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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칼빈과 칼빈주의: R.A. Muller 교수의 견해에 대한 비판

칼빈과 칼빈주의: R.A. Muller 교수의 견해에 대한 비판 
황대우 교수 
1. 칼빈주의 형성의 역사적 배경 고찰 
칼빈 Calvin과 칼빈주의 Calvinism 사이의 관계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관점을 통해 평가된다. 이러한 연속성과 불연속성 논쟁의 핵심은 대부분 예정론과 결부되어 있다.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 Reformed Church의 발생기원은 칼빈과 베스트팔 Westphal과의 성찬론 논쟁, 스트라쓰부르크 Stra burg (=Strasbourg)에서 잔키우스 Zanchius (=잔키 Zanchi)와 마르바흐 Marbach 사이에 벌어진 예정론 논쟁을 비롯하여 16세기부터 시작된 루터주의 Lutheran와의 논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내의 논쟁을 통해 점차 뚜렷하게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네들란드에서의 알미니안 Arminian 논쟁과 프랑스에서의 소무르 Saumur 학파 논쟁이 대표적일 것이다. 항변파 Remonstranten라고도 불리는 알미니안은 그 이름대로 아르미니우스 Arminius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610년 1월 14일에 위텐보가이르트 Wtenbogaert의 인도아래 예정론자들에 대항하는 5개 조항의 항변서를 국가에 제출하여 총회소집을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기도했다. 그러나 이 총회는 1610년에 개최되지 못했고, 1618년 11월 13일 네덜란드 남쪽에 위치한 도르트레흐트 Dordrecht라는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1619년 5월 29일에 막을 내린 이 회의는 네들란드 총회였으나, 프랑스 외의 유럽 각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한 최초의 국제적 개혁주의 총회였다. 이 회의를 통해 5개의 항변파 항의문이 정죄되고 칼빈주의 5대 교리가 탄생되었다. 프랑스에서도 1620년 알레 Al s에서 개최된 프랑스 개신교 총회에서 베네딕 튜레티니 Benedict Turretinni와 삐에르 뒤 물랭 Pierre du Moulin (=페이트루스 몰리나이우스 Petrus Molinaeus)을 중심으로 한 예정론자들이 도르트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출신의 카메론 Cameron과 그의 제자 아미호 Amyraut(= 아미랄두스 Amiraldus)를 위시한 소무르 Saumur 신학교 중심의 소무르 학파가 정죄되었다. 따라서 도르트 회의의 5대 교리가 칼빈주의의 대표적 교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정론자들의 승리 이후에도 마코비우스 Maccovius와 푸티우스 Voetius가 아메시우스 Amesius (=에임즈 Ames)와 코케이우스 Cocceius (=코흐 Koch)의 주장에 반대했던 것처럼, 그 논쟁의 근본적인 문제가 칼빈주의 내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신학의 방법론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의 철학방법론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배제할 것 인가하는 문제가 16세기 후반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양대 흐름을 형성시킨 주요 쟁점이 되었다. 베자와 마코니우스와 푸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절 방법론을 신학방법론으로 수용하였고, 아미호와 아메시우스는 삐에르 라메이 Pierre Ram e (=페이트루스 라무스 Petrus Ramus)의 단순화 논리에 따라 그러한 철학적 방법론을 배제했다. 13세기의 Thomas에게 있어서처럼 17세기의 푸티우스에게 있어서 신학은 학문의 왕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은 신학에 봉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아메시우스는 삐에르 라메이의 가르침 즉 '신학은 선하게 살기 위한 교리 theologia doctrina bene vivendi est'라는 원리에 근거하여 신학을 학문으로 정의하기 보다는 삶의 체계로 이해했다. 그래서 아메시우스에게 있어서 신학의 기초와 방법은 신자의 삶의 경험을 통한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도입할 경우 신학을 논리의 산물로 만들 위험성을 가지는 반면, 신학을 신자의 삶의 체계로 이해하게 될 경우 신학을 경험의 산물로 만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전자는 신학을 객관화하고, 후자는 신학을 주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학의 객관화는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의 대명사라고 한다면, 신학의 주관화는 신비주의 Mysticism의 대명사일 것이다. 그런데,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스콜라주의와 신비주의는 서로 배타적이기보다는 수용적이다. 종교개혁 이후, 특별히 칼빈 이후에 형성된 이러한 개혁주의 진영에는 이와 같은 양대 흐름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동시에 상존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의 비밀은 이성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또한 신비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과 관련된 현대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와 결부되어 있다. 칼빈과 칼빈주의의 사이에 연속성에 역점을 둔 학자들은 베자를 포함한 칼빈주의가 칼빈의 핵심적인 사상을 후대에 잘 전수한 것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불연속성에 강조점을 둘 경우에는 칼빈주의가 칼빈의 핵심적 사상들은 오도했다고 결론내린다. 이 둘 사이의 장벽은 높다. 
