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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장로교회론이 의미하는 바

장로교회론이 의미하는 바


노승수 목사

장로교회는 교회사적 스펙트럼에서 보면,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조직교회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재세례파들은 조직교회에 대한 부정을, 하던 시절에 특별히 이 교회론은 칼빈에 의해, 성경에서부터 추론된 것들입니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루터는 사실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우스부르그회의의 성격은 원래가 일치를 위한 회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의 결렬과 루터의 죽음은 더 이상 신학적으로 카톨릭과 일치를 볼 수 없음을 의미했고, 따라서 분명한 교회론이 칼빈에겐 필요했습니다. 당시 교회론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카톨릭 때문만은 아닙니다. 카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재세례파는 기존의 모든 권위를 다 무시해버리려는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대로 '오직 성경'이란 구호는 성경만 있으면 다 된다가 아니라 '성경이 최종적 권위이다'는 의미입니다. 재세례파의 신학은 마치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이었던 마르시온처럼 자의적 기준에 의해서 성경이 자증하는 바 그 성경됨을 부정하는 이단과 같았습니다. 장로교회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직원인 사제들이 절대 무상의 권위를 지니는 체제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장로교회의 표지는<말씀, 성례, 치리>로 요약됩니다. 이 세가지 표지는 한마디로 말해<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앵무새처럼 이것을 장로교회의 표지로 외우고 그렇게 말하지만 기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응당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치리 역시 말씀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니, 역시 말씀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즉, 장로교회의 표지는 그냥 말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바른 시행 곧 바른 해석과 그에 따른 지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이자 청교도였던 사무엘 러더포드는 Lex Rex라는 책을 섰습니다. 이는<법이 곧 왕이라>는 말입니다. 임금이라 하더라도 법위에서 무상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고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상인데, 이는 장로교회가 어떤<국가관>과<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왜 신앙고백서들과 요리문답과 신조들이 그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도 이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교리란 장로교회에서 그냥 공교하게 만들어 낸 사람들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헌법에는 항상 이 교리가 핵심으로 들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교황의 무오>를 주장하는 카톨릭과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카톨릭 체제는 직분자가 성경 위에 서 있어서 성경을 결정한 것도, 참 교회라 일컬어지는<사제들>의 결정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경의 결정 과정을 보면, 이는 교회가 그것을 정경으로 결정한 것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보다 높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바를 교회는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로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받드는 기구(Institution)로서 교회를 의미하고 그래서<위로부터의 교회론>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단어는 바로<기구>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재세례파 교회론과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는 카톨릭처럼 교회라는 기구의 직원이 성경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카톨릭 신자들이나 사제들이 펄펄 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제들의 머리인 교황이 무오하고 그가 참교회이며, 그에 의해 정경 및 교리가 결정되는 구조이니 이 비판이 그르다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셔야 할 사실은 장로교회가 카톨릭이 말하는 바 교회의 기구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요 터라고(딤전 3:15) 할 때, 감독(목사와 장로)과 집사의 직분론 끝에 이 말씀을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진리를 파수하고 이단사설로부터 양무리를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를 지키며 교인들이 범죄함으로 교회가 순결을 더럽힐 때, 이로부터 순결을 지키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담당하는 이가 바로 교회의 직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론에서 직분론이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고, 가정교회가 얼마나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론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일은 양무리들이 할 수 없는 일이며, 성경이 지지하는 바도 아닙니다. 재세례파의 교회관의 결정적 문제는 바로 이부분입니다. 이들을 전통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교회의 역사성을 부인하며, 개혁을 근본적인 뿌리부터 파내어 바꾸는 혁명으로 이해하는 까닭에 교회의 기구적 성격을 부인하고 회중 자체를 교회로 보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국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대단히 개혁적이며 건강한 목회를 하신다는 분치고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교회다는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안하시는 목사님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회중을 교회로 보는 관점의 심각한 문제점은 진리를 제대로 파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이단에 대한 대응은 개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대체로 노회의 헌의를 따라 총회의 결의로 이뤄지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이단들이 대체로 침례교회의 이름을 사용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침례교회는 근본적으로 회중주의를 지향하다보니, 노회 차원에서 이단에 대한 대응이 없고 모든 권위가 개교회에만 있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 침례교회와 재세례파는 다르고, 회중주의적 요소는 장로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미국으로 건넌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의 한 명인, 존 코튼은 대표적인 회중주의적 장로교 목사입니다. 장로교 헌번 제 1 조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를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줄기차게 주장한 존 나이 역시 회중주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로교회 교회론과 정치가 카톨릭화하는 것에 대한 경계이지 근본적으로 교회의 말씀을 선포하고 치리를 행하는 기구적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장로교회는 교회를 정의할 때,<기구>라 정의를 합니다. 즉,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바로<치리회>의 구성에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처한 교회 정치 현실에서도 그대로 들어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개척 교회>는 장로교회론으로 보면, 성립이 안되는 말입니다. 그냥<기도처>정도가 적당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개척교회에는 아직<치리회>가 구성되지 않았음으로 인해 교회로서 제대로 된 말씀의 지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는 성도의 무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말씀의 순결>을 사수할<기구>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기 기구는 앞서 말씀드린대로<직분제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첫번째 신학적 원리는 모든 권위가 치리회로부터 나온다는데 있습니다.