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목 차
I. 서 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방법 및 범위
II. 그의 계시안에 계신 하나님 (God in his Revelation)
1. 교의학 안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자리 (The Place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Dogmatics)
2. 삼위일체론의 근원 (The Roo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3. 삼위일체론의 흔적들 (Vestigium Trinitatis)
III. 하나님의 삼위일체 (God's Three-in-Oneness)
1. 삼중성 속의 단일성 (Oneness in Threeness)
2. 단일성 속의 삼중성 (Threeness in Oneness)
3. 삼위일체 (Three-in-Oneness)
4. 삼위일체론의 의미 (The Meaning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V. 결 론
1. 문제점
2. 공헌한 점
참고문헌
I. 서 론
1. 연구의 목적
기독교 초기에서 속사도시대로 넘어 가면서 교회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발전되자 교회는 그것을 신조로 표현하여 고백하기 시작했다.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ea)에서 교회는 처음으로 삼위일체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는 성령이 진정한 하나님이며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054년에 동,서방 교회가 분리되게 되었는데, 그 분리됨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론의 차이였다. 589년 톨레도(Toledo)회의에서 서방교회가 성령의 발원에 대한 고백으로써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원문에다가 그들의 신학에 맞추어서 첨가하기를 "또 성자에게서도"(filioque) 나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희랍의 동방 정교회는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나왔다"는 후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삽입구를 거부하고 지금까지 콘스탄티노플 신조만을 그들의 정통신조로서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삼위일체론과 연관되는 수많은 이단들이 발생했고, 기독교 교리사의 주요 논쟁점이 되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하나의 초월적인 대상으로서의 객관적인 삼위일체의 이론은 불가능하며 오직 신과 우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계시 경험을 통해서, 곧 살아 있는 신에 관한 경험과 구원의 신에 관한 경험을 통해서 삼위일체론의 관념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크리스챤의 종교의식에서 실증적으로 기술된 다음에, 신론(神論)의 완성으로서 마지막에 놓이게 된다. 또 헤겔(Hegel)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변증법적으로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운동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은 감각적 표현방법을 사용하는 종교적 표상(Vorstellung)이라고 보았다. 즉 아버지라든지 아들 등의 표현은 진리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감각적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칼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하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하면서 바르트가 그의 신학 서론을 삼위일체 신론의 교리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잘못으로 지적하면서 삼위일체는 모든 신학적 상징처럼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며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적 여러 가지 개념을 사용하면서 신학적 합리성의 일반법칙에 따른 신학적인 사유의 노작(勞作)이라고 했다. 이렇게 19세기-20세기의 기독교 사상사 속에서 삼위일체론은 자유주의적 물결을 타는 가운데 인간 실존으로부터 출발하여 삼위일체 신에게 까지 도착하는 경험적이고 사변적인 작업 속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삼위일체론 이해의 틈바구니 속에서 바르트는 다음 두가지 면에서 사상의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로, 그는 19세기의 신학과는 반대로 삼위일체 신론을 자기의 교의학의 최고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현실성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존질에 관한 문제도 철학적인 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도 쓰지 않으려 하면서 성경안에서 삼위일체를 찾으려 했다. 이것은 그의 삼위일체 신관이 가톨릭의 그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르트가 가톨릭의 계시관에 대해서 19세기의 개신교 신학과 더불어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바르트가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제 2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진리와 성성(聖性)이 언제나 완전하게 머물러 있으며 영원하신 지혜의 놀라운 친절이 드러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고는 사변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새롭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는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연구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은 그의 신학의 서두에 위치하며, 사변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한다. 본고는 그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연구하기 위해 그의 기본 저서인 Church Dogmatics(교회 교의학 영역판 1963년 최종판) 1권을 직접 번역하여 요약, 조사하고, 여러 2차 논문 및 저서들을 토대로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교회 교의학 1권 2장 '하나님의 계시'(THE REVELATION OF GOD)의 1부 '삼위일체 하나님'(THE TRIUNE GOD)전체를 다루지는 않고 8절 '그의 계시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HIS REVELATION)과 9절 '하나님의 삼위일체'(GOD'S THREE-IN-ONENESS)로 범위를 제한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연구 방법으로서는 II장에서 8절, 곧 교의학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자리(The place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Dogmatics),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The Roo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를 고찰하고, III장에서는 9절, 곧 삼중성 속의 통일성(Oneness in Threeness), 통일성 속의 삼중성(Threeness in Oneness), 그리고 삼위일체(Three-in Oneness)를 통해서 바르트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삼위일체론의 문제점과 공헌한 점을 간단히 지적해 보고자 한다.
