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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로마 가톨릭과 달라진 점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신학적 위치

로마 가톨릭과 달라진 점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신학적 위치

 

16세기부터 20세기 후반, 2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대죄에 있어서 죄책(culpae)은 모두 사하지만 형벌(poena)은 영원한 것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바뀌며 소죄에 있어서는 죄책(culpae)과 형벌(poena)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이 아니며 이러한 형벌을 공덕으로 갚지 못하면 연옥으로 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대죄의 형벌이 일시적이 된다는 것은 소죄화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파는 죄책(culpae)은 어떤 형태로도 사라질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투레틴을 인용한 벌코프의 글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행위 또는 상태의 고유한 도덕적 죄상 (ill-desert)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죄악성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죄악을 범한 자들에게 영구히 부과되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거한 칭의에 의해 제거되는 것도 아니며, 단순한 사면에 의해 제거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인간의 죄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 뒤에도 생득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으로 남는다 이 같은 의미의 죄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될 수 없다."(벌코프, 464).

 

중세 후기 신학은 사실 어거스틴부터 이어지는 전통입니다. 특히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현재 우리가 속한 종교개혁의 전통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 로마 가톨릭은 여전히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요. 인간의 타락을 단지 하나님 형상의 좁은 의미인 원의의 부재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패나 전적 타락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없는 개념인 것이죠. 직접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들어보시죠.

 

원죄는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이 상실되기는 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가톨릭대사전, 자세한 서지정보는 제 책 3권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투레틴에서 보듯이 이 범책이 칭의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함의가 있냐면, 이것은 단지 짐작이 아니라 이 진술로 보건대, 바로 이 개념 곧 범책의 개념이 현재 종교개혁 전통의 오염과 부패개념으로 신학적 확장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는 종교개혁 전통의 신학적인 변곡점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공로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합니다. 첫째, 좀전에 본 것처럼 우리 본성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 둘째, 원의를 주입이라는 내재주의를 배척하고 초월로서 하늘의 영역에 둠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한 것, 셋째, 범책은 부모로부터 전달(propagation)받는 방식, 벌책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매개 없이 전가(imputation)되는 방식입니다.

 

그중에서 세 번째가 바로 언약에 기반한 것으로 벌책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 제거되며 범책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제거되지만 그냥 칭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때, 은혜가 성령으로 부어짐으로 성도의 죽음으로 그 성화가 완성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제거의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할 경우, 개혁파 신학 체계에 발생하는 결정적 하자는 바로 범책이 칭의에 의해서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제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구멍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폈지만 투레틴은 범책은 전이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이말의 함의는 그리스도께서 수동적 순종으로 우리 벌책을 담당하신 후에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런 교인을 불신 신자, 혹은 거듭나지 않는 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통 개혁파 교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은혜의 수단을 신자가 능동적으로 사용할 때만 죄의 세력과 그 제거되기 때문에 성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행위와 공로를 모두 그리스도께 돌리고 그럼에도 남은 범책과 부패는 신자가 성실하게 은혜의 수단을 교회로부터 받아 사용함으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단언해서 말할 수 있는데 성화가 저절로 일어난다는 자는 바로 이 결함 때문에 생긴 신학적 사고며 이 사고는 은혜가 없다면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저의 세 번째 책을 기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4번째 책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신학 뽀개기"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최대한 쉽게 대중적으로 다루면서 국내외 신학자들의 동향까지 다루어 보고 그것이 미칠 열매나 결과도 예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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