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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정리]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정리] 
이성호 
[20세기의 신학을 바르트가 열었다면, 21세기의 신학은 판넨베르크가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시험 준비하다가 간단히 정리한 것을 올립니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의 되었으면 합니다] 
판넨베르크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교리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격(personal: 한국말로는 신격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고 인격을 가진 분이라면 필연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인격이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반드시 필요로 한단느 것을 의미하는데, 만약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대상, 즉 창조세계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창조이전의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뭔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도 삼위 안에서 완전한 사랑을 공유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삼위일체론만이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판넨베르크는 이제까지 한 하나님은 철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삼위 하나님은 오직 계시만으로 알 수 있다는 전통적인 명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명시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에서 삼위일체른 분명하게 가르친다면 어떻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수많은 이견들과 심지어 반론들이 교회내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삼위 일체론은 오히려 철학적이다. 
삼위 일체에 있어서 판넨베르크의 가장 큰 관심은 삼위일체의 종속적인 이해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동방신학과 서방신학 모두를 비판한다. 전통적으로 동방신학은 성부를 신성의 근원으로 보고, 서방신학은 성자와 성령을 성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 보았는데, 결국 동방신학은 종속주의로, 서방신학은 양태론의 위험으로 빠지게 된다. 
두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은 삼위간의 상호성이 부재하는 것이다. 동방신학의 경우, 성자와 성령은 신성에 있어서 성부에 의존하게 되고, 성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의 "성자 없는 성부는 성부가 될 수 없다"는 명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타나시우스의 말은 성부 역시 성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판넨베르크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역설하였듯이 삼위일체 역시 아래로부터의 삼위일체론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하려고 한다. 즉, 창세전, 영원 안에서의 성자와 성부간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위로부터), 이 세상에 인간으로 살아가셨던 인간 예수와 성부간의 관계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생애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계시가 삼위일체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판넨베르크는 예수가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간들 사이에 성부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함으로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활동을 통하여 예수는 성부로부터 신성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그야말로 양자론(adoptionistic)적인 견해로 비판받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판넨베르크는 그러한 비판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양자론과 달리 성부 역시 성자의 활동을 통하여 신성을 받기 때문이다. 즉, 성자의 활동에 있어서 일방적인 신성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reciprocal)간에 나눔이 존재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신성은 어떤 본질이 아니라 주되심이다. 그리고 이 주 되심은 단지 성자로부터 성부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전달된다. 따라서 성경의 대부분은 성자가 성부에게 순종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또한 성부가 성자에게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는 성경구절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성부의 군주됨(Monarchianism)을 인정하였는데, 이전의 군주론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성부의 군주됨이 성자와 성령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은 종종 삼신론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교리가 삼위와 그들 사이의 관계를 먼저 설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그와 같은 비판이 잘못되었다고 변증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삼위가 단순히 상호간의 복종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삼위가 먼저 존재한 다음, 상호간의 교류를 통하여 하나(한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삼위는 처음부터 상호간의 교류를 통하여 삼위인 동시에 하나됨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본질이 하나됨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 있어서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인 신학이 강하게 드러난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하나됨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본체적인 하나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됨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어떤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나 지금에 있어서도 하나됨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종말론적이 삼위일체론이 소위 말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과 판넨베르크를 구별짓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본체는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미래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한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참고 
1. 위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위로부터의 기독론: 전통적인 기독론으로 창세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기독론을 설명하는 방법. 이 방법에 따르면 성육신(신이 인간이 됨)이 기독론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판넨베르크가 제시한 기독론으로 주어진 계시로부터 기독론을 설명하는 방법. 이 방법에 따르면 부활(인간이 신이됨)이 기독론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2. 미래의 중요성 
판넨베르크는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본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도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인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신다(God does not yet exist)"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판넨베르크는 현재가 미래를 결한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결정론적이기도 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바로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왜 삼위일체론인가 
이종성 박사, 포스트모던 시대에서의 삼위일체론 조명 
지난 10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학술원 제26회 공개 세미나에서 본원 원장 이종성 박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발표 내용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힘으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고 했던 모더니즘에 위기가 온 후, 모더니즘을 초월해 새 문명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어난 운동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도 삼위일체론이 가능할 지를 검토해봐야 한다. 
I.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1.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20세기 전반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이성이 인류 역사를 크게 발전시키리라는 낙관주의는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하게 됐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했고, 하이데거는 인류가 희망이 아닌 죽음의 흑암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또 R. Scharlemann은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 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며, G.Lindbeck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에 관해 말할 때 그것은 신의 실재에 대한 언급이 아닌 신에 대한 표현 방식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서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2. 최근 신학의 공로와 과실 
19, 20세기에 논의된 정통주의, 자유주의, 근본주의, 신정통주의, 급진주의의 다섯 가지 근, 현대 신학 운동을 고찰해보자. 