II. 그의 계시안에 계신 하나님
1. 교의학 안에서의 삼위일체론의 자리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하고, 계시의 개념을 보여주는 성경에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손상되지 않는 단일성(unimpaired unity)으로 나타내시지만 또한 손상되지 않게 계시자(Revealer)로, 계시(Revelation)로, 그리고 계시됨(Revesledness)으로 다르게 나타내신다." 바르트는 위와 같이 서언에 교리를 위치시키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성경에 나와 있듯이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님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이 손상되지 않게 한분이시면서 손상되지 않게 세 분으로 나타나신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우리가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고찰할 때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교회의 선포가 어떻게 성경에 의해 판단되는가를 명확하게 하려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미 계시의 증거가 되는 성경의 곁에 있지 않을 수 없다는 바로 그 문제점 안에서 계시의 정의를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이 그 증거자가 되므로 성경 안에서 계시의 정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안에서 말하는 계시의 문제가 어떻게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유발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바르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He reveals Himself). 만약 우리가 주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다루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계시자이신 하나님이 주어이며, 동시에 계시 안에서 그의 행동(act in revelation)이며, 또한 동시에 그 활동(its effect)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행동이 되시고, 또 동시에 그 행동의 활동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을 다른 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반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균진 교수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자관계는 그 이전 하나님 안에 하나의 내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의 반복(repetitio)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그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실질적으로 또 다른 두가지 질문, 즉 "그는 무엇을 하시는가?(What does He do?)" 그리고 "그의 활동은 어떤 것인가?(What does He effect?)"에 대한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바르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섯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서 증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둘째, 그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as this God)보이시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인식해야 하며, 셋째,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마찬가지로 계시를 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대답되어지고, 넷째,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창조하신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의 자기계시인 인간 가운데 오셔서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포함하며, 다섯째, 손상되지 않는 일체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은 세가지 존재양식(threefold mode of being)의 손상되지 않는 다양성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계시이해를 하며 교의학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자리를 정립하려 한다. 우리가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self-revealing God)이 누구인가?'하고 물을때 성경은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Three-in-oneness of God)을 인식하도록 강권당하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대답한다. 더 나아가서 다른 두가지 질문,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행동,does)와 하나님의 활동(effect)은 어떤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첫번째 질문에 대한 새로운 대답으로 대답한다. 이런 세가지 질문에 대한 세가지(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리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대답이 바로 삼위일체의 문제이다. 계시문제가 일차적으로 근원적으로 이런 문제(삼위일체문제,필자주)에 의해 바로 바로 서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자리를 교의학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의 이 교리에 대한 질문들은 성경에서 매우 적절하게 대답해주고 있다고 이해한다.
2. 삼위일체론의 근원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포괄적인 개념의 입장에 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된다(God's Word is identical with God Himself)고 하면서 성경과 선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be becoming)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비록 성경 속에서와 교회 선포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계시 안에서 그들이 증인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된다고 하면서도 성경과 선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를 갖고 있는 범위 안에서 그것이 계시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곧이어 증거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곧 성경과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위해서 계시는 사건이 되는 경우이어야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God reveals Himself as the Lord). 그리고 바르트는 "주가 되신다는 것은 계시 안에서의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에 대해 활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하나님의 주되심은 하나님의 자유를 의미한다.(Lordship means freedom)"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나타내신다는 발언을 지적할 때에 삼위일체론의 근원으로서 성경에 의해 증거되고 이 발언에 의해 불려진 실제적 계시는 두가지를 함축한다고 한다. 그 첫째는, 삼위일체론에 관한 발언은 계시에 대한 발언이나 계시 그자체와는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두번째로, 삼위일체에 관한 진술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계시에 대한 진술과 동일시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삼위일체가 신론의 기본전제가 되는 근거가 되는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명하려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기독교 교회의 교리(교의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대해서 올바로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런 요소들, 곧 삼위일체론은 신론의 기본 전제가 된다." 그리고 그는 "삼위일체론은 역사적으로 그것의 근원과 발생에 있어서, 주된 주제는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성자,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주된 주제로 위치시켜 놓았다. 이는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위격을 신론의 중심적인 위치에 갖다놓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가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한편, 바르트는 성서에서의 계시와 삼위일체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시하는 증거로부터 나온 삼위일체의 역사적 발달은 아래의 경로에 의해서 획득된다.