2. '스콜라주의'에 대한 멀러 교수의 정의 
'스콜라스틱'이라고 할 때 그 단어가 풍기는 대표적인 인상은 '딱딱함' 즉 '신학의 사변적 화석화'일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스콜라스틱' 이란 단어를 사용해 왔다. '스콜라스틱'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에 반기를 들고 나온 이론이 멀러 교수의 '학교에서의 교육방법으로서의 스콜라스틱 이해'이다. 그는 이것을 'school-theology' 'school-method'로 부른다: '"스콜라주의"는 단순히, 전문학교들과 대학들의 교실에서의 경험에서 발전된 체계들과 교리적 개론들의 형식 신학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스콜라주의는 성경과 이전의 정의 (전통), 그리고 동시대의 논의의 표현으로 교리적 loci (자리들)을 분석함으로써 정의의 정확성을 성취해내는 신학적 체계에 대한 일종의 방법론적 접근이다.' 
멀러 교수는 17세기의 스콜라주의를 중세의 스콜라적 가르침과 방법의 복제품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스콜라주의는 신학에 대한 기술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12세기 말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신학 제도의 교육적 특성으로 보여준다. 스콜라주의는 일차적으로 학문적 훈련에 대한 하나의 방법 혹은 접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수적으로 어떤 특별한 철학적 관점과 결부되는 것도, 또한 그것이 어떤 특별한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진 혹은 신학체계의 한 열쇠로서의 개념에 부착된 체계적 장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멀러 교수에게 있어서 스콜라주의는 신학의 철학화 현상을 의미하는 부정적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스콜라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방법론의 신학에의 도입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학문의 도구로써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수용되어야 하는 신학교육방법론이다. 왜냐하면,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는 개신교 교리의 교육화 institutionalization라는 과정의 기술적이고 학문적인 측면을 잘 묘사하기' 때문이다. 즉 '스콜라주의란 어떤 특별한 신학이나 철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증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중세 학교들에서 발전된 방법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멀러 교수는 이러한 그의 주장의 근거로써, 17세기의 신학 흐름을 특징 지우는 라무스주의 Ramism와 후기 개혁주의의 경건과 계약신학 가운데 어느 것도 스콜라주의, 즉 스콜라적 방법과 명백히 대립구도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콜라스틱에 대한 학문적이고 표준적인 정의는 멀러 교수가 지적하듯이 중세의 학교들에서의 교육 방법을 의미한다. 중세시대의 학교들은 두 가지의 교육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강의 lectio'와 '토론 disputatio' 형식이었다. '토론'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론 즉 질의응답 방식이 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들을 증명하기 위한 변증법으로 사용되었다. 스콜라주의의 시작을, 예를 들면 아벨라르 Ab lard (=아벨라르두스 Abelardus)가 그의 책 [예와 아니오 [= 긍정과 부정] Sic et non]이라는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존적인 긍정과 부정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한 사실 등을 감안하여 12세기로 잡지만,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책들이 대학 교육의 규정된 목록에 오름으로써 비로소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학에서의 두 가지 수업 방식 가운데 질의응답을 통한 토론 방식이 정규 수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질문을 제기한 후에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의 결론은 가르치는 교사가 내리는 이와 같은 교육 방식은 당시 결론 도출의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방법론이 되었다. 그래서 13-14세기 기간에 출판된 유명한 신학 도서들은 거의 대부분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방법론의 대가는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이다. 그의 주저인 [신학요론 Summa theologicae] 역시 그와 같은 질의응답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은 함께 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갑 (A)이 갑 (A)이라면 비갑 (not-A)일 수 없다는 존재증명 방법과 삼단논법에 의한 결론도출 방법 등의 논리학 logica과 변증학 dialectica)이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증명하는 원리로 사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스콜라주의는 신학의 철학화로 불리 운다. 
