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 10:2-3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열심의 무서움을 지적하죠.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요즘 현대적 의미의 지식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했던 답변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기노스코라는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도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구약으로 가면, 민수기 31:18 같은 곳에 "남자를 알지 못하는"이란 표현을 쓸 때, 쓴 단어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안다는 말은 단지 상대에 대한 지적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현대에서 많이 쓰는 의미보다 인격적인 경험을 담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현대에도 이런 종류의 지식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김연아 선수가 트리플 플립을 뛰는 방식을 인터넷의 검색을 통해서 금새 알 수 있지만 김연아 선수처럼 트리틀 플립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다시 바울이 한 말로 돌아가보면 올바른 지식이란 단지 지적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지칭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적 습관이 믿음인데요.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것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 마음이 인친 바 된 것”(Inst. 3. 2. 7.)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에서도 알 수 있지만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냥 정보 형태의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형태의 지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버지를 잘 모르는 백화점 넥타이 코너 점원과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여동생 중에 누가 아버지에게 더 잘 어울리는 넥타이를 고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넥타이에 대한 정보는 백화점 점원이 더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 관계와 교제는 당연히 여동생이 더 많이 가졌겠죠. 그럼 누가 더 잘 어울리는 것을 고를 것인가? 당연히 여동생입니다. -- 물론 여동생의 패션 센스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논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건 단지 예일 뿐이니 단지 걸지 마시고요. -- 같은 방식으로 신학은 신학자가 더 많이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실제로 교제하는 성도가 더 많을 수도 있는 것이죠.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모든 신자를 신학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을 순례자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첫째진리(primum verum)이기에, 신학은 사변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최고선(summum Bonum)이기에, 신학은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지성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바른 앎으로서 지성과 바른 윤리적 실천으로서 의지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 두 가지 국면을 활성화시키는 습관이 믿음이라고 개혁신학자들은 말해왔습니다.
결국 결국 이 두 가지를 겸함이 없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없는 비장함이나 열심, 실천이 없는 앵무새 신학이 우리 삶을 고사시키는 것이죠. 실천 없는 앵무새들은 사람을 다른 길로 호도하는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많고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는 신앙은 열심을 낼수록 문제만 일으키게 됩니다. 요즘 신천지 문제로 시끄럽습니다만, 이단에 빠지는 사람의 특징이 있는데요. 열심이 없는 사람은 이단에 잘 빠지지 않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다 뭔가 흔들깃발을 필요로 하는 내면의 추동이 있었던 것이죠.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인간의 모양을 한 짐승 야후와 같은 꼴인 셈입니다. 튜닝되지 않은 악기가 소음이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 뜻에 튜닝되지 않은 삶의 비장함은 결국 신앙의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의 특징이 이런 지점이죠. 자기 욕망이 하나님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은 우리 지성과 의지에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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