첫째, 성경 속에서의 계시는 인간에게 드러내실 수 없는 그의 본성에 따른 하나님의 자기 밝힘(self-unveiling)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definition)에서 자기 밝힘의 요소는 논리적으로 물리적인 계시의 요소로서가 아니라 계시의 성경적인 개념의 역사적 중심에 있어서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은 본래는 하나님은 계시될 수 없는 분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둘째, 성경안에서 계시는 그의 본성을 인간에게 밝히시지 않는 하나님의 인간에게 알려진 자기 밝힘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은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인 인간이 직접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자기를 계시하실 수도 있고 계시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에 대해서 또 이어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거나 드러내시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계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그의 자기 밝힘을 각각의 다른 실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한정된 형태 안에서 그를 밝히는 힘이 없는 인간에게 대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간주해야 한다.
셋째, 계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성경적으로 증거된 개념에 속한다. 성경은 항상 구체적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 관계로서(as a concrete relation to concrete men)계시를 말하고 있다. 성경적인 계시는 항상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사건을 의미한다. 각각의 특별한 사건은 다른 사건과 비교될 수 없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계시는 언제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을 스쳐지나가는 직선과의 접점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는 교회교의학 PP.375-378에서 바르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증거들을 들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리한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적으로 계시되심(historical revealedness)없이는 계시는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되심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효과적인 만남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로서 드러내셨다(God reveals Himself as the Lord)는 우리의 진술은 확고해진다." 여기에 대해서 제프리 브로밀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바르트의 관심은 신적 계시의 역사적 사실성을 거부하거나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역사적 논증을 통해 알려진 사건들의 영역 안에 놓이게 된것을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의 자기 분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위한 적절한 위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요약해보면 하나님이 주로 자기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론의 뿌리가 되고 그 삼위일체가 신론의 기본전제가 된다는 것이 바르트의 계시이해라고 한다면 그의 계시론의 중심은 바로 삼위일체론의 뿌리인 주(the Lord)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삼위일체론의 흔적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가 이미 여기까지 온 결과에 대한 비평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했다. 계시의 성경적 개념을 분석하려는 시도에 의해 우리는 성부,성자,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이 삼위일체의 근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계시의 성경적 개념이 삼위일체론의 근원이다." 그리고 바르트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거나 주라고 하는 지식을 나타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는 삼위일체론이 이런 근원으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할때, 우리는 그것이 아무곳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는(proceed from nowhere else) 논증법적 비평의 정신(a sprit of polemical criticism) 안에서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라는 표현은 아마 어거스틴이 시초였고, 그 뜻은 예를 들면 '기독교의 계시의 삼위일체적 하나님'과 같은 삼위일체의 유사어(an analogue of Trinity)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정한 형태(an assumed form of God in His revelation)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떨어져서 삼위일체론의 개념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흔적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복사(as a copy of the Trinitarian God Himself)로서 여겨져야 한다. 확실히 이 삼위일체의 흔적은 만약 개념의 2차적인 의미라면 삼위일체 교리의 두번째 근원으로서 여겨질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성경 계시 안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개념 이외에 피조세계 안에서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흔적이라고 여겨져 왔고 지금도 여겨지는 문제점(quaestio facti)에 대해 알기위해서 자연(nature),문화(culture),역사(history),종교(religion),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영혼생활(man's soul-life)의 현상들로 나누어 살펴 보고 있다.
한편 그 유비들은 해석(Interpretation)과 예증(Illustration)의 차이점 문제를 야기시킨다. 해석의 뜻이 다른 말들로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Interpretation Means Saying THE SAME THING in other words),예증은 같은 것을 "다른 말들"로 말하는 것이다(Illustration means saying the same thing IN OTHER WORDS). 계시를 예증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관심을 집중시킬때 쓰인다.이것은 계시가 자기증거력(power of self-evidence)을 가졌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계시를 올바로 믿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르트는 심지어 예증으로서라도 창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흔적들,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선포된 말씀으로서 삼중적인 형태의 한 말씀(the one Word)으로서 흔적들에 집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흔적에 대해 정말 올바른 뜻의 교리를 이해할 때는 흔적은 계시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언어, 세계, 그리고 인간성 안에서 추측되는 형태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흔적인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서 삼중적인 형태의 한 말씀은 명백하고 믿을만 하다.
