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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설교학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7)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7) 
- 마지막 회 -
목회자는 방종의 신앙인들에게 꿈꾸는 믿음 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온전하여지는 믿음의 삶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입술의 믿음과 열매 맺는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을 평가하시는 신체 부위는 입술 부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가식의 신앙을 신물 나게 많이 보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기원전 1440년 경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로 다윗의 직계 혈통인 남 유다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심판받았던 시간까지 무려 900년 동안, 그리고 다시 기원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폐허가 되어버리기 까지 1500년 동안, 구약 이스라엘은 입으로만 하나님께 아부하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찾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입으로 하나님께 아부하고 입술로 하나님께 입맞춤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얄팍한 입술로 “하나님께서 저의 꿈을 이루어주실 줄 믿기에 저는 지금도 무조건 제 꿈을 긍정적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므로 능력 많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긍정의 믿음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아부성 협박을 한다. 입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존경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1500년 동안도 모른 척하고 참아주신 하나님께서 기껏해야 100년도 안 되는 긍정의 입술을 못 본 해 주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입술뿐인 신앙을 1500년 동안이나 참아주신 하나님이시기에, 100년도 안 되는 긍정의 입술을 참아주신다고 해서 그들의 긍정적 믿음을 칭찬하시고 계신 것을 절대로 아니다. 
입으로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겠습니다.”도 아니고 입술로 “나는 하나님을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도 아닌, 속이 훤히 보이는 얄팍한 입술로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는 아부성 협박의 간사한 혀를 과연 용납하시겠는가? 
지금 교회 세대에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더 큰 성취를 이루기 위한 긍정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나의 포도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없으며, 나의 밭에 소출이 하나도 없으며, 나의 외양간에 소 울음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으며, 나의 우리에 양이 한 마리 없어도 구원의 한 분 하나님만을 인하여 즐거워하는(합 3:17-18) 불굴의 믿음이다. 
이 불굴의 믿음을 통하여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의지한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매 맺는 구원의 좁은 길을 달려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꿈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매 맺는 삶이다. 
(2) 신앙의 부요(富饒)한 자로 착각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주님으로부터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책망(계 3:17)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신앙의 부요한 자로 자처하였던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처럼 오늘날 긍정적 사고와 꿈을 이야기 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스스로를 신앙의 부요한 자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는 것은 그들이 옷을 사 입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빈곤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눈멀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벗었음을 보지 못하는 비극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벌거벗은 신앙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입어야 했던 옷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의 온전한 열매를 상징하는 흰 옷(계 3:2,4)이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이다(계 19:8). 이처럼 성경은 옷을 성도들의 행함의 삶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행위의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여 책망을 받았던 이름뿐인 사데 교회 교인들은 더러워진 옷이라도 걸치고 있었으나(계 3:1-2,4)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 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신앙의 수준과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신앙이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컸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벌거벗었다는 것은 행위의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행위의 열매 자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신앙의 부요한 자로 자처하며 방종의 교만에 빠져 있었으니 그들의 영적 상태를 가히 짐작할만하다. 
신앙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 신앙의 눈 멈과 신앙의 벌거벗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가장 비극적이며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었음을 발견하고, 즉 하나님의 말씀, 곧 선악과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않은 자신들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를 보고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지만,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악 된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스스로 신앙의 부요한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영적 수준은 정신병자와 다름이 없었다. 
(3) 벌거벗은 신앙의 라오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야 할 설교 
그들을 치료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서 목회자들을 어떤 처방을 제시해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세례요한의 외침은 분명한 설교의 기준이 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초대교회 성도들이 결실했던 처음 사랑의 행위(행 2:44-47)의 십분의 일도 결실하지 못한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게으르며, 탐욕스러우면서도 스스로를 신앙의 부요한 자로 자처하는 꿈의 술에 취한 교인들에게 과연 성령을 덧입은 목회자라면 어떤 설교를 해야 되는 것인가? 당연히 그 기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계 2:7,11,17,29; 3:6,13,22).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꿈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희망 설교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에베소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서머나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버가모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두아디라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사데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대로 처음 사랑의 행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행위의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차지도 덥지도 않으면, 거짓 선지자와 그들의 잘못된 교훈을 용납하면 이기는 자가 받을 일곱 가지의 축복(계 2:7,10,17,26-27; 3:5,12,21)에 절대로 동참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방종의 신앙인들에게 꿈꾸는 믿음 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온전하여지는 믿음의 삶을 가르쳐야 한다(약 2:22).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약 2:14,17). 
(4) 참 선지자의 설교 주제와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 주제 
구약에서 참된 선지자들은 항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였고, 또한 그들이 백성에게 제시했던 궁극적 소망은 오로지 약속의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였다. 그러나 평강타령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특권 의식에 고무되어 있는 방종한 백성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항상 복 받는 법을 가르치며 평강타령(겔 3:16)을 외쳤고, 그들이 백성에게 가르쳤던 소망은 약속의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당면한 밭농사 포도농사 목축업과 관련된 인생해법이었다. 
근시안 적인 신앙관에 빠져 있었던 어리석은 백성들은 항상 당면한 인생문제의 즉각적 해법을 제시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은 열렬히 환영하였던 반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 앞에 흠도 점도 없이 나타나야 할 신앙의 본분을 가르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촉구하는 참 선지자들은 배척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평강타령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을 따라 밭농사 포도농사 목축업이 번창하는 인생의 꿈을 먹으면서 참된 선지자들이 제시한 신앙의 기준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들만의 신앙의 담을 견고하게 꿈이라는 이름으로 쌓아갔다. 
(5) 열파되고 훼멸되고 무너질 회칠한 신앙의 담과 회칠한 자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과는 상관없는 꿈이라는 이름의 신앙의 담을 쌓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신앙에 대하여 거짓 선지자들은 아부하며 백성이 꾸는 세속의 꿈에 대하여 “꿈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라며 회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쌓아올린 헛된 신앙의 단과 그들의 신앙의 담에 회칠하였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셨다.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3:10-16). 
에스겔 선지자는 이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황무지에 있는 여우들이라고 그들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정죄했다(겔 13:4). 계시록은 하늘에서 불을 끌어 내리며 땅에 소망을 둔 자들을 미혹하는 존재를 새끼 양 같은 두 뿔 가진 짐승으로 명명하고 있다(계 13:11-14). 오늘날 이 짐승 같은 평강타령의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끌어 내린 복술의 불이 여기 저기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이제 이 불길은 광야와 골방까지 타오르고 있다. 미국에서 큰 별과 같은 목자가 긍정의 힘을 설교하면 순식간에 이 불은 서울 한 복판의 모든 목회자들의 입을 달구어 버리고 급기야는 광야와 골방 같은 시골의 목회자들까지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농민들을 모아 놓고 긍정의 힘을 외친다. 
(5)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잠시 잠깐의 세속의 영광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원하고도 중한 생명의 영광이다(고후 4:17-18). 그러므로 이제 목회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사라져갈 세속의 꿈의 성취를 위해서 긍정의 힘을 가지게 할 것이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불태우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의 열매를 결실하는(딤전 6:11-12) 행함 있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세속의 꿈의 술에 취하여 벗은 줄도 모르고 스스로 신앙의 부요한 자로 자처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과 같은 오늘의 방종한 신앙의 세대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의의 흰 옷, 세마포 옷을 입히는 설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