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회심
노승수 목사
믿음은 그 속성상 심기워지는 것 맞습니다. 근데 씨가 심기웠을 때, 곧 중생 그자체를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지요 거기엔 가시밭도 돌짝밭도 있고 이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생자에게 나타나는 영적싸움도 이들에게 있지요. 일락과 재리와 기타 욕심이 기운을 막는 현상은 당사자에게서 영적싸움으로 비췰 수 있습니다.
믿음이 심기우고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로는 중생을 말하기어렵지 않겠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게다가 단회적이다는 것과 연속적이다는 것은 서로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단회라도 연속적 과정이 있을 수 있고 공정을 어디까지 개념적으로 정하여 구분하느냐에 따라 단회라는 말도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동차 엔진이 ...<흡기 - 압축 - 폭발 - 팽창 - 배기>라는 한 공정을 단회라고 하기도 하죠 그러나 이 단회에는 여러 연속적 과정을 포함하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연속적 중생이 단회적이라 말할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개념적 정돈이 있어야 겠지요 그리고 본문을 읽을 때 이런 개념이해가 해석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저 심긴 것을 개념적으로 혹은 원리나 원론적으로 중생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경험적으로 이해하긴 힘들겠지요. 오히려 우리의 경험적 이해속에서는 중생을 연속적 과정으로보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더 유익하리라 봅니다.
중생을 경험적으로 분류해내는 것은 결국 말씀을 들음에 대한 변별로부터 시작하리라고 봅니다. 로마서가 증거하는데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지요. 이 때 좁은 의미의 중생 곧 유효적 소명 혹은 초기 중생이 일어날텐데, 이 시기만해도 사실상 구분이 힘듭니다.
심지어 율법이 복음으로 인도하는 기능 즉, 몽학선생의 역할을 해서 정죄를 하게 되는데, 중생자 곧 알곡과 가라지 역시 이 시기에서조차 구분이 힘듭니다. 농촌에서 벼와 피가 초기에 구별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겠지요. 무슨 말이냐면, 율법의 정죄를 받으면 일반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도 회개를 하게 됩니다. 율법이 자신을 정죄하니 자기 연민과 자신에 잘못된 행동과 감정들에 대한 죄책감이 불러 일으켜지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은혜라 흔히 말하는 경험도 합니다. 흔히 카타르시스라고 하죠. 회개기도를 장시간 하면 일종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죄의식이 가벼워지는 경험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유사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이 회개하고 믿는자 곧 중생자로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하는 회개의 내용을 보면 금세 구분이 되리라 봅니다. 예컨대, 간음이나 살인 혹은 도적질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반면, 4계명에 대해선 이렇다할 감흥이 없다면 우리의 회개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다른 실례를 들자면, 한국 사회는 성적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 한국 남성의 외도는 세계 5위 안에 들기도 하더군요. 오히려 더 개방적이고 그래서 문란할 것 같은 미국 사회는 오히려 성적 죄에 대해 실수로 관대하게 용서해주기도 합니다. 도리어 부정직과 거짓은 이혼이나 정치적 매장의 이유가 되는데 오히려 우리 문화는 이에 대해 관대하죠. 이런 문화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과 자의식에 근거한 회개와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중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단회적 중생 출발점인 믿음 곧 심기워진 습관(Infusa habitus)은 그 열매로 그 성질을 알게 됩니다.
참된 회개는 율법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준에 의한 자기 내적인 혹은 자기 연민적인 정죄가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받는 정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너무나 자명한데, 우리의 회개는 참 이상한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회개가 진정이라면, 그것은 단회적일수 없고 율법이 우리에게 지적할 때마다. 자신의 정죄받음의 근간이 율법에 있음으로 율법으로부터 당하는 심리적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유사은혜들은 어떤 경험들 즉, 자신의 심리적 이유 때문에 만나는 경험들로부터 신앙이 출발합니다. 영화 밀양의 신애가 아이가 유괴 살해 된 이후로 겪는 심적 고통과 통곡 그리고 그때 때마침 경험한 안수와 여러 종교적 경험들이 그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지만 그의 신앙은 가짜였습니다. 그것이 가짜임을 자신의 거울과 같은 유괴범을 만나는 장면에서 드러나고 맙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것을 마치 신애가 거울을 보는 마지막 장면처럼 앵글을 연출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거울을 보던 신애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의 앵글을 시궁창으로 가는 것처럼 용서의 환희를 말하는 유괴범의 신앙적 경험은 가짜신앙임을 비추는 신애의 거울이었습니다.
아무튼 회개란 그런 점에서 율법의 정죄를 받고 절망하며 율법이 증거하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애씀을 포함하리라고 봅니다. 동시에 자신의 현재의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고 갖게 되는 슬픔으로 인해 영광에 이르기를 열망하는 애씀으로 드러나리라 봅니다. 영광에 관한 이해는 따로 설명하긴 너무 길기에 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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