III. 하나님의 삼위일체
바르트는 위에서 삼위일체가 교의학에서 어떻게 자리하며 그 근원은 무엇이고, 또 그 흔적은 무엇인가하는 삼위일체의 주변둘레를 한번 둘러 살펴보고는 이제 삼위일체 자체의 문제들에 대해 다음의 말로 시작한다.
"성경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상호 관계성(mutual relationships) 속에 계시는 셋 중에 계신 한분(One in three)이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주님인데 예를 들어 인간적 자아(man's I)와 만나시고, 분해할 수 없는 주체로서(as the indissoluble Subject) 그 자신을 연합하고,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으로 그를 나타내시는 주님이시다."
1. 삼중성 속의 단일성
계시의 주체에 대한 문제의 올바른 개념적인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교의적 삼위일체론의 발전으로 눈을 돌린다고 바르트는 첫부분에서 설명한다. 그리고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적인 계시 안에 근거한다는 것의 증거로 우리는 신약과 구약을 묶어주는 야웨-주님(Yahweh-Kyrios)이란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하고 항상 그 이름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고, 삼위일체 교리 그 자체는 이 이름의 해석상의 확인(explanatory confirmation)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이름은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고유한 실재이고 고유한 의지자(Willer)와 행위자(Doer)의 이름이라고 했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어떤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유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 안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설명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세례 고백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례 고백문안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고대교회의 셋으로 나뉜 위대한 고백안에서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세가지 대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세가지 대상들은 세가지 신들(three gods)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Persons)은 절대 세가지 신들이 아니다." 바르트는 여기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질(The essence of God)은 하나님의 신격(the godhead of God)이며, 이 하나님의 본질은 세가지 '인격'에 의해 제거되지 않은 단일성이라고 불려지기 보다는 세가지 '인격'안에서 그 단일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불려져야 한다.이 '셋'에 대해 어떻게 불려지든 간에 그것은 세가지 본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 속의 셋(Three-in-oneness)은 삼중적 신(threefold deity)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세번의 반복(threefold repetition) 안에서의 한분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단일한 종류이거나 집합적인 의미로서 세 인격의 본질이 수적으로 단일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그것의 본 의미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하나님의 인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교회교의에서 쓰이는 '인격'(Person)은 직접적으로 인격성(personality)와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는 하나님의 세 인격성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어해야 하는 가장 우려할만하고 가장 지적되는 삼신론(tritheism)의 표현이다. 삼위일체교리는 세가지 신적자아(three divine "I's")라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분 신적자아(the one divine I)의 세번의 반복이라고 말해진다.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의 동일성(the equality of essence,consubstantialitas)의 개념은 모든 면에서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 본질의 정체성의 관점에서(in the sense of identity of essence) 파악되어야 한다. 정체성으로부터 "인격"의 본질의 동일성이 따라 나온다." 이렇게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개념에서 일체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는 단일신론적 입장도 배격하며 모든 반삼위일체론(anti-Trinitarianism)은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많은 단일신론적 이단들은 계시를 말하려 할때에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할 때에는 하나님의 삼중 계시를 부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와 일체성 사이에 어떠한 선택도 행해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삼위의 높고 낮음에 대해서는 주어, 목적어, 서술어와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만약 계시를 하나님의 현존(the presence of God)으로서 신중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와 성령이 종속적인 실재(subordenate hypostases)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계시개념에 있어서 서술어(predicate)와 목적어(object)를 주어 그 자체(the Subject itself) 와 같은 동급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계시와 계시됨은 반드시 계시자와 동일시되어야 하며 단일신론과 양립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2.단일성 속의 삼중성
바르트는 위에서의 고찰과는 거꾸로 이번에는 삼중성에 대해 강조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단일성의 지식을 확증하지만, 어떤(any) 하나님의 어떤 단일한 어떤 지식을 말하는것은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증거에 따라 드러난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된 단일성의 계시된 지식을 확증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수성(singularity)이나 고립성(isolation)과는 혼동되어져서는 안된다. 단수성(singularity)과 고립성(isolation)은 일반적인 수적인 단일의 개념과 필수적으로 연상되는 한계인데 계시된 하나님의 수적인 단일성은 이런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 말은 바르트의 특징적인 교리적 관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미 바르트가 '교의학에 있어서의 삼위일체 교리의 자리'에서 주장했듯이, 무엇이 특별히 기독교적인가를 진술하기 위한 '중립적' 서설로서의 '한 하나님에 관하여'라고 하는 예비적 논술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수적인 단일성이 아닌 한 분으로 소개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의 구분을 시도한다.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된 단일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구분(distinction)과 하나의 질서(arrangement)를 포함한다. 