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은혜의 전달 방식

라틴어 ‘쿰 베르보’(cum verbo)에서 쿰은 우리 말로 ‘함께’, ‘더불어’(with)라는 뜻이고, ‘페르 베르붐’(per verbum)에서 페르는  ‘통하여’(through), 또는 ‘의하여’(by)라는 뜻이다. 베르보와 베르붐은 말씀을 뜻하며 이 전치사가 격을 지배하기 때문에 변형이 생겨 뒤가 달라진 것이지 같은 의미이다.  

이 개념들은 성령께서  말씀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루터파와 칼뱅파의 온도차를 보여준다.


개혁파에서 은혜가 전달되는 방식을 cum verbo, 곧 "말씀과 함께"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의미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심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루터파는 결이 좀 다른데 per verbum, 곧 "말씀을 통해서"라는 의미로 역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한다는 의미다.

이 이중성을 이해를 못하니 자꾸 율법의 2용도를 오해하거나 불신자에게는 율법이 효용이 없다거나 하는 단절적 사고를 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도 양심이 그 기능을 한다고 했다. 이를 추론하면 율법이 주어지면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에게도 기능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WCF 19. 5. 율법 편에서 잘 설명했다.

"도덕법은 성도들뿐 아니라 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순종을 요구하는 구속력을 가진다(롬 13:8-10; 엡 6:2; 요일 2:3,4,7,8). 그것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에 때문만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때문이다(약 2:10,11).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덕법을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폐기하지 않고 도리어 강화시키신다(마 5:17-19; 롬 3:31; 약 2:8)."

초등교사란 말 그대로 복음을 위한 기초 교육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앞까지 율법 자체가 효력이 있어서 인도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들을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 자기 비참을 깨달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구원이라 하지 않는다. 착각하면 안 되는데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 돌밭이나 가시밭도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순간적이라는 말은 이 일의 역사와 효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지 이 일이 사람에게서 기계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근대 기계론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은 다소 어렵게 여겨질 수도 있고 분절적 사고가 이해의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Cum verbo는 WCF 10. 1. 효과적 부르심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만을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정하신 적당한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신다(롬 8:30, 11:7; 엡 1:10,11). 이는 그의 #말씀과_성령을_통한_것으로서(살후 2:13; 고후 3:3,6) 그들이 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건져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딤후 1:9,10; 롬 8:2; 엡 2:1-5)."

해시태그가 붙은 부분이 바로 cum verbo이다. 이 표현 자채가 준비를 함의한다. 즉, 말씀만 작동하다가 어느 시점에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 이 말씀이 그를 효력있게 부르시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생은 회심이라는 현상에 의해서 후에 확인될 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그 시기나 순간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준비와 거듭남 회심은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그 모호한 경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Cum verbo 때문에 영아 사망자, 금치산자, 정신지체자, 그라고 복음이 전햐지지 않은 지역에서의 구원, 혹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이방인의 구원까지 주권적 하나님의 선택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리타스와 큐피디타스  (0) 2024.06.24
히브리스  (0) 2024.06.23
경제 전망  (2) 2024.05.12
섭리에 대한 신앙  (0) 2024.05.12
바가바드 기타와 기독교 신앙  (0) 202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