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했던 여자들은 대체로 날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별로 관심없어 했던 여자들 중에 날 좋아하는 여자가 많았다. 물론 전자보다 후자가 많았다(매우 주관적인 생각임 ㅋㅋ). 날 좋아해주면서 내가 좋았던 여자랑 결혼해서 살고 있다. 근데 결혼하고도 이 관계의 반복이더라 쌍방이 아닌 일방적 관계의 반복이더라. 그런 점에서 난 상호적 관계에 목마른 사람이다. 부부관계에서나 자녀들 관계에서나 사회적 관계에서도 상호적이며 주체적인 관계에 목이 마르다. 이런 갈증이 늘 있다.
우리 말에 꼰대라는 표현은 불어 콩테(Comte)란 말에서 왔다. 구한말 을사오적이 일제에 작위를 받으면서 거드름 피고 다닌 데서 콩테가 꼰대가 된 것이다. 요즘 애들 말로는 라떼라고 한다. 꼰대들의 주특기가 "나 때는 말이야"라고 현재 상황의 특수성을 모두 자기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특이한 재주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내가 말하는 상호적 관계란 상대가 지닌 상황의 독특성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관계를 말한다. 함부로 남의 고통이나 남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치환해버리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남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가지면서도 상대에게 애정을 잃지 않는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관계를 해보면 대부분이 자기 품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거나 남의 제사상에 뭘 놓기를 좋아하는 삶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뭘 도움을 주면서 참견하면 좋은 사람에 속하고 착취적 구조 속에서 상대를 자기 배경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이뤄져야 한다. 자녀라고 해서 혹은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라고 해서 노크도 없이 그의 의사결정이나 선호를 내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내게 없다. 적어도 그의 마음은 그에게 물어봐야 하고 상대의 경험이나 삶의 자산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각자의 고통의 무게는 누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욥의 고통의 기간은 대략 30년이다. 그 중 재난 상황은 며칠 만에 다 일어난다.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이 찾아와 그의 고통에 감놔라 배놔라 신학적 해석을 해댄 것이 그가 받았던 최고의 고통이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상대의 경험치를 제 경험치로 환원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그런데도 이런 행동을 수없이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나르시즘이 작용한다. 그 경험이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경험이 있다고 해도 고린도후서의 바울처럼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한 사람을 알지만 피치 못해 부득불 말하는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특별한 경험에 갇히게 되며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그 경험에 갇히고 만다. 이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웃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기로 환원되는 꼰대적 구조를 가지고서는 기독교적 사랑과 상호적 관계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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