1) 정통주의 
정통주의는 성서 및 초대교회의 믿음을 그대로 수용하는 신학 태도를 말한다. 
초대교회는 '예수는 메시아다', '예수는 주다','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른 말', '아름다운 것' 등의 성 
서 내용을 참고해 예수를 믿되 바르게 믿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슈스 신조 등의 신조를 통해 발표했다. 
이와 유사하게 개신교회에서도 영국교회의 Thrity Nine Articles, 스코틀랜드교회의 Scots Confession, 루터교회의 Formula of Concord, 영국 청교도들 및 장로교회의 Westminster Confession 등의 신조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신조에 포함된 내용을 믿는 것이 전통이다. 개신교회는 19세기까지 정통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다. 
2)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신앙과 신학에 대해 해석과 평가의 자유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서의 영감설과 무오성을 부인하고 기독교 교리 중 초자연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이성이 체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러한 운동은 이성시대, 경험론시대, 과학시대, 계몽시대 등의 이름으로 17세기부터 유럽의 일반 학계와 신학계를 지배하던 흐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로는 쉴라이엘맛하, 대표적 서적으로는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을 꼽을 수 있다. 
3) 근본주의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교회의 개혁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소속 보수계열 학자들이 '근본주의'라는 제하의 소책자를 수백만부 인쇄해 무료 배포했다. B. B. Warefield, R. A. Torrey, Louis Meyer 등이 주도자였다. 
여기서 시작된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해 큰 호응을 얻었다. 현재도 남침례교회, 구남장로교회, 구남감리교회 지역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다. 남침례회신학교들, Fuller Seminary, Evangelical Trinity Seminary, Talbot Seminary 등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 신학교들이다. 
근본주의는 성서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재림, 인간의 전적 타락, 이적 사건의 역사성 등을 신앙한다. 
현재 미 교회 내에서 근본주의가 보수주의 및 영성운동과 연합돼 큰 힘을 과시하고 있다. 
4) 신정통주의 
미국교회안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유럽교회안에서는 신정통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Karl Barth, Gogarten, Thurnysen, Brunner, Nygren, Aulen 등이 주도자들이다. 
그들에 따르면, 개신교 정통주의는 신의 절대성, 예수 그 
리스도의 신성과 구주성, 그리고 성서의 신언성을 강조했다는 장점을 가진 반면, 성서를 문자적,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야훼 하나님과 인류 역사의 거리를 극대화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보다 심판을 강조하고 현세를 말씀으로 개혁하고 천국화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단점을 가졌다. 
이와 같은 양면성을 신언으로 조화하고 신언으로 인생, 사 
회, 역사를 개혁하려는 것이 곧 신정통주의자들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들은 정통주의를 새롭게 이해하면서도 정통주의의 근본정신이었던 신본주의는 보수하려고 했다. 
5) 급진주의 
정통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등의 전통적 신학은 2차 대전 후 다방면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도전적 신학을 급진적 신학이라고 한다. 
(1) 신 죽음의 신학 
Altizer, Hamilton, van Buren 등은 불의한 세계 정세를 볼때 의롭고 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거나 과거 존재하셨다고 해도 지금은 죽어 없어졌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2) 정치신학 
2차 대전후 세계가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국가 간의 힘겨루기로 냉전 시대에 접어드는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도 정치적으로 연구되고 실천돼 세계 정세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흐름이 일어났다. Moltmann, Metz, Cobb, Bonino 등이 대표적인 정치신학자들이다. 
(3) Christian-Marxist Dialogue 
Niebuhr, Hromadka, Roger Garaudy, Paul Lehmann 등은 인류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같은 철학을 지닌 기독교과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해방신학 
Boff, Segundo, Gutierez, Alvez, Borion 등 중남미의 젊은 카톨릭 신학자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신학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중남미의 교회와 시민들이 미 다국적 기업, 로마천주교회, 군부독재에서 해방돼 참된 복음적 말씀에 근거해 평안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여성신학 
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본권을 남성들의 독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운동으로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들은 교회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남녀동등의 대원칙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성공회는 여성 성직자를 허락했고 개신교 교회 대다수가 여성 목사제도를 신설했다. 