이 구분과 질서는 세 '인격'의 구분과 질서인데, 우리는 '인격'이란 용어 대신에 세가지 하나님의 존재양식(three "MODES OF BEING" in God)으로 말하고 싶다." 여기서 바르트는 '양태'(modus)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즉 '형상태'라는 말은 다시 라틴어의 사람 즉 '가면'이라는 말과 상통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태와 품격 대신에 바르트는 '존재양식'이라는 표현을 들어서 이런 오해를 풀어보려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영원하신 주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오토 베버는 "이 '존재양식'이라는 개념은 새오운 것이 아니다. 이미 옛날 교회의 신학자들이 그런 말을 했다. 예를 들면 칼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귀절에서 존립(存立,subsistentia)이라는 아주 가까운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인격"이란 용어가 역사속에서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해서 4페이지를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단일성 속의 삼중성의 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우리의 개신교 교부들에 의해서 인격의 개념을 분석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대체로 다른 근원에서 획득된 인격의 개념을 과도하게 분석함에서 나왔다고 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가지 존재양식 속에서 한분이라는 진술은 단 한 분이신 하나님, 곧 하나의 주, 하나의 인격적인 하나님은 오직 성부의 존재양식으로, 성자의 존재양식으로, 성령의 존재양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하나님의 세 존재양식은 서로 혼동되거나 혼합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의 세가지 양식은 그 자신 안에서 세계와 인간과 비교되는 한 하나님이다.
바르트는 아래에서 그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고, 이에 따라서 문제점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확실히 하나님은 성경적으로 증명된 계시 안에서 때에 따라서 다른 행동으로 우리와 만나신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존재양식으로 구분되시고 성격지워지신다." 이 말은 양태론적 삼위일체적 성격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어벝든 이 세 가지 존재양식의 다양성은 위의 입장에서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입장에서 설명 가능한가? 이 대답은 세가지 존재양식의 내용의 다양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관계로부터, 그들의 발생학적 상호관계로부터(genetic relations to one another) 오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가지 다른 속성을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고, 또 자기발표의 다른 형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혹시 이런 분이시다가 혹시 저런 분이시다(alius-alius-alius).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도 되었다가 저것도 되었다가 하시는 것이 아니라(aliud-aliud-aliud)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 때문에 드러남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숨기심과 드러나심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f-impartation of God)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단일성을 바르트는 하나님 안에서의 반복,영원의 영원한 반복(the repetition in God,the repetitio aeternitatis in aeternitate)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삼위일체의 신비(mysterium trinitatis)는 그야말로 신비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여기서 "합리화"(rationalising)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합리화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신학은 신비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신비에 대한 모든 합리적인 노력(rational trouble)은 그것이 진지하면 진지할 수록 이 신비를 새롭고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고 볼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신비이며, 이것은 합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했다.
3.삼위일체
삼위일체의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삼중성 속에 있는 단일성'과 '단일성 속에 있는 삼중성'에 대한 것인데 이 두가지 단면들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바르트는 삼중성과 단일성이 합쳐지는 이 부분 초반에서 말한다. 왜냐하면 어느 한 면을 말하면 필연적으로 두가지 단면중 어느 한 면을 조금 더 강조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그들 가운데서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고 그 하나인 하나님 안에 구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다음에서 삼중성과 단일성을 조화시키려 노력한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관계안에 있는 한분 하나님은 오직 세분 안에서 알 수 있고,세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으로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세분 중 어느 누구도 다른 두분 없이는 알 수 없으며, 각각의 세분은 다른 두분과 함께 계신다."
바르트는 위와 같이 각각의 존재양식들은 다른 존재양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 하나님의 사역(operation)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계시자,계시,계시된 자, 또는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의 본질과 사역은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따라서 그의 행동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그의 사역과 본질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사역이 은총이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단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구별을 할때 우리는 그의 존재양식에 이런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구별은 그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곧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그 본질을 그의 사역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다음에서 그의 사역의 단일성과 삼위 협동성을 말한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어느 때에 활동하시든지 세가지 존재양식에 있어서 동시적으로(simultaneously) 또한 단일적으로(unitedly) 일어난 하나의 단일한 행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창조때와 과거에 일어났던 계시와 화해와 나아가 모든 완전함에 있어서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함께 활동하신다."
