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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설교학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 (4)
1.성경 해석의 한 원칙 
오늘날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유행하는 설교들을 성경 해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너무나도 황당한 해석들이 많이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단어나 한 두 구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협한 안목을 제거해야 한다. 이단들이나 시한부 종말론 자들, 그리고 소위 계시록을 푼다는 많은 사람들의 성경 해석을 보면 하나 같이 몇 몇 단어나, 혹은 몇 절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한 두 구절의 문장을 주시하는 편협한 안목 때문에 황당한 해석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많은 선량한 신앙인들을 미혹하여 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편협한 성경 해석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욕구를 채워 주고자 하는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본 결과 황당한 성경 해석 몇 가지가 오늘날 설교 계를 풍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들이 성경 해석의 기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을 따른 해석이다. 즉, 글의 흐름을 따르는 해석이다. 문맥 해석에는 근접 문맥 해석과 원접 문맥 해석이 있다. 근접 문맥 해석은 어떤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그 구절 가까이 있는 구절들을 종합해서 해석하는 방법이고, 원접 문맥 해석은 어떤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그 성경 구절이 포함된 단락 전체나 저자의 책 전체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 있는 한 구절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 로마서 전체를 숙지해야 하고, 혹은 바울 서신 전체를 숙지하거나 심지어 성경 전체를 숙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에서 왜곡된 몇 가지 설교의 인용 구절들은 설교 해석의 가장 기본인 근접 문맥의 법칙조차도 무시된 채, 한 구절 속의 단어 위주의 해석을 통하여 설교자의 왜곡된 신앙 가치관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말았다. 
2. 왜곡된 성경해석의 한 가지 예 : 심음의 법칙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고린도후서 9:6의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을 헌금 많이 하면 많은 물질축복을 받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맥적 차원에서 상고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헛된 신바람을 불어 넣기 위해 오로지 성경 한 구절에 집착하여 그 성경 한 구절을 자신들의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린도 후서 9:6의 말씀은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두기는 거두는데 많이 심는 자가 거두는 많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9:10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9:10에서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두게 되는 수확은 물질 축복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의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의의 열매의 예로서 고린도 후서 9:11에서 ‘사랑의 연보’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 고린도 후서 9:6에서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두게 된다.”는 것의 바른 해석은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데로 헌금을 많이 하면, 물질축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많이 가진 자, 즉, 많은 사랑을 심는 자가 많은 사랑의 열매, 즉 의의 열매를 수확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9:8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넉넉하게 하시는 이유가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성도들에게 축복하였던 “넘침”은 물질축복이나 이 세상에서의 영향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설교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넘침의 축복을 물질축복으로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기부인을 통한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국의 영광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교인들에게 심어주는 꿈은 물질과 성공의 꿈이지 영생의 꿈이 아니다. 물질과 성공은 보이는 잠시 잠깐의 영광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영생은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도 중한 영광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보이는 잠시 잠깐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인 영원한 생명의 영광,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나타날 영원하고도 중한 영광에 대해 이야기 했기에 땅에 것을 쳐다보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던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2-4)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한 거짓된 축복을 설파하는 거짓말하는 자들에 의해 더 많이 심는 것도 물질이고, 더 많이 거두는 것도 물질 축복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린도후서 9:6의 말씀을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많이 심기 위해서는, 즉 더 많이 헌금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많은 물질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꿈을 이루어 주시면 더 많이 심는 자가 되겠다고 기도한다. 그들이 꾸는 꿈은 하늘의 신령한 소망이 아니라 결국 땅의 것들, 곧 물질축복이고, 실패극복이고 성공이고 형통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9: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더 많은 의의 열매, 즉 사랑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심어야 하고, 더 많은 사랑을 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물질축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왜 성령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눅 11:9-11).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물질 문제해결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의 은사인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 그 옛날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풍성한 사랑의 연보를 심음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는 많은 형제의 삶을 부요하게 하는 의의 열매를 거두었음과 같이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많은 풍성한 사랑의 연보를 통하여 어려운 형제 교인과 어려운 형제 교회를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 된 소망의 기도는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성령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많은 물질축복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물질과 성공의 신을 예배한 것이 된다. 
3.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본질은?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7에서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였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난의 저주를 물리쳐 주시고 물질축복 허락해 주셔서 이 땅에서 부자 만들어 주시고 영향력 있는 삶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우리에게 후히 주시어 우리로 사랑의 열매 맺는 삶을 넉넉하게 누리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7에 이어 6:18-19에서 선한 사업에 부요한 자가 되어 넉넉한 영생의 터를 확보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축복은 물질축복이 아니라 사랑의 은사이며, 사랑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넉넉하게 물질축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의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에 모진 환란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풍성한 연보를 가난한 형제 교회를 위해서 드림으로 결국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풍성한 의의 열매를 결실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 땅의 넓은 아파트 평수는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넉넉한 생명의 터, 곧 영생이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더 많은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해 약간의 물질 헌금을 심는 것은 좋아하지만 장차 나타날 영원하고도 중한 생명의 터를 위해 풍성한 사랑의 헌금을 심는 데는 인색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악착같이 더 넓은 아파트 평수 분양 잔금을 맞추기 위해 필생의 땀을 쏟아 부으면서 “주여! 주여!”를 부르짖는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와 사람이 만들어 낸 설교 
두아디라 교회는 나날이 사랑의 행위가 넘쳐나는 교회였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8-19).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행위가 넘쳐난다 할지라도 그 행위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그것은 그들 가운데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는 음행의 교훈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우리의 열매 맺는 사랑의 삶 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보전하고 수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맡은 우리에게 더 큰 의무이다. 그런데 나날이 사랑의 행위가 넘쳐나지도 않는 오늘 우리 교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변질시킨 자칭 선지자인 거짓 목자들까지 용납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의 즐거움과 백성의 인기와 자신의 영광과 영향력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탐욕의 시각으로 해석을 한다. 이들은 신령한 말씀의 본질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세속의 꿈을 앉혀 놓았다
.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 자들이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욕심이 만들어 낸 인간의 교훈이다. 사람의 교훈, 사람의 계명으로 백성들을 하나님을 입으로 가까이 하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그러나 그들을 구원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의 권력을 좋게 여기고 따르고 있으니 그 결국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 5:30-31). 
2008.11.13. 제7호 10면 ci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