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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노승수 목사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비유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알곡 가운데 밤새 악한 자들이 가라지를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종들은 주인에게 묻는다. "악한 것을 뽑을까요?" 그 때 주인의 대답은 의외이다. "내버려 두어라 알곡이 상할까 염려하노라" 이다. 주인이 가라지를 내버려 두는 까닭은 알곡이 상할까 염려함에 의해서이다. 우리 일상에는 '악한 자'가 뿌려놓은 가라지를 우리 삶의 여려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가라지는 신자 밖의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그 어떤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겨두시는 주님의 뜻과 그 유익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 곧잘 그것을 피해버린다. 교회에서 갈등을 만날 때 너무나 쉽게 교회를 옮기고, 누군가와 갈등을 경험할 때 너무나 쉽게 그들을 외면한다. 우리는 종들의 태도처럼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가라지들을 뽑아버리기를 원한다. 
바울 역시도 자신의 육체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인해서 세번이나 주께 간구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들었던 응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니가 약함으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자기를 부인할 때 이루어진다. 한 알의 밀이 썩어지지 않고는 결실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의 진정한 결실은 우리를 썩어지게 하는 가라지 같은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결을 이유로 그러한 사람 혹은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구별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교회사에서도 이런 일은 두드러졌다. 보수신학자였던 메이첸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교단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미국 교회내 자유주의 진영이 그렇게 까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회의 교파는 200개를 넘어섰다. 저마다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과 순결을 이유로 분립을 거듭한 결과였다. 그 결과 교회는 자정 능력을 잃어버렸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교회의 치리의 기능은 무력화 되어 버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갈등을 주시는 것은 분리의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내안에 무엇인가 연단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신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해보라, 우리 가정 생활이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뉘어야 한다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갈등들은 결국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신자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대해 온전하게 믿어야 한다.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졌는가? 일어서려면 나를 넘어지게 한 땅을 딛어야 일어설 수 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외면하거나 그로부터 분리되려 한다면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어려울 때마다 피하고 힘들 때마다 옮겨다닌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들을 보라,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적응하며 세월을 견디며 성장해 간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나 쉽게 옮겨 다닌다. 서울 경기에만 떠돌이 교인이 200만명 가까이 된다는 소문도 있다. 예전에는 교회을 옮길 때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출석이 힘들거나 한 경우에 한해서 그것도 교회가 '이명증서'를 써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경건한 공동체의 상실이 성도와 교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교회는 아무쪼록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서로 나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한다. 갈등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떠도는 신앙은 말씀의 은혜를 누리기 불가능하다. 공동체를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화 되는 까닭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보다 교회 안에서 은닉성과 익명성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결과이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교회의 멤버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서로 교통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도덕성이 저하되는 까닭은 도시가 가지는 은밀성과 은닉성의 산물이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성도들은 교회 역시 사생활의 노출을 꺼리는 대형교회를 선호하게 된다. 
성도란 표현도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킬 때 이 거룩함을 한 번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였을 때 거룩해짐을 성도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 역시,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것은 우리가 한 지 교회에 한 몸으로 묶여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분리되어져 나가고 너무나 쉽게 떨어져 나가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이니 교회 개척은 당연한 원리이다. 개척이 무엇인가? 씨를 심는 일이다. 다 자란 나무가 종을 퍼뜨리를 때를 생각해보라 어떻게 일어나는가? 씨를 통해서 전파된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교회 개척이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분리하는 일을 개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지난 주에 런던을 다녀왔다. 그곳 교회는 한 때, 500명에 넘는 성도가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교회 부교역자로 있던 목사와 장로님이 뜻이 맞아 교회의 분립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200명 남짓 모인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분립해 나간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갔던 장로님은 다른 교회로 다시 가고, 그 의도가 선하지 못하니 그 결과도 선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런 행위는 교회를 해치는 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민 사회에는 어느 지역에 목사 수만큼 교회가 생긴다고 한다. 목회자는 목양의 책임을 위임받은 종이니 응당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이런 일이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목회자이기에 이런 유혹을 너무나 잘 안다. 어느 목사가 담임목사의 꿈이 없겠는가? 내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 일산에서 사역할 때의 일이다. 교인들의 담임목사님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 중에 몇몇 교인들이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그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목회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온당한 행위라고 내 신앙 양심이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요즘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민주당 출신의 모 전직 국회의원이 당내 공천이 안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민주당 대변인이 그것을 일컬어 "해당행위"라고 했다. 당에 해를 끼치는 행위, 당을 나누는 행위라는 것이다. 세상 정치에도 정도가 있어서 당헌 당규에 따라 적법절차를 따라 자신의 신조와 정치철학을 지켜나간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이 너무나 쉽게 이런 "해당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역지사지라고 했다. 물론 마음에 안들 수 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 것이다. 앞으로도 쭉~~~ 그게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알곡 가운데 가라지가 뿌려진 것으로 비유하셨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갈등은 여전할 것이다. 마음에 안든다고 갈라선다고 그런다고 그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떠나기는 쉽다.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본적 있는가? 지난 주간 그리고 이 주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다. 각자 자기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할 일이나 분별이 있기를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