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가 아닌 성도? 그들은 사역자인가?
노승수 목사
한국 교회에 평신도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80년대 후반 강남 대형 교회에서 나온 제자훈련 교제 [평신도를 깨운다]가 출판되면서부터 아마도 목사 아닌 장로나 집사와 같은 성도들을 평신도라고 호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잠자던 교회의 성도들을 깨우는 신선한 바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90년대 한국 교회를 깨우는 대표적 기폭제가 있다면 이 책과 훈련이지 않았을까싶다. 이후 한국 교회에는 성도들의 활발한 교회 참여를 촉진하는 각종 세미나의 붐을 이루었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평신도'(平信徒)의 사전적 의미는 "교직(敎職)을 가지지 않은 일반 신자(信者)"를 지칭한다. 원래 이 표현은 로마카톨릭적 색책를 강하게 띤 표현이다. 그들 교회에서는 사제는 평신도와 구분되는 직제이기 때문이다. 원래 그들은 사제들을 가르치는 교회로 일반신자들을 배우는 교회로 구분하고 참교회는 가르치는 교회 곧 사제단이라고 구분한다. 이런 까닭에 개신교회 특히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아주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리상 목사 역시 성도이기 때문이고, 직제상 안수하여 세우는 장로와 집사 역시 성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장로교 헌법들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교회가 지상에 있는 동안 항상 존재하는 항존직으로 설명하며, 동시에 이 세 직분은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며, 본인의 은사에 따라, 그리고 부르심에 따라 세워지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현재 장로 피택은 통상적으로 안수 집사들 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헌법에 보면 30세 이상의 남자 세례 교인이면 누구든지 장로의 피택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암묵적으로 안수 집사들 중에서 장로를 피택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고, 그 결과 집사, 장로, 목사라는 삼직이 마치 수직적 구조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만약 그 부르심이 대단히 성경적 결정이라면, 집사로 부름 받은 자는 집사로, 장로로 부름 받은 자는 장로로 평생을 섬기는 것이 옳아 보인다. 물론 경우에 따라 하나님이 다른 은사를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륜 가운데 사람들을 훈련하시는 과정으로 여러번의 직분을 받는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롬 11:29) 말씀에 의거할 때, 한 직분으로 평생을 섬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또한 이 일이 한국교회에 중요한 까닭은 이래야 현재의 위계적 구조로 이해되는 삼직 곧 목사, 장로, 집사의 직이 위계적 질서가 아니라 임무적 질서라는 사실을 문화적으로 체감하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현재의 성도들이 교회에서 암묵적으로 이런 위계적 구조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용인하고 있다.
게다가 평신도라는 용어가 등장함으로 목사는 이 두가지 직분 곧 장로와 집사와도 구별되는 성직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게 되었다. 교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를 제외한 장로와 집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게 되고, 사전적 의미를 밀어내고 신종 어휘로 자리를 잡았다. 목사는 원래부터 사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의 개인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의해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제 2 스위스 신앙고백). 장로의 의무는 목사가 성경과 우리의 신앙고백에 맞는 바른 설교를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며, 집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가 교회 곳곳에 두루 미치는 지를 살펴 그렇지 못한 것이 없도록 보살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삼직은 맡은 바 임무가 다른 것이지 다 같이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하는 직원이며 이 직원들 간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신도라는 표현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이 단어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사제주의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야기하는 문제는 이런 사고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대표적인 유행이 [가정교회]를 포함한 셀교회들이다. 말씀을 증거하는 직분을 위해 목사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 속에선 평신도의 의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목사를 특별한 직분으로 보고 그 권위에 대한 반감을 내포하고 있다. 셀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제 2의 종교개혁을 주장하면서, 제 1의 종교개혁이 성경을 성도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면 제 2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평신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사와 평신도라는 표현 속에는 목사의 권위에 대한 반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제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평신도주의를 불러 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라고 증거한다. 교회 안에는 '평신도'가 아닌 성도만 있을 뿐이다. 교회는 목사가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공동체이다. 목사는단지 그 말씀을 수종드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 역시 그 권위 아래 스스로 순복해야 하며, 교회에서 권위 있는 것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평신도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교회는 2000년 넘게 고백해온 신앙고백이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의 역사와 성경의 내용과 신학적 사고에 관한 전문적 훈련을 받은 목회자가 그래서 필요하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마치 이전까지의 의학적 훈련들을 다 무시하고 새롭게 의술의 지평을 넓히겠다고 도전하는 철없는 의학도나 진배가 없다. 의사가 사람과 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듯이 목사 역시 성경과 교회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전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바른 신앙과 인격으로 교회 공동체에 검증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분별한 평신도주의는 그저 사제주의나 목사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의 발로이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라는 용어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와 같은 정신적 패러다임의 통제와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평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자로서 성도만이 존재한다. 그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해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교회에 세우셨고, 그들의 평균케 하는 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온전하여 지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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