R. Ruether, Chopp, Purvis, Fiorenza 등이 대표적인 여성신학자들이다. 
3. 안착지를 찾지 못한 포스트모더니즘 
이성을 통해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이 어느 정도 과학과 문명의 발달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삶의 의의, 악의 문제, 전쟁, 빈부차 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해답을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모더니즘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더 좋은 문명을 인류에게 제공해주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건설, 해결, 향상이 아닌 파괴, 혼돈, 불확실, 방향 상실만을 초래했다. 
II. 인신론과 유일신론과 삼위일체론 
1. 인신론 
고대 희랍, 로마, 바벨론 문화권의 많은 신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즉 고대인들은 인간과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을 신격화해서 섬겼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인신을 믿고 있었으며 사실 그러한 신이 실재하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신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다. 
2. 유일신론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다. 그런데 엘이나 알라를 절대자라고 한다면 그 신은 무지의 신, 실존하지 않는 신, 부정적 신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인간은 절대적인 신을 직접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다신론, 인신론, 유일신론의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해주는, 논리적으로 가장 잘 정돈된 신론이다. 
첫째, 성부이신 야웨는 절대자, 영원자, 완전자시다. 그는 창조자이자 역사와 우주의 지배지시다. 그는 의와 자비와 사랑과 선이시다. 그는 대자적인 동시에 대타적이시다. 즉, 자존자시다. 
둘째,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 및 기타 속성이 같으시다. 다만 성부의 사역을 위해 성육신해 인류구원의 사역을 맡으셨다. 그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그의 본체가 영원하시어서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은 성부와 모든 면에서 동일하시나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시작한 인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추진하신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을 보호하고 가르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적 존재양식을 택해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신다. 
5. 우리의 선택 
많은 그리스도인은 야웨 하나님만 믿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야웨 하나님을 직접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이는 상대자는 절대자를 직접 만나거나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신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자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우리는 절대자이신 야웨신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성자에게 연결시켜 주는 분은 성령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이신 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그에게로 인도해 구원의 도리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사역하신다. 
III. 기독교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 
1. 삼위일체신의 절대성 
삼위일체신은 영원자, 완전자이시고 우주 만물의 지배자이시다. 우주 만물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삼위일체신의 통치권 안에서만 존재, 활동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붕괴 
R. Webber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1950년대부터 사람들이 현대적 과학관, 철학관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전통적인 판단표준에서 이탈하면서 모더니즘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복수주의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예술과 건축에 있어 복고풍이 환영을 받기 시작하고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게 됐다. 
1990년부터는 전통과 고전에 대한 개혁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가치있는 지식은 습득할 수 없으며 보편타당한 지식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띤다. 
둘째, 세상에는 선악이 투쟁하는 이원론 밖에 없다. 
셋째, 보편타당하고 우주적 가치가 있는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넷째, 신화와 상상과 이야기와 상징만 있고 확실한 것은 없다. 그리고 보편적 진리는 없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을 상대적, 개인적, 단편적, 개혁적, 일시적이라고 하면서 보편적 진리나 우주적 통치자를 부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 현상에 지나지 않아 세계를 지배하는 우주적 원리로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극도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운동이다. 
3. 삼위일체신의 승리 
삼위일체신론이 보편타당한 신론으로 정착된 것은 450년경 작성된 Athanasius 신조를 통해서였다. 
제3조: 카톨릭 신앙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한분의 하나님과 통일 안에 계시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제4조: 그렇다고 해서 페르소나를 혼동하거나 실체를 나누지는 않는다. 
제5조: 페르소나에는 아버지의 페르소나와 아들의 페르소나와 성령의 페르소나가 따로 따로 있다. 
제10조: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성령이 영원하시다 
제11조: 그러나 세 영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원만 있다 
제17조: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주요, 아들이 주요, 성령이 주다 
제18조: 그러나 세 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주만 있다 
제27조: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면 삼위일체 안에서 통일이, 통일 안에서 삼위일체가 예배되어야 한다. 
이 신조 안에서 인간의 수적 개념과 존재론적 구조와 시간적 길이와 도덕적 질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됐다. 
4. 삼위일체신과 유일신의 대결 
기독교 진영에서는 삼위일체신과 유일신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양자의 차이점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유일신은 유대교, 이슬람교 두 종교가 신봉하는 신이다. 엘과 알라를 각각 절대자라고 하는데 절대자가 둘이라면 그 신들은 절대적 신이 아니라 상대적 신이다. 
또 절대자는 상대자가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다. 따라서 상대자인 신자들이 신자 측에서 절대자와 대화를 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모순적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에서는 인간과 신이 직접 교제하고 관계를 가질 길이 트여있다. 우리는 절대자와 동일한 본체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대자이신 야웨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셔 우리가 야웨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맺는 말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도 인류가 선택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삼위일체신을 믿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