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의 좌표
노승수 목사
아퀴나스에게서 선은 욕구의 대상이고 욕구는 결국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계 이해 체계를 자연신학이라고 하고 이성에 기초한 세계를 건설하고 아퀴나스는 자연에 내재한 하나님을 따라 최고선이신 하나님께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퀴나스의 이러한 자연신학의 문제점은 자연이 가진 인과율 안에 하나님이 묶이게 되어서 하나님의 자유나 의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아퀴나스의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게 됩니다. 그 수정의 방식은 바로 하나님의 의지에 더 신학적인 방점을 찍어서 신학체계를 새로 구성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도 이러한 유산의 일부를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이나 자유의지, 루터가 말하는 노예의지 등은 모두 이러한 후기 스콜라주의의 극단적인 주의주의의 결과물입니다. 아퀴나스가 주지주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종교개혁 직전의 스콜라신학은 극단적으로 주의주의를 관철했습니다. 이런 특징의 대표적 신학 중 하나는 잘 알려진 반-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고 그 의를 기준으로 우리의 의지의 순종을 구원의 공로로 편입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치를 채셨겠지만(못 채셨다면 신학은 포기하시는 걸로), 이에 반발한 종교개혁의 신학은 주지주의도 극단적 주의주의 신학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경적 상담을 보면 사실 그 뒤에서 후기 스콜라의 그림자가 비춘다는 것이죠.
아무튼 각설하고 루터가 노예의지를 말하는 맥락이 뭐냐면 바로 이런 극단적인 주의주의를 거부하고 우리 의지가 상당부분 우리 정서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정서에 매여 있는 의지가 바로 #핵심감정 입니다. 감정이라고 하니까 그냥 우리 욕구와 관계 없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핵심감정은 의존적인 사랑의 욕구가 좌절되고 거기서 발생한 미움을 아직 미숙한 자아가 다룰 수 없어서 증상을 동원해서 이 미움을 억압하는 습관을 만든 체계를 핵심감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신학은 어거스틴의 이런 주의주의적이나 옛 습관에 매인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의지에 기초한 신학을 구성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곧 이어 나올 #핵심감정_성화 를 참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어젯 밤에 포스팅 한대로 개신교 신학에서 선은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중세와의 주요한 변별점은 타락을 단지 원의가 부재하는 상태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의지가 이렇게 죄로 인해서 기울어진 욕구의 상태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은 이런 육적인 욕구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선은 초월의 영역에만 남아 있으며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주의를 배격하고 초월주의를 채택한 것이죠. 초월적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믿음이라는 초자연적인 습관이 필요하고 이것은 주입되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일으킴으로 최고선과 맞닿도록 합니다.
이처럼 선은 주체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의 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우리가 스스로 이성을 검토해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를 흔히 불가지론자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반쪽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을 검토할 때, 칸트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물 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 대상으로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인식의 주관적 범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확대되는데 시간과 공간은 중력이나 속도에 의해 달리 인식되는 것이죠.
그런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당위로서 하나님을 요청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개신교 윤리 체계인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하냐면 개신교에서 선은 주체의 의지가 주체 밖의 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윤리가 드러납니다. 믿음은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지향하고 초월의 영역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순종의 의에 우리가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접붙여짐으로 그 반응의 결과로서 믿음의 결실로서 사랑이 열매맺는 구조인 것이죠.
#핵심감정_시리즈 에서 언약적인 인격주체는 이런 개념입니다. 그리고 최고선을 지향하는 주체의 의지는 바로 믿음의 추동의 결과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주입된 습관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지향하면서 사랑이라는 결실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행위의 열매는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서 열매인 것입니다.
#핵심감정_성화 로 곧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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