멀러 교수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정당한 근거에 의해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혁시대와 정통주의시대 사이에 구분의 근거로 작용하는 요소, 즉 스콜라주의를 신학의 화석화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17세기의 스콜라주의를 이러한 중세 스콜라주의의 반복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시대의 현장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역사의 흐름을 통한 발전적 개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17세기의 역사적 현장은 중세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이란 16세기의 사건을 거친 다음 시대라는 점이 강조된다. 즉 강조점은 개혁 스콜라주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보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더 깊은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에 주어진다. 그래서 멀러 교수는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과 관련하여 중세의 스콜라주의와 17세기의 스콜라주의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한 그 자신의 결론적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요약한다: 
1.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는 중세에서 16-17세기에 이르기 까지 사상사를 관통하는 연속성들과 불연속성들에 대한 연구배경과 비교되어야 한다. 
2.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마치 16세기를 통해 17세기에 도달하는 역사적 발전이 전혀 없는 것처럼, 정적인 혹은 순수하게 중세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스콜라주의에 대한 정의는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전통에 대한 학적인 연구들에 기초된 용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16-17세기 개혁신학자들의 글들에 기초된 용어의 의미를 고려해야한다. 
4. 스콜라주의와 이성주의는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5. 방법과 내용이, 비록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분될 필요는 있다. 
6. 해석적 혹은 석의적 전통에 있어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스콜라적 방법과 철학적 용법에 있어서의 발전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7.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한 개인이나 개별 작품은 전체 종교개혁 시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개별적인 정통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이나 작품들의 개혁주의 성격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어서도 안 된다. 
8. 후기 개혁신학의 다양성은 종교개혁과 후기 개혁정통주의,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경건주의와 이성주의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통념적 정의 표준을 상대화하는 시각을 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9. 19세기와 20세기의 신학적 가정들이 16세기와 17세기의 사상적 일치의 기초가 되거나 그것을 침해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그 가정들은 자주 종교개혁과 정통주의에 대한 과거의 신학적 연구에 삽입되었고, 종종 역사적 연구를 현대신학의 관점에서 정의하도록 규범적 전환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10. 칼빈과 개혁정통주의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중심교리' 이론은 배제되어야 한다. 
역사는 멀러 교수가 지적한대로 불연속성 보다는 연속성 즉 점진적 발전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 중세후기 시대와 종교개혁시대의 연속성에 대한 주장은 H. Obermann, K. Reuter, Steinmetz 등과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만 간주했던 점들이 어느 정도 수정되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모든 종교개혁가들의 사상들이 중세 신학자들과 전혀 관계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특별히 이 사실은 종교개혁가들의 용어 사용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하는 일 보다 역사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용어를 선별해서 사용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일세대로 분류되는 루터, 부써, 쯔빙글리 등과 같은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이세대로 분류되는 칼빈도 예외가 아니다. 
