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개혁파 성도에게 주는 유익
노승수 목사
어거스틴 시대에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초기에 마니교도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마니교도들은 운명론을 믿었고 이 마니교의 사상은 당시 지중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러 펠라기우스가 나타나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일로 신학적 위기를 겪었는데요. 전기에서 그는 계속해서 운명론에 대한 거부와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의 자유에 대한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죄를 범하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지만 영적 선을 행할 수 없게 부패하였고 인간의 자유란 고작 죄를 기뻐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국면으로부터 "은혜의 교리"라 확립이 되지요. 인간의 구원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누구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다는 교리가 확립이 됩니다. 물론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가 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세의 영적 암흑기를 지나면서, 이 펠라기우스의 망령이 슬그머니 부활하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미 정죄가 되었고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가 이미 정통으로 여겨지는 상황이었기에 먼저 은혜를 받아 의를 행하게 된다는 교묘한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펠라기우스의 절반을 따른다 하여서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칭의 교리는 엄밀히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성과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칭의와 성화가 엄밀히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구원의 서정에는 성화가 칭의보다 먼저오기도 합니다. 칭의에 있어서 핵심적 개념은 전가(imputation)과 주입(infusion)이란 개념입니다. 중세의 구원 개념인 반-펠라기우스주의는<선행적 은혜>로서<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어서 그 주입된 의를 인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를 공덕으로서<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즉 구원이 우리가 공덕을 행하는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사실상 펠라기우스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의의 주입>이란 개념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칭의>편에도<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칭의의 개념입니다. 이미 앞서 설명했지만, 여기에는 전가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전가란 구원의 공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믿음에 의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개념입니다. 의에 대해서는 주입이란 개념을 철저히 반대하면서도 믿음에 대해서는 그 성질에 있어서 주입된 것으로 봅니다. 16-17세기에 믿음의 성향(habitus fidei)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영어로 habit_습관으로 번역되는 habitus는 심리적 기질이나 성향을 의미합니다. 4가지 정도로 구분이 되는데, 타고나는 기질(innata_inborn), 이식된 기질(insita_ingrafted), 노력에 의해 획득된 기질(acquisita_acquired), 그리고 주입된 기질(infusa_infused)입니다. 이식된 기질이 내 안에 뭔가 원인이 있어서 그를 통해 획득된 기질이라면, 주입된 기질은 전혀 우리 안에 원인이 없는 전적으로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추론은 로마서의 믿음에 의한 연합교리에서부터 유추된 것입니다. 칼빈이 자신의 엠블럼에서 믿음을 심장을 주님께 즉각적으로 신실하게 드린다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그 구원의 공로와 의에 믿음이란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합을 통해서 그 의가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주는 것을<칭의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타락한 인간에겐 죄를 행할 자유밖에 없다고 했던 것처럼 부르심과 중생을 통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내적 기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즈워즈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 안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적 기질은 종교적 심성과는 구분이 됩니다. 믿음은 흔히 '안경'으로 비유되는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공로를 알아보는 안경과 같습니다. 마치 망원경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별을 보는 것처럼, 현미경이 없인 볼 수 없는 미생물들을 보는 것처럼 믿음이란 안경이 없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그 공로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동의어로 보기도 합니다. 피상적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즈워즈가 거룩한 감정이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가 극도로 활성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구원의 지식을 보는 안경으로서 믿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서 율법에 대한 순종이 극도로 활성화 된 단계를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질 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또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취할 수도 없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믿음이 사랑으로 효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이미 잘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갈 5:6)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롬 5:5) 결과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성령을 필연적으로 받게 됩니다. 믿음의 참됨을 인 치시는 이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연합의 교리의 중심에도 바로 이 성령께서 계십니다.
종교 개혁적 신앙에서 우리가 거부하는 바는 결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전적으로 선물로서 베풀어지는 새로운 기질로서 믿음(엡 2:8,9)을 주입하여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공로로서 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만 여전히 있지만 그것이 마치 내게 있는 것처럼 간주하여 주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의의 징표로서 성령을 부으셨기에 신자는 반드시 영적 선행을 열매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선행이 우리의 구원의 조건은 아니로되 구원의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모두 이신칭의의 믿음의 교리 다음에 선행의 교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십계명과 같은 계명은 참으로 중생한 자만이 지킬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에 서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찬송 341장의 가사처럼 늘 하나님께 이끌리고 있는지, 이런 기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의 믿음은 가짜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받았는지, 이 확실한 체험의 증표가 없다면 아직 중생하지 못한 신자입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주입된 것이 아님으로 율법의 행위나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하면 든든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안하고 헌금을 잘하면 든든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안하다면 나는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있는 것임으로 믿음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그 공로와 위로가 그리스도께만 있음으로 늘 겸손하게 됩니다. 믿음을 견고히 붙듦으로 내가 온전히 서 있는지 자신을 날마다 살펴 시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개혁파 성도에 주는 참된 영적 유익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피고 시험해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버려진 자이다."(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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