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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3) : 분노

치명적 죄와 중독(3) : 분노

 

노승수 목사

 

분노 : 마귀의 용광로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분노는 사랑의 거부될 때 흐르는 진액이다.

C. S. 루이스

 

분노를 생각하고 그것을 다룰 때, 우리는 분노를 일으키는 충동의 문제가 아니라 죄가 되는 분노를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주제는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악의체 찬 분노이다. 그리스어 오르게(orge)는 악한 분노로 정의되는데, 상대방이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지속적이고 격하며 앙심에 찬 욕구를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5:22)라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저주 받는 분노는 감정적인 반사작용이 아니라 명백히 복수의 의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분노가, 적개심을 품고 원한을 키우는 의지를 악의적으로 조장한다.

 

이런 악의적 분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폭발적 분노와 삭히는 분노 또는 화약통분노와 질그릇분노가 있다. USA TODAY에 이런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앨라바마 주의 대드빌(Dadeville)이라는 사람은 성경 인용 대회에서 졌기 때문에 분노해서 그는 그 대회에서 우승한 38세의 가벨 테일러(Gabel Taylor)를 쏘아 죽였다. 이런 화약통 분노는 화약처럼 조그만 불꽃에도 폭발하고 만다.

 

삭히는 분노는 우리가 질그릇에서 요리를 하는 고기처럼 하루 종일 안달하면서 부글부글 끓는다. 이러한 삭히는 분노는 결국 폭력이 된다. 심리학자들과 정신병리학자들은 종종 분노를 안에서 부글부글 끓게 하고, 그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 분노를 쌓아 두는 사람들을 과격한 급진주의자와 실인자들로 진단한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교구 목사가 분노를 마귀의 용광로라고 부른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분노는 죄를 초래한다. 폭발적인 분노는 배우자를 구타하거나 어린아이들을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원인이 된다. 미국의 공중위생국 장관 아토니아 노벨로에 의하면 매년 구타당하는 부인들의 수가 200-4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은 다를까?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알코올 중독자는 350만 명, 도박 중독자는 300만 명, 마약 중독자는 약 100만 명으로 각종 중독자는 총 750만 명이나 된다(2000). 수백 명의 부인들이 남편과 애인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있다. 해마다 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가족들의 손에 의해 폭행당하고 있다. 이처럼 분노는 살인을 일으키고, 전쟁을 초래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가정을 찢어 놓고 관계를 사정없이 파괴시키는 악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악한 분노의 문제는 내적인 태도,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려는 증오심에 있다. 증오심은 해치고 죽이려는 복수의 욕망이다. 조지 맥도날드는 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보다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악할 것이다. 전자는 한 순간의 격정으로 인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마음의 선택이다. 증오한다는 것, 우리의 이 소우주에서,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생각을 완전히 몰아내고,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한 영적인 살인이다.”

 

분노는 중독의 원천적 감정이다. 정신역동적 이론에 따르면 물질 남용이나 중독은 자위 행위와 유사하며, ‘동성애적 충동에 대한 방어이고 구강기적 퇴행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중독 증상은 우울증과도 관련돼 있고 손상된 자아 기능의 투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건강한 자아의 자율성과 자신감은 부모의 건강한 양육으로부터 나온다. 이 시기에 연약한 자아는 학대나 상처를 경험하게 되면 자아가 이 상처나 학대로 말이암는 분노와 적개심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음으로 인해, 증상을 동원하게 된다. 물론 아동기에 이런 중독이 발병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내적 균형과 만족을 얻기 위해 손쉬운 방편을 찾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 남용자 및 중독자들이 일반 인구에 비해 자살률이 20배나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중독에 잘 빠지는 사람들은 보통 강하고 지속적인 아버지 상이 없고, 어머니에 대해 소유와 거절의 감정이 있다. 방어기제나 적응기제 또는 내적 통제가 부족하고 심리적 욕구의 즉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목표를 향해 장기간 끈질기게 노력해 만족을 획득할 수 있는 자아 능력이 부족하고 기쁨을 추구하며, 쉽게 목적 달성을 이루려고 고통을 참지 못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것이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중독자들은 욕구, 고통, 성적 충동, 사회적 좌절감 등을 물질 효과로 즉각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질 효과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불안하거나 우울하고 외롭거나 습관적인 절망감에 잡혀 적개심과 죄책감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같은 느낌을 피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더 많은 양의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심각한 중독에 빠져들게 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런 중독 물질들은 뇌의 행복감을 느끼는 호르몬인 도파민을 과다하게 분비하게 하고 도파민의 과다분비는 도파민2수용체(D2R)의 과다 생성을 가져온다. 또한 도파민은 뇌의 충동을 조절하는 중추인 전두엽에서 주로 분비가 되고 이것의 과다는 결국 충동조절능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D2R이 과다생성되면 자연히 중독자의 행복감이 감소하게 되는데, 중독자는 그래서 더 많은 약물을 원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에 의해서 중독이 일어난다.