멀러 교수는 확실히 이러한 역사의 연속성에 호소하면서 통념적인 개념 구분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구도에서 거의 모든 종래의 구분, 즉 그가 8번에서 지적하듯이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경건주의와 이성주의' 등과 같은 구분들은 정당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 사이의 심각한 차이와 구분은 포기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주의는 일반적으로 논리를 경멸하거나 특별히 삼단논법을 경멸함으로써 "스콜라주의"를 반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대구분과 그에 따른 시대정의의 어려움은 역사가 지닌 시간의 연속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역사의 연속성은 역사 자체를 동일성의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 사이의 비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이란 개념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역사적 발전이란 개념 속에는 분명 역사의 불연속성 즉 차별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시대 사이의 불연속성과 차별이 시대 구분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역사를 구분해왔고 또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구분의 엄밀성은 항상 이런 역사가들에 의한 역사구분의 원천적인 문제점으로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세의 시작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종교개혁은 중세인가 근대인가? 등의 질문들이 역사구분의 엄밀성과 연관된 대표적인 문제들일 것이다. 역사가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엄밀하고 객관적인 근거를 기준으로 예외 없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시대구분을 만들어 내는 일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술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역사구분의 기준에 따라 각 시대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소위 사관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역사평가의 문제들은 자연히 해석학과 매우 복잡하게 얽히게 되어 있다. 불확실성의 원리가 혼돈이론을 낳듯이 해석학에 근거한 사관의 다양성은 역사평가의 상대성과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나아가 본질적으로 역사평가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역사 자체 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란 상반된 개념이 공존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역사 평가를 위한 이 두 요소의 취급은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연속성에 지나친 강조점이 주어지든 그 반대의 경우든 균형이 한편으로 기울 때, 역사의 상이성에 대한 평가는 모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통상적 구분은 교육적 차원의 약속으로 수용되고 유지될 필요가 있다. 즉 역사에 대한 통상적 구분과 정의는 역사의 엄밀성에 의해 어느 정도 교정되고 수정될 수 있으나 후자가 전자를 근본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절대적 엄밀성이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멀러 교수의 스콜라주의 이해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이런 범주에서 평가될 부분도 있다. 그의 스콜라주의에 대한 이론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 위에 세워진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콜라주의란 단어의 어원적 개념과 또한 17세기의 개혁 스콜라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스콜라스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멀러 교수의 견해를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스콜라주의의 대한 통상적 이해를 반박함으로써 스콜라주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것은 스콜라주의에 대한 멀러 교수의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누구도 논박할 수 없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 스콜라주의를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먼저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개념의 정의와 활용도, 그리고 적용범위 등을 상세하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어려움은 물론 연구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에서도 발견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당시 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스콜라스틱이란 용어의 정의와 이해도, 그리고 적용 다양성과 이로부터 비롯된 상이성에서 발견될 것이다. 즉 역사적으로 스콜라스틱이란 용어에 대한 이해의 복잡성은 일차적으로 이 용어 사용의 포괄성과 복잡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3. 칼빈과 칼빈주의 
멀러 교수는 칼빈과 칼빈주의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반대한다. 그 중 하나는 역사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17세기 스콜라주의의 다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 멀러 교수의 결론은 칼빈과 그 이후의 개혁신학 간에는 불연속성 보다는 강한 연속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첫째로, 멀러 교수는 역사의 연속성을 반드시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칼빈에 대한 이해도 중세후기의 신학적 토양, 즉 중세후기의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라는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만일 칼빈이 기독교 개혁 인문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는 또한 중세후기 사상의 대표자로 인정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개혁 정통주의의 선구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세후기의 스콜라주의에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다는 예로써 그는 멜랑흐톤 Melanchthon의 [신학총론 Loci communes]을 든다. locus 방법의 사용 그 자체는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멜랑흐톤은, 멀러 교수에 의하면,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기초자'이다. 멀러 교수는 칼빈의 신학방법론 역시 멜랑흐톤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멜랑흐톤과 무스쿨루스 Musculus, 베르미글리 Vermigli, 그리고 우르시누스 Ursinus의 체계적 노력들만이 loci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칼빈의 기독교 강요 자체 역시 신학적 loci와 disputationes (토론들)의 편집물이다.' 