4.삼위일체론의 의미
이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의 출처와 성격과 요소, 그리고 삼위일체를 말할 때 거부되어야 하는 사상들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삼위일체 교리를 요약하고 삼위일체론과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구약과 신약의 본문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그 본문이 속한 역사적 상황을 벗어나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성경이 쓰여진 이후의 상황에서 일어난 질문에 대한 이 본문의 주석(the exegesis of these texts)이다. 이것은 교회에 속한다. 이것은 교의(theologoumenon)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성경적인 증거는 한가지 전제인 "자기자신을 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세번의 다른 의미로 계시하신다는 것을 해석하는 가능성에 직면한다. 이 가능성이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근원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 안에서 직접 증언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쓰여진 후에 일어난 역사적, 사회적인 요망이 삼위일체론을 성경에서 추출, 해석하여 만들어진 교회의 교의라는 것이다.
한편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요소와 각 삼위의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삼위일체 교리를 지적하는 문제는 그것이 존재(being),언어(language), 그리고 행동(action)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을 향한 그의 자기 숨김(self-veiling)이나 자기 밝힘(self-unveiling)이나 자기 전달(self-impartation)의 요소라고 묘사될 수 있고, 계시의 성격은 거룩,자비,그리고 사랑이며, 신약성경에 나와있는 성격적 증거들은 성 금요일,부활절, 성령강림절로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이름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불려진다."
삼위일체론은 한편으로는 삼위 각 세 요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있어서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다는 진술로 표현된 종속론의 거부(the denial of subordination)를 뜻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삼위일체교리는 이 세 요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하여 낯선 것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표현된 양태론의 거부(the denial of modalism)를 뜻한다. 바르트는 이 양태론을 배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자는 성부가 현상하는 단순한 존재양식이 아니라 성부와 함께 하나님이 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며 하나님은 오직 이 존재양식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요소 너머에 있는 어떤 보다 더 높은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된다." 곧, 이것은 삼위의 위급에 있어서의 동일성과 2급인 성자의 위상을 정립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앞에서 배격한 것과는 반대하는 적극적인 신관으로서의 삼위일체의 교리는 성경의 증거에 따라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과 어느정도까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모든 존재 양식에서 자기자신과 동일하시고 단 한 분의 주(the same Lord)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이 주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그 자신을 우리와 연합하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까닭은 그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세 존재양식 안에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창조, 화해, 구속, 다시 말하면,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자 하는 그의 모든 존재, 말, 행동의 그분 자신의 본질, 즉 하나님 존재 자체 속에 기초하고 있으며 예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와 성경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 단원을 마치고 있다. "삼위일체의 문제가 제시되어 있는 성경은 또한 그 문제를 풀수 있는 기준과 감정가(judge)이며, 그리고 게속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교리를 넘어서는 것이며, 그러므로 교회의 교리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가 끌려가도록 하는 그런 비평적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다."
IV. 결 론
필자는 이상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그의 저서인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제 1권의 2장 중 8절과 9절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삼위일체론은 바르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도 않고, 여기에 대해서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신학자도 없을 만큼, 이 문제는 교리적이고 사변적이고 이론적이어서 실제 생활과 무관하게 여겨져 왔고 현대 자유주의신학 사조에서 삼위일체론의 자리가 조직신학의 가장 끝으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그의 교의학의 가장 꼭대기에 삼위일체론을 올려 놓은 바르트의 시도를 눈여겨 보았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을 요약해 보면 그는 8절,'교의학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자기를 주님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때 성경이 삼위일체론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계시론에 있어서 중요한 선행적 교리이며 성경이 그 질문의 해답이 될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근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찾으면 하나님은 자신을 역사적 사실로서의 주님으로 계시한다는 것을 알수있다고 했고, 하나님의 주되심은 그의 자유라고 했다. 이것은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위치를 신론의 중심적인 위치에 갖다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위일체론의 흔적들'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삼위일체의 유사어'라고 정의하고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복사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흔적들을 피조세계 안에서의 '존재의 유비'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흔적들인 계시된, 기록된,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삼중적인 형태의 한 말씀의 흔적에 집착해야 한다고 했다.
