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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지젝을 통해서 보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

지젝은 유물론이 붕괴된 이후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신이 죽은 사회로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와 대의명분을 부정하면서 개인이 일상에서 삶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다. 오늘날 소확행이나 워라벨과 같은 신조어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지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돈과 거기에 함몰된 쾌락의 추구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버리고 생존에 급급한 가치 추구가 도달한 지점은 그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우리 주님께서도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서 구하는 이방인의 구하는 바라고 하셨다. 참 신자는 하나님 나라과 그것의 도래를 위해서 구해야 하지만 현대 기독교는 이 가치를 상실했다. 동시에 쾌락을 원하지만 죄의식없이 즐기기를 원하므로 도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지젝은 “지배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섹스를 즐길 것, 죄의식을 느끼지 말 것을 명한다. 이때 우리가 죄의식의 부재에 대하여 치르는 대가는 불안이다.”라고 말한다.

 

이 불안 때문에 기만적 도덕률이 요구된다. 쾌락을 대면한 현대인들의 심리적 배경으로서 불안은 우리가 체험하는 것의 근본적 형태다. 그리고 끝없이 즐기기 위해서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목적이자 종교가 ‘현행 기독교’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지젝이 지적하는 기독교는 파행적이고 기만적이며 이단적인 형태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진리의 파행은 어느새 정상 기독교인과 그들의 삶을 깊숙히 파고 들고 있다.

 

그 방식은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를 선언함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는 방식이라든지,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이나 신애가 진정한 의미의 회개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 없이 자기 기만적인 죄의식을 사함받는 방식으로서 내적 평온을 가져다주는 방식이라든지, 2003년 12월 19일 동작대교 중간에서 자신의 아들과 딸을 한강을 내던졌던 범인 이진우가 현장검증에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기독교인인데 사람은 죽여도 괜찮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하는 방식에서 확인되는 일련의 자기 기만이다.

 

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했다.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바울이 말한 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라는 기만이 사실이 되는 기독교를 지적한 것이다. 지젝은 이런 기독교를 ‘비뚤어진(perverse) 기독교', 또는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주의가 되었든지 반율법주의가 되었든지 대단히 도덕적인 듯이 보이지만 실은 내면에 욕망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도덕이 기만적으로 작동하고 기만적 작동이 우리 쾌락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바알 신앙의 변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국의 대도시들의 수많은 교회의 네온싸인과 밤거리의 향락의 불을 밝히는 싸인의 공존하는 광경은 미묘하게 교회의 현재 상황을 유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이런 기만적 쾌락추구의 신앙에 대비되는 참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 보이는 비뚤어진 기독교 신앙이 비뚤어진 금제(禁制)를 제공하는 쾌락주의라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젝은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원용하는데 실재계는 현실 바깥이 아니라 현실 내부의 영역이지만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며 위선적인 상징 공간과 구분되는 진정한 핵심으로 ‘신성한 것’을 설명하는데 아마도 여기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젝은 라캉의 이런 실재계 개념을 통해 이것의 설명을 시도한다. 지젝이 설명하는 실재계란 대면할 수 없는 강렬한 현존, 현실이 은폐하는 가공할 그 무엇, 상징화에 저항하는 단단한 그 무엇, 격렬한 위반의 행위가 아니고는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된다.

 

그에 있어서 실재계는 객관적 현실이라기보다 현실 인식을 바로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더 가깝다. 따라서 실재계는 왜곡 현상이 여러 표상들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실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왜곡에는 우리의 수치와 고통이 남겨져 있다. 에덴에서 아담이 경험했던 수치가 거기 있다. 우리 심연의 고통이 거기에 남겨져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우리가 그리스도로 사나 죽으나 진정한 위로를 받으려면 세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우리의 비참이다. 실재계 너머에 있는 수치와 고통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와 그 신앙과 서로 상통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왜곡 자체가 진상일 수 있다. 실재계와 거기에 묻힌 수치와 고통이 진리세계일 수 있다. 어쩌면 진리의 현존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일 수 있다.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의 『죽은 신을 위하여』(원제 : 난쟁이와 꼭두각시)는 2003년 출간된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을 번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2007년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