또한 흔히 스콜라 학자들이 하듯이 칼빈 역시 그의 인성에 대한 정의와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능 심리학 Aristotelian faculty psychology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중세후기 사상의 한 대표자요 개혁 정통주의의 한 선구자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칼빈과 칼빈주의의 불연속성에 강조점을 둔 이론들에 대한 멀러 교수의 반박은 17세기 개혁 스콜라주의의 다양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에 근거하여 그는, 개혁 스콜라주의를 한 사람의 유산으로 간주하거나, 하나의 철학적 영향,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즉 멀러 교수에 의하면, 칼빈이 후기 개혁신학의 유일한 선조도 일차적 영향도 아니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후기 칼빈주의가 '하나의 교리적 단일체 a dogmatic monolith'가 아니라는 점에서 칼빈을 칼빈주의와 대립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복합적 발전 양상 때문에 개혁 전통은 그야말로 '다양한 운동 diverse movement'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종교개혁의 몇몇 중요한 두 번째 세대 건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과 후기 개혁 신학 형성에 유일한 참고자료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칼빈 이후의 신학자들이 칼빈 신학의 '균형 balance'을 잃어버렸다거나 그들의 조직적 노력이 칼빈 교리의 강조점을 왜곡 내지는 잊어버렸다는 주장을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연속성과 개혁 스콜라주의의 다양성을 칼빈과 칼빈주의의 관계를 규정하는데 적용시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적용을 위한 '정도의 차이'에 있다. 역사 해석에 있어서 역사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로 고려할 것인가? 개혁 스콜라주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의 다양성을 어는 정도로 고려할 것인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학문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학문의 한계이다. 이 문제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이 문제를 보다 설득력 있게 해결하기 위해 도전해왔고, 또한 도전하고 있다. 학문이란 전제와 선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전제와 선택은 그 성격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다른 전제와 선택이 그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동의할 수 없는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인정되어야 한다. 즉 칼빈의 반스콜라적 자세는 인정해야 한다. 칼빈은 당시 카톨릭 신학자 사도렛 Sadolet의 서신에 대한 답장에서 '스콜라신학이 일종의 비밀스러운 마술로 정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멀러 교수 주장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론적인 비판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에, 멀러 교수의 주장에 있어서 좀더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역사의 연속성을 근거로 한 멀러 교수의 칼빈 신학에 대한 자리 매김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멜랑흐톤의 [신학총론]과 같이 중세후기의 인문주의자인 루돌프 아그리콜라 Rudolf Agricola의 loci 계열로 간주한다. 멀러 교수는 이 loci 방법론을 중세 스콜라주의에서 인문주의에로 발전된 스콜라적 인문주의의 방법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큰 난점을 안고 있다. 먼저, 멜랑흐톤이 말한 'loci'에 대한 정의와 칼빈이 말한 '강요'의 기록 목적은 비교되어야 한다. 멜랑흐톤은 '총론 loci commune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1519년 자신의 [수사학 De Rhetorica]이란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총론들을 인간적이고 학문적인 것들과 연관된 개념형식들로 칭한다.' 멜랑흐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개념형식들에 해당되는 것들로는 행운 fortuna, 부 opes, 명예 honor, 생명 vita, 죽음 mors, 힘 virtus, 지혜 prudentia, 정의 iustitia, 자유 libertas, 절제 temporantia 와 이러한 것들의 반대 개념인 가난 paupertas, 불명예 ignominia, 추방 exilium, 무분별 temeritas, 불의 iniustitia, 운수 sors, 무절제 혹은 사치 intemperantia oder luxus 등이 있다. 반면에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기록한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의도는 단지, 종교에 대한 어떤 열심을 통해 자극된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로 교육될 수 있도록, 약간의 기초원리들을 제공하는데 있습니다'. '나아가 본서에서 저의 목적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읽는데 쉽게 접근하고 어려움 없이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나가도록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의 작품 어디에도 멜랑흐톤이 그의 [수사학]에서 정의한 'loci'에 대한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칼빈의 [강요]가 멀러 교수의 주장대로 'loci-method'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하더라도, 칼빈 자신이 자신의 [강요]에 대해 정의한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칼빈의 [강요]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토론법 형식으로 구성된 토마스의 [신학요론]이나 멜랑흐톤의 수사학적 정의에 따른 [신학총론]과 비교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발견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강요]를 기록한 칼빈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무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의 [강요]는 분명히 하나의 신학총론을 목표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칼빈은 자신의 [강요]를 성경입문서로 간주한 반면에, 17세기의 개혁 스콜라주의 학자들은 그것을 개혁주의 교리교본의 하나로 간주했다는 것이 칼빈과 칼빈주의의의 차이의 출발점이다. 멀러 교수는 [강요]를 loci 방법론을 가진 신학총론 형식의 교리 교본으로 취급한다는 점에 있어서 약 300년 전의 개혁 스콜라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두 번째로, 멀러 교수가 칼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들을 차용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칼빈이 중세 후기의 신학적 기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 고찰해 보자. 