9절,'삼중성 속의 단일성'에서는 삼위일체론은 야웨-주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해석상의 확인이라고 했다. 이것은 어떤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 안에서 알 수 있다고 다시 주장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세례 고백문 안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세가지 신들이 아니라고 못박고 세가지 '인격'안에서 단일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세번의 반복 안에서의 한분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것은 한 분 신적 자아의 세번의 반복이라고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고는 단일신론을 배격하는데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과의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면에서 같다는 여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단일성 속의 삼중성'에서 삼위일체교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수성이나 고립성과 같은 수적인 단일의 개념이 아니라고 전제하고서 하나님의 본질의 구분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세 '인격'의 구분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세 '존재양식'의 구분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에서 바르트에게서 양태론적인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는 양태론을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 다른 행동과 다른 존재양식으로 계시하신다"고 말함으로서 양태론의 입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르트는 삼중성을 설명하는 이 부분에서까지도 단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뒤이어 그는 삼위일체론은 신비이며 합리적 노력으로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삼위일체' 부분에서 삼중성과 단일성의 이 두 단면들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바르트는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삼중성과 단일성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구별했는데 이 구별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행동에 따라서 구별되는데, 이 사역들 속에서 하나님은 그 본질을 인간에게 계시하셨다고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삼위일체론의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는 직접 증언되어 있지 않고 성경이 쓰여진 후에 일어난 시대적 요망 때문에 교회에서 성경본문을 주석함으로 삼위일체론을 성경에서 추출, 해석한 교회의 교리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바르트는 성경 속에 증거된 삼위일체론은 종속론과 양태론을 거부한다고 했고,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문제는 성경이 기준이 되어서만 풀리며, 교회의 교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이 지금 이 시대적 요망에 따라 교회가 성경을 기준으로 다시 삼위일체론을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문을 열어 놓았다.
1. 문제점
(1) 위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바르트의 삼위일체의 이해가 양태론을 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그의 사상의 기초 속에 양태론적인 성격이 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양식'이나 '한 분 하나님의 세번의 반복'이라는 표현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세 가지 존재 양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한 하나님을 우리는 전제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삼위가 아니라 사위(四位)를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삼위일체론의 세 위격에 있어서 그는 종속론을 배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를 삼위일체론의 중심에 두는 경향이 있다. "삼위일체론은 역사적으로 그것의 근원과 발생에 있어서, 주된 주제는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성자,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주된 주제로 위치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선택론은 성경을 합당하게 해석한 것인지 아니면 바르트가 지양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오히려 빠져서 헤겔이나 슐라이에르마허같은 사람에게서 보듯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2. 공헌한 점
위에서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지만 사실상 문제점 보다는 그가 신학적으로 공헌한 점이 더 비중이 크다.
(1) 바르트는 19세기 개신교 신학자들이 시도한 아래로부터의 신론, 곧 슐라이에르마허처럼 삼위일체론을 사변적이고 계시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신론의 가장 끝에 위치시키는 경향들을 뒤엎고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하여 그의 조직신학의 가장 위에 위치시켜 놓음으로써 현대 신학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2)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직접 증언되어 있지 않고 성경이 쓰여진 후에 일어난 역사적,사회적 요망 때문에 교회의 성경본문 주석으로 삼위일체론을 성경에서 추출, 해석한 교회의 교리라고 이해했다. 바르트의 이 이해는 상당히 건전하다고 생각된다. 초기 기독교 시대때 종속론, 양태론등의 이단들의 활동에 대응해서 교회가 성경 속에서 추출한 것이 삼위일체론의 역사라면 이것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시 성경을 해석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럴때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해석할 필요가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이다. 지금의 기독교의 상황은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등 수많은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모여 대화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최근에 WARC(World Alliancd of Reformed Churches)와 정교회(the Orthodox Church)가 만나서 삼위일체교리에 관한 신학적인 일치를 추구했다. 이런 시점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의 기원에 대한 이해는 비록 자신은 자연신학적인 가톨릭 사상을 비판은 했지만,기독교 일치 추구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관심을 촉진시켜 주었다. 그의 삼위일체론 가운데 비판할 점이 있긴 하지만 그의 삼위일체론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이해는 조직신학 속의 추상적인 삼위일체론 속에 하나님이 갖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 속에서, 특별히 교회 일치의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오늘의 교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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