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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설교학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1)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1) 
(1)구약의 낙관적 평강타령과 신약의 낙관적 비전타령. 
설교의 원천은 성경이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과 설교의 목적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설교는 인생의 꿈과 인생의 부요, 인생의 성공을 향하고 있다. 이런 설교의 마지막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 영화가 아침 안개의 사라짐과 같고, 떨어지는 꽃의 쇠잔함과 같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구약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복음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은 인생 성공의 지침서가 아니라 율법의 영원한 본질을 해석한 것이다. 
오늘날의 설교는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인생이 되다보니 그 목적을 향한 설교의 내용 또한 인생의 교훈이라는 형형색색의 벽지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인생의 교훈, 즉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아래 인생의 부요와 성공의 꿈을 꾸는 백성들의 구미에 아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성공예화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예화는 예수님의 비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의 비유는 택한 자들에게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베푸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0~13). 
그러나 오늘의 성공예화는 설교를 듣는 모든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푸신 비유와 오늘날 설교자들의 예화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오늘 설교자들은 자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기가 읽은 성경에 집어넣거나 아니면 자기가 사용하고 싶은 예화를 확증시키기 위해, 혹은 자기가 설교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시키기 위해 성경 한 구절을 끄집어낸다. 그래서 그 성경본문의 문맥적, 문법적, 역사적, 교리적 바탕을 무시한 채 본문을 해석한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억지로 푸는 죄악이다.
바른 설교는 (1)교리 (2)해석 (3)적용의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는 설교의 순서는 교리 대신 인생문제, 교리해석 대신에 성공예화, 그 다음은 교리의 삶에의 적용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확신이고 신념이다. 이와 같은 성공예화는 허탄한 이야기들로서 종국에는 허탄한 신화가 되어 교인들의 헛된 인생의 꿈에 불을 붙인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 안에 나타날 다른 복음의 길과 거짓 선지자의 길을 예언하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그렇다. 오늘날 교인들이 성공예화를 설파하는 거짓 목자들의 다른 복음을 추종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성령의 소욕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하 사건을 세례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2). 반면에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생들은 이 홍해 도하 사건을 인생문제 해결의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홍해도하 사건을 사업문제, 취업문제, 진학문제, 물질문제 해결로 적용한다. 그러면서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틀림없는 문제해결을 호언장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신약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이들의 가르침이 바로 구약 거짓 선지자들의 낙관적 평강타령(렘6:14;14:13; 겔13:10,16)의 계보를 계승한 신약의 낙관적 꿈타령, 비전타령, 복타령이다. 
홍해 도하 사건을 세례의 문제로 해석한 사도 바울 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죄악 된 과거의 구습을 좇는 우리 옛사람의 죽음을 일치시키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새 생명 안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좇는 새 사람을 입어가는 성화의 과정으로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문제와 관련된 낙관적 축복타령, 승리타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받은 자의 책임 있는 삶에 대한 명령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구원받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 일괄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경 해석이 오로지 죄인 구속이라는 구속 교리에 기초한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에서 구속받은 우리들에게는 새 생명 안에서 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1-4). 
구약의 역사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즉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하여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경고를 발하지 못한 몰각한 목자들(사56:11)인 평강타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미 3:5). 그들은 늘 선민 된 특권타령을 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은 민족이요, 축복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그래서 어떤 대적이 와도 승리할 수 있다.”고 외쳤다. 바로 이것이 구약 거짓 선지자들의 낙관적 평강타령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낙관적 평강타령은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요, 축복 받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요, 그래서 어떤 인생의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고, 어떤 인생의 꿈도 이룰 수 있고, 어떤 인생의 실패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떠한 경우에도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설교의 역할 
오늘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직시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적 문제는 인생의 실패와 성공, 가난과 부요, 꿈과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과연 처음 사랑의 뜨거움이 있는가 없는가’(계2:4-5)이며, ‘비록 내가 살았다 하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행위의 온전한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계3:1-3)이며, ‘나는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미지근한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눈먼 자, 벌거벗은 자, 가난한 자, 가련한 자가 아닌가’(계3:17-18)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부자 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가난과 실패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감사를 잃지 않고, 기쁨을 잃지 않고, 소망을 잃지 않고 과부의 두 렙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처음사랑의 행위는 우리가 결실해야 할 행위의 열매는, 부자 되고 성공하는 꿈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잠시 잠깐 후면 떨어지는 꽃의 쇠잔함 같은 인생의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행2:43-47) 속에 있다. 
