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담이 범죄함으로 원의를 상실했다.
2. 원의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골 3:10, 엡 4:24에 나타난 참 지식, 의, 거룩이다.
3.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은혜로 의를 "주입"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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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입된 은혜로 우리가 순종을 할 때, 구원받는다.
5. 주입된 의로 순종에 실패할 때, 고해의 절차를 통해서 의를 회복해야 한다.
6. 고해의 절차란 고해-보속의 요구-신부의 사면으로 구성된다.
7. 보속의 요구에서 면죄부가 등장했으며 그 외 금식, 선행, 헌금, 등도 보속의 일부다.
8. 이 구조 때문에 의를 주입 받는 죄인이 그 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행위가 동반되게 된다.
9. 이 때문에 이를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불렀다.
10. 즉, 우리 행위가 우리 구원의 의를 불러오는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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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단 "원의의 주입"을 반대하고 "원의의 전가"를 주장합니다.
12. 주입과 전가의 차이점은 이 의가 우리 안에 우리 일부가 되는 것을 주입이라고 하고 전가는 이 의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상태입니다.
13. 이게 무슨 의미냐면 주입 이후에 해야 했던 순종이 그리스도가 하신 것으로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만 둠으로 행위 구원론 자체가 발을 들일 수 없도록 한 신학적 조치이자 해석입니다.
14. 주입의 또 다른 함의는 주입은 곧 우리 위치가 범죄전 아담의 위치로 돌아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나 어거스틴조차도 신자의 위치는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토마스 보스턴의 "인간의 사중상태"는 한 세기가 넘게 개혁파의 인간론 교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15. 그러니 그러니 순종을 요구받은 것이죠 거기에 실패하면 주입된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 보속을 요구 받은 것이구요. 이렇게 행위 구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가"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16. 당연히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에는 십자가를 통해서 "사망의 형벌"만 대신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동안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실패했던 모든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17. 그것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했고 웨신은 온전하신 순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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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먼저, 패더럴 비전과 같은 신율주의 계열에서 능동적 순종을 공격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가 다 하셨다고 하니 우리 윤리가 약화되는 것으로 전가 교리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능동 순종을 빼고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19. 둘째, 반율주의 계열에서 능동적 순종을 공격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가 다 하시긴 했는데 은혜로 구원이 완성된 후 신자는 열매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는 경험을 하는데 이게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런 탓에 이쪽 계통의 사람들을 보면 윤리 의식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20. 그래서 싱클레어 퍼거슨 박사는 신율과 반율을 이란성 쌍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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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율법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의 원리입니다.
22. 신자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낍니다.
23. 그래서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이 성전은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키며 두 가지 국면을 갖습니다.
24. 첫째, 성소의 국면은 은혜를 위한 일반적인 방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말씀, 성례, 기도가 그것입니다.
25. 둘째, 지성소의 국면에서는 시은소 곧 언약궤의 뚜껑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단번에 뿌려짐으로 우리 구원의 공로가 모두 여기서 흘러나옵니다. 물론 이 공로는 십자가의 사망의 형벌을 이길 뿐 아니라 율법의 모든 요구도 다 해결한 공로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설명합니다(롬 3:25).
26. 우리가 성소에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면 지성소, 곧 하늘에서 은혜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베풀어집니다.
27. 이 때,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28. 우리가 믿음으로 이 능력을 받습니다. 이것을 웨신 대요리 문답 77문 같은 데서 "은혜의 주입"이라는 교리로 해석합니다.
29. 즉, 칭의에서는 주입의 교리를 배격했지만 성화에서는 주입의 교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30. 이 사실은 반율주의자들의 성격해석이 역사적인 장로교회 해석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1. 그렇게 주입된 은혜로 우리는 성화를 결실하는 구조가 복음의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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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신율주의자들과 반율주의자들은 공히 능동적 순종과 행위언약 교리를 공격합니다.
33. 이것은 이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4. 북미 개혁교회에서는 신율주의인 패더럴 비전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35. 이 사실은 그 반대 쌍둥이인 반율주의도 이단적 사상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36. 그런 종류의 책이 버젓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로 출간되다니 참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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