칼빈이 자신의 논증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차용했다는 것을 근거로, 멀러 교수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의 덜 기술적인 언어는 기능 심리학의 용어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예로써 [강요] 1권 15장 7절과 2권 1장 8-9절 과 2장 2절을 든다. 그러나 멀러 교수가 제시한 세 곳 어디에서도 칼빈이 성경의 용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비교하지도,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두 부분, 곧 오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로 하자. 실로 이 구분은 현재 우리의 목적에 편리한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마음 그 자체에는 활동이 없고 그것은 선택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사소한 논의에 붙들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 무익한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들에 대한 칼빈의 사용에 관하여 우리는 칼빈이 반대편의 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의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나 형식을 따르자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멀러 교수가 지적한 대로 후기 개혁주의는 다양한 기반과 기후아래 형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 칼빈이 칼빈주의의 유일한 참고자료가 아니라는 점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들이 칼빈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한 칼빈 이후의 개혁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신학 내용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칼빈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사실 또한 어느 정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 역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에서처럼 신학 개념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는 칼빈보다 훨씬 더 교리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결과가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에 대한 이론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의 서정은 성경적 가르침 이상의 구조를 가지지 않으며, 후기 시대의 학자들에게서와 같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대표적인 개혁 스콜라주의자들은 중세의 스콜라주의에서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인 질문제기를 통한 토론방식을 그들의 신학방법론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분명 칼빈과 다르다. 이런 점에서 중세의 스콜라주의와 17세기의 스콜라주의간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것이 개혁정통주의 신학과 중세 스콜라 신학의 동일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라무스주의의 영향으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흐름 역시 개혁 스콜라주의의 속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개혁 스콜라주의뿐만 아니라 라무스적인 개혁 스콜라주의 역시 기독교 교리에 대한 논리적 체계화를 시도했으며,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분명히 종교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깊이 철학의 논리구조에 의존한다. 개혁주의 유산의 양대 흐름 가운데 라무스주의의 영향은 신비주의와 결부되어 있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교리의 조직화와 체계화와 결부되어 있다. 칼빈으로부터 시대가 멀어질수록 개혁주의 진영에서의 칼빈의 영향이 점차 줄어들었고, 개혁 스콜라주의를 방어하는 결정적인 무기는 칼빈의 [강요]가 아니라 철학의 논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교리적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멀러 교수가 제시하는 칼빈 신학에서의 근거들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칼빈에게 있어서 개혁 스콜라스틱의 방법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칼빈의 신학 체계 내에서 예정론과 기독론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근거로써 멀러 교수는 칼빈이 '믿음의 순서 order of faith'를 성육신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 칼빈이 예정론과 섭리론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킨다는 점, 'extra calvinisticum'의 요소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칼빈의 견해 속에서 발견된다는 점, 칼빈에게서 '실천적 삼단논법 syllogismus practicus'의 여지가 발견된다는 점, 칼빈의 구원론은 제한된 구원 교리라는 점 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근거들은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논쟁에 등장하는 주된 논점들이다. 
첫째로 멀러 교수는 요 17:3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칼빈이 '믿음의 순서 (서정)'를 성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성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칼빈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원하는 지식 사이의 긴장관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칼빈의 의도와 거리가 먼 멀러 교수 자신의 자의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칼빈의 의도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는 말씀에서 성부가 먼저 나오는 것을 근거로 믿음의 순서, 즉 성부 하나님을 안 다음에 성자 예수님을 안다는 식의 순서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지, 그 순서를 바꾸어서 성자 예수님에 대한 지식 다음에 성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공식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하나님의 지식 사이의 긴장은 더더욱 칼빈의 의도와는 먼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은 동일한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성부 안에서, 그리고 성부께서는 오직 성자 안에서만 알려진다고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세상에 구원자를 약속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통일성과 진리가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시기 위해 낮아지셨기 때문이다. 거기에 도달될 때 그 때 그의 신적 위엄이 드러나고, 그리고 그 때 그 분 (그리스도) 자신은 전적으로 성부 안에서 알려지고 성부께서는 전적으로 그 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알려진다.' 