사도행전 2:43-47에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형제애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신의 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행사성 초청 잔치와 다과 제공은 있지만 1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가난한 형제교회에는 쌀 한 가마니도 보내주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일 한 시간 외에는 성전에 모이기를 폐하였고, 일부 교인들이 새벽기도, 철야기도, 구역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적으로 성전에 모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곳은 세상 만복을 소원하는 기도의 도량(?)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임 속에는 갇힌 자를 동정하고 비방과 환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설령 자신의 삶속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산업을 빼앗기는 고난과 환난이 있어도 그것을 기쁘게 당하며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재림의 주를 대망하는 기쁨이(히10:32-37)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남편 직장 이야기, 사업 이야기, 결혼 이야기, 물가 이야기, 교육비 이야기 등등이 난무하고 자신의 직감을 성령의 음성으로 과대 포장하여 간증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집에서 오로지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삶이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텔레비전 시청에 여념이 없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지만, 오늘 우리는 비난을 면하기도 숨 가쁘다. 사도행전 2:43-47의 모습이 바로 교인이 꿈꾸어야 할 모습이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다. 이와 같은 본질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고, 이와 같은 본질을 향하여 달음박질하도록 훈계하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제시하는 비전이 사도행전 2:43-47의 비전이 아니라면, 그리고 목회자가 세우고자 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 2:43-47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속화된 비전이다.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고 욕망이다. 
사도행전 2:43-47의 모습 속에 처음사랑의 본질이 있고, 결실해야 할 행위의 열매가 있고, 뜨거워져야 할 신앙의 삶이 있다. 초대교회 역사는 부자 되고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과 형통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영향력이 없었음에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다(살전1:2-10).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들었던 아름다운 칭송 위에 교회는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해 나갔다.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판단을 가지고 성경을 준거로 백성들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실패와 성공, 꿈과 영향력에 집착하는 교인들을 세상의 기적적 부를 이룬 자들의 성공의 예화를 가지고 위로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어리석은 교인들은 이들의 거짓된 위로와 평강타령의 이야기를 즐겨하며 그들의 축복권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렘 5:31). 
(3)헛된 권위에 복종하는 어리석은 교인들 
어떤 고관대작 부인이 있었다. 이 여인에게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어디에든지 기사를 대동하고 위풍당당하게 음식점을 출입하고 백화점을 출입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무서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신기하게도 이 여인의 남편의 승진과 출세를 예언했던 무당이었다. 그런데 정권의 격변기에 남편의 입지가 불안해 졌다. 그래서 그 족집게 무당을 다시 찾아 갔다. 기고만장하여 교만했던 그녀의 눈과 목은 이 무당 앞에서 한 없이 낮아지고, 꺾여졌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이 여인이 남편의 미래를 예언하는 무당 앞에서 학식이고 재력이고 빽이고 상관 없이 모든 세상의 교만했던 눈을 낮추고 목을 꺾고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학력을 따져 봐도 이 무당보다 못할 것이 없고, 재력을 따져 봐도 이 무당보다 못할 것이 없고, 배경을 따져 봐도 이 무당보다 못할 것이 없었지만 이 무당이 오로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남편 미래의 축복 권을 혹시나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앞뒤 가릴 것 없이 공포와 두려운 마음으로 이 무당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이제 무당이 여인을 향하여 간결하고 짧은 한 마디의 말을 던졌다. “오백만 원 내시게!”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단 돈 일만 원도 지출하기를 아까워했던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백만 원 수표 다섯 장을 내고 부적 한 장을 받아 갔다. 
