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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핵심감정과 세계관, 그리고 성경해석의 원리

핵심감정과 세계관, 그리고 성경해석의 원리


노승수 목사 


우리가 흔히 패러다임이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사용한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입니다. 쿤은 과학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데요. 과학의 발전 과정을 보니까 과학이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이상 현상이 관찰이 점증하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쉬프트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두 패러다임의 관계는 불가통약적, 서로 소통되는 어떤 지점이 없이 새로운 체계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천동설을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너무나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과학이죠 그런데 천동설의 누적으로 지동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지동설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설명하게 된 것이죠. 뉴톤의 역학에서 초기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후기 위치를 예측할 수 있지만 양자 세계에서는 이것을 확증 할 수 없고 그래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뉴톤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죠.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이론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현재, 진화론이나 빅뱅이론은 관측되는 여러 현상에 대해서 인간 이성에 가장 부합하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가지는 성격대로 이 이론은 어떤 새로운 관측에 의해서 얼마든지 달라지거나 폐기 될 수도 있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찰은 사실 상당 부분 이론에 의존해 있다는 점입니다. 1972년 8명의 심리학자들이 멀쩡하게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실험을 합니다. 이들은 52일간 정신병원에서 정상인으로 생활했지만 7명이 조현병으로 1명이 양극성 장애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퇴원 후 1973년 1월 "사이언스"에 논문을 한 편 게재합니다. "On Being Sane In Insane Piaces"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들의 52일 간의 정신병원 입원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는 오히려 환자들은 이들이 정상인 것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관찰은 상당부분 우리가 가진 이론에 기대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문학과 지질학 그리고 물리학, 생물학 전반에 퍼져 있는 진화론적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관찰은 진화론이라는 이론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죠. 이것을 이론부하(theory-ladenness)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이론부하적인 성격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도 주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내가 하는 신학이 순전히 성경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형적인 사이비 과학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신학도 이론부하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헬무스 아 브라켈의 저작인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에는 천동설을 옹호하는 논변이 실려 있습니다. 자신의 이론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류의 해석의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구약 곳곳에 하나님께서 하늘은 텐트처럼 치셨다는 구절입니다(시 19:4, 104:2). 이 구절에 근거해서 텐트를 치려면 땅이 평평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죠. 로마 가톨릭도 20세기 후반에 가서야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를 복권하는 재심 재판을 벌입니다. 오늘 교회는 이런 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뭐라고 하는 것에 너무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진보에 불과하며 그 이해가 곧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와 같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 성경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외계어나 주문을 계시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의 세계관을 빌어서 성경을 계시로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신적 진리가 계시된 성경에는 당시의 인간들에게 시각과 우주관이 내재해 있으며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성경은 우주를 하늘과 땅, 그리고 땅 밑 깊은 음부로 삼중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세계관이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죠. 이는 영적으로 해석되거나 혹은 당시 세계관의 은유를 통해서 신적 진리로 해석해내어야 하는 것이지 땅이 평평하다고 논증하는 것은 무식의 발로인 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에 관한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성경은 고대인의 세계관과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학자는 겸손하게 인정하고 이해의 부족을 스스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자들도 세계 이해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겸손하게 자기 이해나 이론의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신자와 신학자 역시 이 진술의 깊은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욥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마지막 계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신진화론만큼 창조과학은 더 위험합니다. 이는 브라켈의 오류의 반복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술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더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욥기 38:1-6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쓰고보니 핵심감정이야기가 없군요 ㅋㅋ 
이런 주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핵심감정_시리즈 를 공부해야 합니다. 핵심감정 공부는 진정한 의미의 위에서 설명한 #기독교세계관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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