음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것에 대한 고백일 뿐이며, 믿음의 고백이 구원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의 고백은 이미 창세 전에 택함받은 자에게 예정하셨던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적 과정이다.

 

믿음의 고백에 의한 칭의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경적 방식이며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하지만 많은 현대신학자들은 전가교리를 최소화시키거나 제거해버리고 이를 대신하는 다른 방식의 구원을 제시하고있다.

 

그리스도의 의를 충분히 전가받지 못한다면 그 부족한 부분은 인간의 행위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페더럴 비전에서는 전가교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를 제외시킨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만을 인정한다.

 

많은 점에서 페더럴 비전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은 전가 교리 자체를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달리 규정해버린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죄와 의에 대해서도 개혁주의와 달리 규정하며 그리스도의 사역도 달리 해석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 사역이 아니라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함의 본을 보여준 삶의 행동 방식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신자에게 전가해줄 의가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여 희생된 혁명정신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표식에 불과하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죄는 아담의 죄와 관련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아담의 죄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보기에, 인간의 죄악을 아담의 죄가 전가된 결과물로 보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필요성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전가가 상실된 자리에는 그만큼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며,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에게는 이러한 행위를 충족시킬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선행을 더하여 구원을 완성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의 행함으로 변형시킨다.

 

새관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이야기하는 은혜는 최종적 구원이라는 과제가 남겨진 미완성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과정일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행함은 최종적 구원을 완성시키는 수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에 충족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다.

 

과연 인간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이미 아담에게 제시되었으며, 율법을 통하여 재연된 행위언약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미 충족되었다.

 

구원을 위해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전가

 

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과는 달리 패더럴비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 즉 수동적 순종의 의만을 인정하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능동적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부정하는 이들은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이 없는 완악한 이들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넘어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희생적 사랑의 표현이었다.

 

처음 아담의 행위 언약에는 사랑이 담겨있지가 않다.

 

모세 율법에서 재연된 행위 언약도 마찬가지로 사랑이 담겨있지 않다.

 

희생적 사랑은 행위 언약을 넘어서는 완전한 언약의 성취였다.

 

인간에게 제시된 행위 언약은 사랑을 전제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행위 언약은 사랑이 더해진 완전한 언약으로서의 새언약이다.

 

새언약에는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담겨있기에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은 새언약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최소한도의 행위 언약을 넘어서 희생적 사랑을 통하여 창세 전 구원 협약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아담 언약과 율법에 담겨있는 행위 언약의 맥락에서 순종의 부분적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아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전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전제가 있어야한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페더럴 비전은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들이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에 담겨있는 행위 언약의 속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메리데스 클라인은 율법의 속성을 표면적 속성과 본질적 속성으로 이원화 시킨다.

 

클라인은 율법이 표면적으로는 아담 언약의 재연, 즉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법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과 행위 언약 논쟁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율법의 마침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충족이며, 율법의 요구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율법의 요구가 행위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저주에 대한 요구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셔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이다.

 

순종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제외된 율법에서는 공로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로 성취된 의 또한 존재하지 않기에, 전가될 의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아담 언약과 칭의

 

아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성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어떤 신학자는 아담 언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는가에 대한 논쟁 못지 않게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인가에 대한 논쟁도 종종 격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시기에, 처음 아담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 규정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에 모세 율법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에 대한 속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짧은 지면에서 행위 언약에 대한 논쟁을 다룰 수는 없지만, 결론부터 말하지만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어야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규정할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루신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처음 아담으로부터 전가받은 실패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음을 적극 부정하고있으며, 존 머레이 또한 아담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보고있다.

 

행위 언약에 대한 부정은 칼 바르트의 구원론이 만인 구원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존 머레이도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였던 노먼 쉐퍼드가 아담의 행위 언약을 부정함으로서, 그의 제자들이 이단성을 가진 패더럴 비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아담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어야지만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죄인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이 율법의 행위 언약에 대한 순종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언약 사상에 있어서 행위 언약 개념이 제거된다면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속성과 믿음의 내용과 전가의 내용, 그리고 칭의와 구원론에 대한 모든 내용이 행위 언약을 인정하는 신학과 달리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타락한 인간과 함께 하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타락한 인간을 더 이상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의인으로 규정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는 신비로운 방법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는 신자의 맏형이 되신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칭의된 자의 정체성을 발해주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나 하나님의 자녀의 개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있다.