<치리회>가 조직된 교회가 정상적 교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회가 조직되지 않으면 아직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통치가 행하질 기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단순히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이 바르게 지켜지도록 하는<기구>라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목사만 있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권위의 구조가 목사 개인으로부터 혹은 그의 직분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로교회의 정치적 구조입니다. 정상적인 조직교회는<치리회>의 구성으로 말미암아 교회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보면, 바울을 복음을 전한 지역에 오래지 않다 바로 그들을 다스릴 장로를 세우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치리회>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질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선언 한 내용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모든 성도는 이 치리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도 받아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교회에 직원들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바로<목사와 장로와 집사>입니다. 특히나 당회의 성원인<목사와 장로>에 의해서 이루어진<장로회>인 당회를 통해서 교회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곧 장로교회의 회원, 세례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치리에 대한 순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순복에는 목사회원과 장로회원도 다 포함이 됩니다. 이미 앞서 설명드린대로 Lex Rex 즉, 하나님의 말씀이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지배, 말씀의 지배가 이뤄지는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치리권에 대한 직임자들의 권세에 관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85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직임자들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그들의 훈계마저 거부한다면, 그 직임자들은 그러한 자에게 성례참여를 금지시킴으로써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 참다운 회개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해 보이면 그리스도와 그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교회의 순결을 위한 조치는 교회의 교회됨을 가름하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이를 장로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바른 시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와같은 치리권의 행사는 목사 개인에게 주어진 권세가 아니라<치리회>를 통해서 주어진 권한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직임을 맡은<직분자>는 회중에게 의해 선출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이는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식입니다. 장로교회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 뜻을 회중들에게 나타내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이 이해하는 바<사제주의>와 장로교회의<기구>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사제주의>는 권위가<사제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는 것이라면,<기구>로서 교회를 섬기는 직분으로서 목사는 그 권위가 목사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기구 그 자체>곧<치리회 그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이 치리회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 교회를 말씀으로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회원의 경우, 개교회 회원에 의해 결정되지 않지만, 역시 노회라는<장로들의 무리>를 통해 그에게 목사로서 직임을 수행할 은사가 있는지를 회중에게 물어 그를 안수하여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라 하더라도 개교회에서 위임된 목사가 되려면 역시 개교회 회중의 2/3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것은<장로와 집사>의 선출 방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더 생각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의 경우, 그 소속이 노회임으로 그가 임지를 떠나 무임상태가 되어도 목사의 직임이 유지되는 반면,<장로와 집사>는 그 소속이 개교회임으로 인해, 그가 임지를 떠나게 되면 시무가 사면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역시 장로교회론의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로회원의 경우 목사의 설교를 살피는 개교회의 직분자로서 노회에 지도와 감독을 받는 회원이라 그 위치가 특이합니다. 노회가 그 자격을 검증하고 개교회가 세우는 직분자입니다. 이에 비해 집사의 경우 개교회를 섬기는 직분자이고, 목사의 경우, 노회에 소속된 직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목사들이 이 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제가 목사가 될 때, 선배 목사님 중에 한분이 권면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목사는 항상 세가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항상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항상 이사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둘째 이사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오래도록 지나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한국장로교회 초기 독노회의 여러 기록들을 보면, 담임 목사를 하다가도 노회가 요구하여서 다른 임지로 옮기거나 제주도로 선교사로간 경우들이 있습니다. 독노회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들은 목사의 소속이 개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노회의 회원이고 그 부르심과 명에 따라 얼마든지 임지를 옮길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이런 부르심에는 개교회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보듯이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유능한 교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보내도록 하신 것처럼 목사회원은 근본적으로 교사로서의 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흔히<개교회주의>라고 할 때, 이런 전통의 상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장로교회에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와 치리라고 할 때, 이것이 노회에도 동일하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노회 역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회는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의 모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노회가 행정적 절차를 처리하는 행정기관정도로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노회의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SFC에 매달 순례예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교회 학생회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신을 떠나와서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신앙고백하듯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한다면, 공교회적 전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노회에 무관심하거나 노회를 휘두르거나 하는 것은 모두 장로교 정신에 반하는<개교회주의>라 할 것입니다. 
장로와 집사의 경우는 개교회를 섬기며 돌아보되 특별히 장로는 개교회에 파송되어 온 목사의 신학과 설교를 검증하는 회원이며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이 회중 전체에 고르게 퍼지도록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직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가 노회의 회원이 되는 것 역시 개교회와 노회의 연관성을 위한 신학적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노회의 회원이되 그 소속이 개교회이고 목사는 개교회를 섬기되 그 소속이 노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도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만 국한하여서 이기적 행태를 보일 것이 아니라 보다 큰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교회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현재의 모습은 목사만 기형적으로 강조되고 장로와 집사의 직분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부디 한국교회에 바른 장로교회관이 회복되길 열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