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 교리의 부패가 죄인식 및 성화적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노승수 목사
불교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억겁이란 표현이 있다. 겁은 산스크리트어로 Kalpa라는 시간단위이다. 겁은 어느 정도나 되는 시간일까? 한 번의 '칼리유가'는 43만 2천년, 10번의 '칼리유가'가 지나면, 이를 '마하유가'라 하는데 이게 대략 432만년이라 한다. 다시 '마하유가'가 27번이 지난 시간을 '프랄라야'라 하고 '플랄라야'가 다시 7번이 지난 것을 '만반타라'라 하고 다시 '만반타라'가 6번 지난 시간을 '겁'이라 부른다. 허허 참... 이 허망한 시간 계산이여.... 계산해보면, 1겁은 대략 48억 9888만년이다. 다른 표현을 들자면, 둘레가 40리 높이가 40리되는 그릇에 겨자씨를 가득담고 3년에 한 알씩 가져다 다 없어지는 기간, 혹은 둘레 높이가 40리인 바위를 천사가 잠자리 날개보다 더 하늘거리는 얇은 옷으로 3년 마다 한 번 스쳐서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생이 자신의 업(카르마;Karma)를 다 씻어야 구원 받는다고 한다. 기독교 개념으로 하면 죄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사람과 인연에서 생긴 업을 씻기 위해서 출가를 하고 면벽 수행을 한다. 불교는 한 가지 면에서 정직하고 한 가지 면에서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는다. 정직한 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 어렵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억겁의 윤회를 다하여도 씻지 못하는 인생의 업(Karma)과 같은 죄짐을 스스로 질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자신의 죄에서 자유롭겠는가? 죄업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점에서 정직하다 할 것이다. 불교의 부정직은 억겁을 윤회한다 한들 결코 죄와 업을 다 씻을 수 없다는 사실, 곧 해탈과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혹이다. 사실 그들의 기도와 면벽 수행은 부질없는 짓이다. 현대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나이가 145억 가량인데, 49억년(1겁)×1억을 더한 세월을 지나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고서야 그러하다면, 과연 이 불교의 교리 가운데 구원이 있는가?
문제는 불교의 교리가 이렇게 인간의 죄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기독교 교리는 죄와 구속에 관한 교리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어떤 종교를 무론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죄에 대해 거스리시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대속 교리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대속(propitiation)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인간의 죄를 씻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 성질상 하나님에 대한 것이며, 근본적으로 대속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달래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참된 곤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이 교리의 약화는 죄에 대한 인식의 약화를 가져왔다.
현대 신학자들은 대속보다는 속죄(expiation)의 개념을 선호한다.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력을 미치는 바가 인간의 연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데 있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 일으키지 않고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인하여 죽음을 선택했고 사랑의 힘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한다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는 일종의 사랑의 모범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개념에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관념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단지 인간의 연약함을 치유하는 길에 불과하다. 사실 이 이론은 현대인의 심리적 코드와 맞고 미국 영화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구속과 희생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이런 사상의 확산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을 약화시키고 결국 사람들의 죄의식과 회심의 동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한가지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우리의 영적 대적인 마귀에게 일차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이다. 이들은 성경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귀가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세상 나라를 차지하려는 음모로 해석한다. 이 마귀의 세력에 대해 주님은 떨쳐 일어나 이들을 섬멸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결정적 문제는 하나님과 마귀의 이원적 구도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신자의 싸움이 죄와의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 그 졸개를 멸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은 그리스도인의 전투로 그린다는 점이고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정의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사상에 물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 문제와 전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근본적 패배를 맛본 마귀의 세력을 세상에서 찾아내어 그들을 섬멸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땅밟기라든지, 대적기도와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곡해한 이 신학사상에서 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과 교리의 부패는 교회의 직접적 부패로 이어진다. 이 부패로부터 교회와 우리 신앙의 근간이 회복되려면 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대속적 죽음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죄라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거스림을 화목된 관계로 바꾸기 위한 죄의 형벌과 저주를 받으시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인 것이다. 이 대속 외에 우리를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관점을 성경으로부터 회복하지 않는다면, 회개와 부흥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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