두 번째로, 멀러 교수의 주장대로 칼빈이 예정론과 섭리론을 극단적으로 구별하는가의 문제이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의 자리를 신앙론에, 그리고 섭리론의 자리를 신론에 배치시킨 것은 사실이다. 멀러 교수는 칼빈의 이러한 배치를 근거로 칼빈의 [강요]가 loci 방법론을 따르는 증거로 평가한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예정론과 섭리론의 교리에 대한 '칼빈의 극단적 분리 Calvin's ultimate separation'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미리 정한 예정이 세상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섭리보다 '논리적 우선성 logical priority'를 가진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칼빈은 예정과 섭리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지도, 예정을 섭리보다 우선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은 예정과 섭리를 구분하면서도 어떤 때에는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강요] 3권 23장 8절에서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예정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인과 동기가 그들 속에서 발견되듯이 그들의 파멸은 하나님의 예정에 달려 있다. ... 따라서 사람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정해진 섭리에 따라 넘어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범죄 때문에 넘어진다.' 멀러 교수의 가정대로 칼빈이 섭리라는 용어를 세상의 유지와 보존과만 관련시키고 따라서 예정을 섭리 보다 논리적으로 앞선 것으로 간주했다면, 칼빈이 3권 23장 8절에서 사용한 '정해진 섭리'라는 표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멀러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칼빈의 이 문구는 칼빈의 실수이든지 아니면 칼빈 사상의 내적 불일치를 증거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칼빈의 기독론에서 'extra calvinisticum'의 요소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이 용어의 의미는 말씀 Logos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성 속에 사시지만 제 2 위 하나님으로서의 무한성 때문에 동시에 인성을 넘어서도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프랑수와 방들 Fran ois Wendel에 따르면, 루터가 속성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와 편재 ubiquitas라는 전통적 개념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인성과의 연합을 통해 그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까지도 편재한다고 인정한데 반해, 칼빈은 '신성의 불변성 immutabilit 과 불교류성 incommunicabilit '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편재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합시키거나 서로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하나이시나 결코 혼합되지 않은 본성들 속에서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도 우리의 주님과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시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비록 인성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 왜냐하면 그리스도 속에 있는 두 본성을 결코 혼합해서도 분리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멀러 교수가, 칼빈의 후계자들에 의해 사용된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철학적 개념이 'extra Calvinisticum'를 이해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kenosis와 속성의 교류'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 용어가 칼빈 자신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용어를 칼빈의 기독론 이해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tra Calvinisticum'에 대한 확언이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철학적 원리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보는 윌리스의 견해가 멀러 교수의 견해보다 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넷째로, 실천적 삼단논법의 문제를 살펴보자. 멀러 교수는 칼빈이 실천적 삼단논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용과 오해를 경고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멀러 교수에 의하면 설교 그 자체는 확신 assurance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설교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의 효과가 즉각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확신의 문제가 제기 되는데, 이 확신은, 하나님의 작정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확인하고 확증하는 믿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선택의지에 대한 객관적 선포를 믿음에 의한 선택의 주관적 판단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칼빈을 실천적 삼단논법의 공식에 접근하게 만든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강요] 3권 24장 4절을 제시한다: '우리의 선택의 확실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의 확실한 보증들인 후천적 표징들에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최상의 순서를 붙잡을 것이다' 여기서 멀러 교수는 '후천적 표징들 signa posteriora'을, 동일한 곳에서 칼빈이 말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매일 받는 은혜를 느끼는 것'에 대입시킨다. 그는 이와 같은 빈약한 증거로 칼빈을 실천적 삼단논법의 사용자로 만들고자 한다. 멀러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칼빈 자신의 말을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가 우리의 선택의 확실성을 우리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칼빈은 우리의 선택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거울 되시는 그리스도 안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멀러 교수가 개혁 스콜라주의의 정의인 '주관적 이해'로써의 '확신'을 칼빈에게까지 적용시키려는 것은 칼빈 자신의 '확신'에 대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칼빈은 비록 그가 확신이 믿음에서 유래된다고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확신을 구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신 fiducia'을 '믿음 fides'과 동의어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칼빈에게 있어서 확신을 주관적인 이해로 해석할 수 있다면 믿음 역시 주관적인 이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감추어졌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 그 믿음의 지식 fidei notitia 자체가 곧 확실성 certitudo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제인 '제한된 구속'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너무 많은 논쟁을 거쳐온 것임을 감안하여 생략하기로 하겠다. 