오늘날 거짓된 평강타령의 목자들이 교인의 인생의 미래의 축복권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어리석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바로 이들이 강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신종 무당들이다. 이들의 권위 앞에 어리석은 교인들은 한 없이 겸손해 진다. 그리고 한없는 존경을 보낸다. 
(4)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 
신학에는 세 가지의 흐름이 있어 왔다. 말씀을 도외시한 성령사역에만 초점을 둔 신비주의자들과 성령을 말씀의 보조수단으로 생각한 말씀 우위의 루터주의자들과 말씀을 수단으로 하는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씀과 함께, 말씀과 더불어’를 주장한 개혁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두고, 체험과 경험 위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말씀과 함께하고,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던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개혁주의는 말씀과 함께하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와 있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계2:7,11,17,29; 3:6,13,22)가장 개혁주의적인 설교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와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인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본질을 잘 분석해보면 목회자가 설교의 주제로 무엇을 삼아야 하며, 어떤 설교를 해야 하며, 설교는 무엇을 목적해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이 제시되어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교회 부흥에 역점을 둔 목회자들에게는 계시록 2장과 3장이 증거하는 말씀은 사실상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설교의 본질이지마, 그러나 분명히 계시록 2장과 3장의 내용이 교회의 목자들에게 보내진 편지로서(계2:1,8,12,18; 3:1,7,14)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단서가 붙여진 것을 볼 때, 목회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경계룰 제시하고 제시하고 있다. 
이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설교학적 입장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은 것이 아니라, 목회자로부터 칭찬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교회 안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으므로 교회의 순결을 지켰고,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여 추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교리의 본질을 지켜내었으며,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신앙의 헌신이(계2:2-3) 있었다. 이쯤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는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가? 
먼저 성령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교인들이 꿈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교인들의 마인드가 긍정적인가 아닌가를 살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처음사랑의 행위가 있는가 없는가(계2:4)를 살피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처음사람의 행위가 없다면 촛대가 옮겨질 것이라고(계2:5) 경고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여! 주여! 하는 에베소 교회 교인 모두가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들 즉, 처음사랑의 행위를 회복한 자들만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약속을(계2:7) 위로의 말씀과 소망의 축복으로 전하라고 하셨다. 
에베소 교인들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분별력과 헌신 가운데 처음사랑의 행위를 뜨겁게 회복해야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처음사랑의 행위는 고사하고 주님으로부터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진리를 분별하는 분별력과 주님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신앙의 헌신에 대해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처음사랑의 행위는 일주일에 하루 전도지 돌리고, 새벽기도 몇 번 나오고, 철야기도 몇 번 참석하고, 이것저것 다 떼고 도적질한 몇 푼의 십일조를 드리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사도행전 2:43-47의 삶이다. 이 삶이 바로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처음사랑이다. 이 삶의 한 가운데에는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랑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처음사랑의 행위는 고사하고, 행위와 수고와 인내에 있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기 힘든 주여! 주여! 하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없다는 경고를 하기는커녕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이다!”라고 아부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사랑받은 사람이다!”라고 위로하고 있으며, “꿈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호헌 장담하고 있다. 자동차 영업소에 가도, 보험 영업소에 가도 적혀있는 “꿈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어떻게 땅의 것을 쳐다보지 않고 위에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골3:1-4) 신앙인들의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2002년 월드컵 경기장 현수막에 적혀 있었던 이와 같은 구호가 어떻게 땅의 것을 버리고 천국길을 힘써 달려가야 하는 신앙인의 믿음의 선한 싸움의 목적지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자동차 영업소도 아니며, 보험 영업소도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경주는 월드컵 16강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생명나무 과실의 소망, 즉 보이지는 않지만 장차 나타날 영원하고도 중한 영광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잠시 잠깐의 인생의 꿈의 실현을 약속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설교들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설교를 하는 목사를 과연 주의 말씀을 대변하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전한 것이며,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헛된 평강을 외친 것이며, 종국에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할 주여! 주여! 하는 교인들을 구원받은 천국백성이라고 사기를 친 몰각한 목자인 것이다. 
2008.9.25. 제4호 4면 Ci 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