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通涉)과 통섭(統攝)
<부제 : 학즉불고목사즉기(學卽不威牧師卽器)>
노승수 목사
최근<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에서 성균관 박사 정약용이 논어재(論語齋)에서 요강을 깨드리며 논어의 두 대목을 인용하여 강론을 펼친다.<학즉불고>와<군자불기>는 학즉불고는 학이편에, 군자불기는 위정편에 기록되어 있다. 학이편은 군자로서 배움을 위정편은 군자의 다스림의 원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목사의 배움과 그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하다.
먼저 목사의 배움과 관련하여서 학이(學而)편의 대목을 인용하여 보면, 子曰 君子 不重卽不威 學卽不固(자왈 군자 부중즉불위 학즉불고)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卽勿憚改(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군자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야만 딱딱하지 않다. 충과 신에 힘쓰되, 저만 못한 이를 벗삼지 말며, 잘못을 범하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논어가 학이를 제일에 두는 이유가 있다. 모든 도리와 원리는 배움에서 나온다. 그리고 첫머리를 학이(學而)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배움에 그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배움은 다른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 고집이 세고 완고하다. 완고함은 군자의 미덕이 될 수 없듯이, 목사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 목사의 최대의 악덕 가운데 한가지를 꼽자면 완고함이다. 정말 지켜져야 하는 원칙은 늘 흔들리고 완고하지 말아야 할 유연함에 있어서는 늘 완고함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의 무지함이다. 목사의 완고함은 배우지 않음에서 나온다. 신학의 빈곤과 신학의 부재는 결국 목회자의 완고함을 부른다.
<오직 성경>이란 개혁의 구호는 성경책만 있으면 다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성경이란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성경이 최종적인 기준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책은 필요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개혁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내 놓았을 때 그들은 소위 외경도 항상 같이 붙여서 출판하였다. 우리들은 외경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개혁가들은 그것들이 우리 신앙생활에 상당히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외경에 최고의 권위를 주는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종교개혁가들이 카톨릭 신학자보다 초대 교부들과 공의회 전통에 대해서 훨씬 해박하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초대교회의 전통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전통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이 무지가 완고함을 부른다.
목사는 자신이 속한 전통과 사도들로부터 전승된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이 설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논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오직 성경>을 그냥 성경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이 무지가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의 완고함을 만들어내고 성도들의 완고함을 만들어낸다. 배우지 않음 그 자체가 완고함이다. 교조적인 종교인은 어떻게 생기게 되는가? 배우지 않음 때문에 생긴다. 목사의 설교에 이렇다할 영적 자양분이 없는 생명없는 설교가 계속되니 교인들이 영적인 잠에 빠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오직 성경>이란 구호는 성경이 우리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원리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원리>라는 단어이다. 원리는 말그대로 근원이 되는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그 말은 성경을 그저 자의적으로 사용함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의 사상을 하나로 꿰어 냄을 의미한다. 해석과 본문 이해의 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신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기를 게을리하니 목사들이 완고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이다.
두번째로 군자불기는 군자는 일정한 쓰임새로만 쓰는 그릇과 같지 않고 자신이 가진 한 가지 재능에만 국한한 기능인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용해보면, 子曰 君子不器(자왈 군자불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자왈 학이불사 즉망 사이불학 즉태) 배우고 생각을 않으면 어둡고, 생각은 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물론 위의 두 문구는 이어지는 구절이 아니다. 설명을 위해서 일부분 발췌를 했다. 위의 군자불기를 좀더 잘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 군자불기는 학이편 다음에 위치한<위정(爲政)>편에 나온다. 위정이란 정치를 행함 곧 다스림을 행함을 의미한다. 일전에<목회는 정치이다>라는 칼럼을 쓰면서, 공자가 정치를 '近者悅 遠者來(근자열원자래)'로 설명한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목회자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기쁘고 그 소문이 나서 먼거리에서 찾아오는 것이 목회이다고 말이다. 위정이란 바른 다스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사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다스림을 실시하기 위해서 세운바 된 직원이다. 위정 곧 바르게 정치가 시행되기 위해서는<군자불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체를 아우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그 사역으로 일삼는 자이다. 당연 성도들은 다양한 색깔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묶어내는 역할이 바로 목회자의 역할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공부는 단순히 배움이 아니라 묻는 것이어야 한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는 것이 이 까닭이다. 생각은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이 또한 위태로운데, 배움이 없으면 완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와는 달리 성경은 우리를<불기(不器)>가 아니라<즉기(卽器)>라고 한다. 우리에 대해 일컫기를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롬 9:23) 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불기>의 사상을 담고 있다. 우리의 사역이 우리 자신의 행위와 경건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즉, 그릇의 쓰임은 우리 자신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를 그릇으로 낮추어 제한은 하되 그 그릇에 놀라운 영광을 담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제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군자불기>와<목사즉기>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하지 자신의 것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자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공부는 곧 다스림이요 다스림은 곧 공부이다. 이는 목회자의 공부가 통섭(通涉: interdisciplinary study)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협소하게 배워서는 안되고 여러 학문간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사상가여야 한다. 또한 동시에 그 교회를 진리의 말씀으로 다스림 즉, 통섭(統攝)해야 함을 의미한다. 통섭의 서로 다른 두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전자는 사물의 이치를 서로 통하도록 배움을 의미하고 후자는 전체를 책임있게 다스림을 의미한다. 목사가 성경에만 능하고 세상의 이치에는 둔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세상의 시류를 읽는 일에 급급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침잠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목사의 공부는 성경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 문학과 경영 등등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넓은 지식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서 세우신 직분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배움은 우리 삶의 어그러짐과 완고함을 떨어내는 것이다. 은혜가 없이는 우리 마음의 완고함은 벗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은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을 허락하셨다. 그것을 소요리문답 88문은 "말씀과 기도"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씀은 성경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좁은 의미로 말하자면 소요리문답 89문에 설명된대로 '설교된 말씀'을 가리킨다. 설교란 text로부터 context로의 이행이다. 설교에서 이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context가 text를 해석하게 해서는 안된다. 맑스의 자본론을 빌자면, 물적토대가 우리 의식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위의 것 곧 그리스도의 것이 세상의 것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가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이유이고<목사불기>곧 목사가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로교회론이 의미하는 바 (0) | 2018.02.13 |
---|---|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회관 (1) | 2018.02.13 |
대속 교리의 부패가 죄인식 및 성화적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0) | 2018.02.13 |
믿음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개혁파 성도에게 주는 유익 (0) | 2018.02.13 |
인생의 새 패러다임 (0) | 201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