3. 마무리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먼저,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의 역사적으로 상황을 잘 알아야하고, 또한 두 시대에 속한 신학자들의 작품을 신학적으로 잘 파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실력과 시간을 가진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한 사람에 의해 그 두 가지 모두가 충족시켜지기란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약 400년이란 시간이 흐른 이후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그 시대를 얼마나 정확히 분석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며, 또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승자들이 기록한 작품들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일 역시 시대분석 못지 않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들은 너무나도 많고 그들의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가들, 특별히 비텐베르크 Wittenberg의 개혁자 루터 Luther 와 그의 동료이며 후계자인 멜랑흐톤 Melanchthon, 그외 대표적인 루터란 종교개혁가들로는 부건하건 Bugenhagen, 브렌쯔 Brenz, 오시안더 Osiander, 아그리콜라 Agricola 등을 들 수 있고, 개혁주의 진영에 속한 종교개혁가들로는 쮜리히 Z rich의 개혁가 쯔빙글리 Zwingli와 그의 후계자 불링거 Bullinger를 비롯하여, 바젤의 개혁가 외콜람파디우스 Oecolampadius, 스트라쓰부르크의 개혁가들인 부써 Bucer와 카피토 Capito와 헤디오 Hedio, 제네바 Gen ve의 개혁가 파렐 Farel과 칼빈, 로잔느 Lausanne의 개혁가 비레 Viret 등과 같은 인물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재세례파와 이탈리아, 영국, 스코틀랜드, 헝가리 등의 유럽 각지에서 한번이라도 들어본 이름의 종교개혁가들 뿐만 아니라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종교개혁가들도 너무나 많다. 한 시대 내에서도 이와 같은 범위와 자료의 방대함 때문에 그것을 포괄하고 통합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시대와 시대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를 엄밀히 파악해 내고 규정하기란 어떤 의미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임무로 남게 된다. 
멀러 교수는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된 개혁 스콜라주의는 중세 스콜라주의 보다는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둔, 그래서 중세 스콜라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개혁 스콜라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스콜라주의를, 이 단어의 기원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따라 신학교육방법으로 정의한다. 그는 17세기의 스콜라주의 시대를 교리적 화석화 시대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적 상황 때문에 개혁가들이 이루지 못한 개념 사용의 불분명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분명하고 명료하게 만든 시대로 평가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한 후기 개혁주의 신학 방법론 즉 스콜라스틱은 개혁노선에서의 일탈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공로로 평가된다. 멀러 교수의 시도는 스콜라주의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에 반기를 듦으로써 스콜라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역사의 연속성 이론과 개혁 스콜라주의 신학의 다양성 이론이 멀러 교수의 그와 같은 평가의 출발점인 동시에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이론들을 역사에 적용할 때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자기 주장의 일관성을 위해 한편으로 치우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역사의 연속성이나 불연속성을 어떤 하나의 이론을 일관성 있게 세우기 위한 도구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양성 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동질성을 주장하기 위해 상이성을 왜곡시켜서도 안 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동질성과 상이성 둘 다를 자신의 유산으로 가진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둘 모두를 가능한 한 편견 없이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멀러 교수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치는 연속성에 절대적 강조점을 두는 편에 확고히 서 있다. 종교개혁과 개혁 스콜라주의 간의 동질성을 찾기 위해 멀러 교수는 그 둘 간에 인정되어야 할 상이성을 축소시키거나 왜곡 내지는 희생시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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