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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투사를 멈출 때

투사를 멈출 때 


노승수 목사


투사(projection)가 없다면 그는 소위 세상에서 빛을 남긴 위대한 사람들의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투사를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투사가 줄어든다. 
투사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판단이 많으면 그것은 투사가 많다는 뜻이다. 경직되어 있다면 그것도 투사를 많이 사용한다는 의미이고, 대인민감성이 높고 반대로 자존감은 낮다면 그것도 투사의 징조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한다만 있다. 내 감정이나 내 느낌이 어떤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상대가 어떤지만 주목하고 있다면, 100% 투사 중임을 확신해도 된다. 
마태복음 7장에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투사의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다. 
투사가 많으면 상대방의 마음이 읽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해버린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만 이렇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에게 자기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다"고 말한 것은 일면적 진리의 측면이 있다. 종교는 병리적 퇴행의 기제이기도 하다. 
종교가 아니라 참된 복음은 우리 삶에 이 투사가 그치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막힌 담을 헐고, 자연 만물과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신약성경은 증거한다. 
일찍이 칼 구스타프 융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 라고 말한 것처럼 복음은 우리 모든 어려움과 죄문제의 원천이 자신임을 깊이 자각하는 데에 있다. 투사는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함으로 근본적으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안에서 생긴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서 그로 하여금 책임지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성장, 인격 성장은, 그러므로, 투사를 줄이는 것이다.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입술로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않는 것이다. 비판이 일어날 때 마다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판단중지(epoche)하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도 유보하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복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얼마나 유치한지를, 치사한지를 깨닫는 것이기에 그렇고, 내가 정말 불쌍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기에 그렇고, 내 영혼이 집나간 탕자처럼 거지가 되어서 빌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투사를 멈추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이 고통은 십자가 보혈의 씻음이 없이는 고통을 그 자체로 수용할 만한 인격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래도 투사를 멈출 때, 참 사랑을 알게되고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 우리보다 무한히 크신 무한자를 유한자인 인간이 부분적이나마 경험하게 되는 신비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