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청지기로 사는 삶이 본질이다. 특히 누가의 신학에서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나 어리석은 부자 비유,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 돈 문제를 회개했던 부자 삭개오 등의 에피소드들이 이런 신학을 담고 있다. 돈을 흘러가게 하는 사람으로서 제자를 그리고 있고 이런 누가의 신학은 이 복음서가 데오빌로라는 부자 총독에게 쓰여신 서신이라는 점에서 부자를 향한 권면을 담고 있다. 이 당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본질이 자기 소유를 모두 나눠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부자청년을 향한 권면이 데오빌로를 향한 교훈의 그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서신을 현대에 적용함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재산을 다 내어놓고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술통에서 잘지언정 알렉산더가 지혜를 구하러 왔을 때, "햇빛 가리니 좀 비켜달라"했던 것처럼 지혜의 등불을 들고 권력에 굴하지 않는 것이 제자의 모습이다. 디오게네스는 시노페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철학자로 키니크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안티스테네스의 제자로 무욕(無慾)을 강조한 그의 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돈이든지 권력이든지 거기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의를 통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제자도의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살므로 거지로 사는 것이지 거지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전전하며 돈의 노예가 되어 거지로 산다. 돈에 매여 살게 되면 돈의 맛이란 비참한 거지맛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사문서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웃을 위해 탕감한 청지기를 오히려 주인은 칭찬을 한다. 물질적 관점으로는 이 비틀린 관점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다. 돈을 좋아하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이 비유를 비웃었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돈을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마라. 오히려 가난하고 돈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의 회개는 안 그렸으나 부자였던 삭개오의 회개는 묘사하고 있다.
나는 가난하니 내게는 해당이 없으리라 착각하지 마라. 원래 수도사가 음란한 일을 상상하며 창녀가 신성한 일을 사모하는 법이다. 부자라도 가난하게 살 수 있고 가난해도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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