 

인본주의자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들만의 해석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나라이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언약적 신율주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들은 최종적 구원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상태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의 보증자되시고 중보자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열매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 죽었는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생명을 얻게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죄인이 죽은 자임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육신으로는 살아있으나 실상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다.

 

이는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은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조건이 상실된 곳,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으로 쫓겨난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한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은 어느 정도 살 수 있었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로 살아갔던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일정 기간 살 수 있었던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바로 죽지 않고 살려두신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만, 아담이 범죄 후에도 일정기간 살아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육신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아담이 불순종하는 날 바로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실상 아담은 범죄하고서 바로 죽은 존재가 되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음과 심판 사이의 삶이었다.

 

모든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심판의 삶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담의 후손은 육신의 생명만 있을 뿐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이 된 죽은 존재일 뿐이지만, 참 생명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갈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신 것은 죽은 존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기록하고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에베소 사람들은 행함으로 범죄하기 이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존재였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죽어있던 존재라는 것이다.

 

에베소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들이지만 이는 오직 육적인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관점은 일반 상식적인 관점과는 다른 관점임을 보여준다.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실상은 죽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존하는 육신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이 없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참 생명되신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본능을 따라갈 뿐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길로 궤도를 수정할 능력이 없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외면하고 인간을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보고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실제의 바울과 다른 바울을 그려내고있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것을 전제로 하며 이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음을 말해주고있지만, 톰 라이트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바울의 선언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안식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이 성취 되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듯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었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어 스스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을 상실한 인간에게 칭의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삶에 있어서의 행동 방식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주제는 새관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된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재규정함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예수는 더 이상 성도와 연합을 이루시는 분도 아니시며, 성도에게 칭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존 오웬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서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개념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창세 전 구속 언약 가운데 중재자이시면서 보증자로 세워진 분이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는 전가 개념이 적용될 수가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도 아니며, 완전한 순종을 통한 행하심으로 얻은 의를 신자에게 전하여주시는 분도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불순종과 관계가 없기에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에게는 속죄 사역이 필요하지가 않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의 문제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며,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 택함받아 은혜 안에 거하였던 이스라엘이 율법을 선교의 수단이 아닌 이방 민족과 구별하는 배타적 수단으로 사용한 범죄로 규정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죄이기에 인류의 근원적 죄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인류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으신 분이다.

 

단지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실 뿐이며, 최종적 구원을 위한 몫은 인간의 행함에 있을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단지 예수의 행하심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표시일 뿐이기에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공로를 요구한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처음 아담과 관계된 둘째 아담도 아니시며, 처음 아담이 실패한 행위 언약을 충족시키신 분도 아니다.

 

대표적인 새관점주의자인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와 칭의에 대한 해석은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해 재구성된 것이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에게서는 삼위 하나님의 신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죄인에 대한 중보나 보증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죄인이 성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이신 중보자 그리스도는 택함받은 자의 죄를 없애주시고 이들과 연합하심으로 의의 옷을 입혀주신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전가와 연합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존 페스코는 톰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주장이 리처드 백스터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와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리처드 백스터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배제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배제된다면 부족한 의는 인간의 몫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진다고하더라도 이미 육신의 죄 안에 갖힌 죽은 존재이기에 죄를 깨달을 뿐이다.

 

신자의 칭의는 오직 전가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근거가 될 수 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행함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증명해주셨다는 개념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의 혁명적 행동으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받으셨음을 믿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대로 행동하면서, 이러한 행동 방식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행함의 의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순종과 전가교리와 칭의 개념을 변형시킨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만약에 칭의에 관한 논술이 상실된다면, 기독교 교리 전체가 상실될 것이다"라고 말한 마틴 루터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연합과 삶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본을 보여주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행함의 문제이기 이전에 믿음의 문제이다.

 

잘못된 내용의 믿음을 소유하고있기에 잘못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을 비롯하여 개혁을 외치는 많은 이들이 믿음의 문제를 외면하고 행함을 강조함으로서, 행함의 문제를 윤리적으로만 접근하려고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참된 신자라면 행함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행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적 접근보다는 근원적 접근이 필요하다

 

현상적 접근은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같은 접근 방식이다.

 

힘을 빼면 원위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함의 문제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부터 접근해야한다.



출처: https://byfaithalone.tistory.com/entry/존-페스코가-말하는-존-오웬의-그리스도와의-연합과-칭의1부-1 [byfaith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