 

분노의 감정은 대개 불공평하다는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이 분노는 곧잘 하나님을 향하기도 한다. 마치 시기의 어그러진 눈이 하나님을 악하게 보는 것처럼 분노의 어그러짐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표현이 된다. 사람들은 삶의 불공평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삶은 공평하지 않을뿐더러 삶은 하나님이 아니다. 분노에서 흘러나오는 원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의 그리고 최종적인 정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노의 치명적인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원한에 사무친 분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남겨 두기보다는 스스로가 재판관이 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한다.

 

성경은 특별히 치명적인 죄의 목록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치명적인 죄가 되는 까닭은 이 분노가 마귀가 틈타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4:24-27). 특별히 이 분노에 굴복하는 것은 마귀를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분노, 특히 삭히는 분노와 관계된 경우이다. 분노가 끓어오르고 불평이 쌓일 때, 분노를 억제 할 때, 분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거절 할 때, 비파괴적이고 비범죄적인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실패할 때, 우리는 마귀를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분노는 또한 중독의 원인이 되는 핵심적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마귀의 목적이 우리의 판단과 의지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분노와 중독의 상관관계는 중독이 판단과 의지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이며 영적인 방식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분노에 대한 처벌은 질식시키는 연기로 뒤덮는 것으로 묘사된다. 분노는 이처럼 우리 영혼을 질식시킨다. 그리하여 마귀의 포로로 삼는다. 분노의 죄와 관련하여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4 가지 훈련의 영역이 있다.

 

첫째 억압된 분노를 꼭 붙잡는 일, 상처를 계속해서 꼭 붙잡는 일과 같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겠노라고 지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둘째는 과거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늘 자신은 피해자이고 누군가를 탓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노에 붙들릴 수 밖에 없다. 셋째, 이것은 조금 어려운데, 우리의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악의에 찬 생각들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두어 두는 것은 쉽다. 악의를 품고 복수하려는 생각을 정신적으로 환대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암이다. 우리가 이런 감정들과 생각들을 견지하는 한 인생은 맹목적으로 이 왜곡을 반복한다.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냄으로 부정적 순환의 고리를 깨뜨려야 한다. 윌리암 블레이크는 "분노의 호랑이가 길들여진 말보다 지혜롭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천사표 인간형의 목사, 사모, 크리스찬을 표방하며 살기를 원한다. 천사표는 언제, 어디서나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너무나 착한 (too nice guys)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착하다는 칭찬을 받는 목표는 달성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압한 댓가를 값비싸게 치루어야만 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상대방에게 정직하게 알려주지 않은 책임을 져야하며 그 결과 상대방은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도 천사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릇된 정보와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그래서 더욱 나의 진정한 소원과 바램과는 다른 행동을 상대방이 취하게 되는 오도와 착각을 일으키게 될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은 점점 억울하고 그래서 분노와 미움이 내적으로 쌓여 점점더 파괴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변해가게 된다. 그러나 천사표는 절대로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상대방을 공격할 수 없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바로 이러한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on)에서 타인에게 큰 혼란과 당황과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는데, 최선을 다해 남을 섬기고 봉사했는데, 이렇게 참았는데,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는데 왜 저들이 나에게 화를 내고 내 곁을 떠나는가? 천사표 곁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남아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천사표에게 무자비하게 수동적 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알려주는 호랑이가 자신의 감정을 길들인 말보다 훨씬 지혜롭다.

 

네 번째 훈련의 영역은 용서이다. 용서와 분노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우리는 분노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다. 그것은 물과 불과 같다. 더 큰 세력이 이기게 될 것이다. 결국 모든 용서는 자신에 대한 용서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은 사람은 타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도록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강의안입니다. 출처와 가주는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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