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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기타미분류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우리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우리 
우병훈 작성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유해무 교수의 『헤르만 바빙크-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살림, 2004)를 읽고 쓴 서평이다. 본서는 바빙크를 한 사람의 신학적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단순히 서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바빙크의 생애와 사상을 아주 비평적으로 접근하면서,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긍정적, 부정적 교훈과 그의 사상에서 나타난 성경적, 사변적 측면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바빙크라는 선배와 씨름을 하면서 우리 시대의 고민을 풀어 보자고 초청하고 있다. 
바빙크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이 처한 작은 나라, 작은 교회에서도, 안목을 넓게 보고 소극적이거나 폐쇄적인 자세를 극복하면서, 특히 자기 환경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살핀 것이다. 저자는 특히 그의 신학과 삶의 자세에서 나타난 보편성을 강조한다. 자신의 신학을 특히 교회 연합과 학문 간 대화와 교육에서 적용하려 했던 바빙크가 지닌 이 공교회적 보편성 신학을 우리도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바빙크의 생애와 사상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와 연관된 그 적실한 교훈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생애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유해무 교수는 공인으로서 바빙크의 생애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그의 개인사보다는 삭막한 교회 정치의 현실 속에서의 그의 처신에 주목한다. 특히 그가 교회 연합과 신학교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는지를 자세하게 기술한다. 이에는 저자가 오늘날 처한 이 시대의 고민이 녹아있는 것 같다. E. H. 카가 말한 것처럼 역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일 수밖에 없으므로. 
바빙크, 그의 시대 
1854년 12월 13일에 태어나 1921년 7월 29일에 영면한 바빙크의 생애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시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교회에 끼친 영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를 강조하면서, 앙시앵 레짐 즉 구시대 질서 무너뜨렸다. 그런데 그 때 같이 무너진 것이 교회였다. 즉 프랑스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무너졌고, 더 나아가 유럽 전체에서는 개신교회가 넘어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오히려 환영한 기독교 무리가 있었는데, “자유 교회”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와 무관한 자유를 말한다. 19세기에 화란에서도 구시대 질서를 반영하는 국가교회의 틀을 벗어나 여러 자유 교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형식적 신앙을 요구한 국가로부터의 자유이고, 둘째 국가와 타협하는 교회로부터 자유이다. 자유교회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였는데, 통합된 교단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 전통을 이어 화란 개혁파 교회는 지역 교회가 치리권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진 국가교회적 면모들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한국 사회는 유럽처럼 기독교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형교회는 유럽의 국가교회가 가진 폐습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장로교만 해도 그 역사가 120년이 지난 지금, 고백과 투쟁과 고민에 의해 신앙을 이어가기보다, 일종의 화석화된 신앙이 만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많은 수가 교회를 떠나거나, 새로운 소그룹 형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 가치와 정치·교육의 권위 체제가 붕괴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관료화되고, 본질과 실존이 점점 괴리되어 갈 때 이에서 ‘자유’하려는 무리는 언제나 생겨나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교회들은 19세기 화란에서 생겨난 경건주의적이고 고백교회적인 모습을 띄지 않는다. 과연 그런 교회들이 향후 2-30년 후에 건전한 교회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부정적이다. 
출생과 교육 
바빙크는 바로 자유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1834년 “분리 운동”(Afscheiding)의 후예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건주의적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고, 겸손했다. 강직하고 추진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날마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기도를 훈련시켰다. 바빙크는 성격이 우유부단했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의 부모는 자녀들을 잘 가르쳤으나 교훈한 것을 직접 모범으로 많이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바빙크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최고로 지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바빙크는 당시 명문학교인 하셀만(Hasselman)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관한 정확성과 조직적 응용력을 훈련받게 되었다. 16세(1870) 때에 바빙크는 즈볼러 라틴어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3년에 마치며 고전어(희랍, 라틴)를 열심히 공부한 결과 1873년 7월 15일에 졸업시험을 라틴어, 불어, 화란어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통과했다. 당시 학문의 전당이라 일컫는 라이덴 대학(Leiden)에 진학코자 하였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약 1년 동안 캄펜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나서 1874년 레이던으로 가게 된다. 레이던은 당시 구약 비평학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바빙크는 현대주의의 선봉장 격인 교수들에게 강의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개혁신학의 노선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배운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과 교회에서의 신조교육 덕분이라 생각된다. 이곳에서 스눅 후르흐론녀를 사귀어서 평생지기가 된 것도 우리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 신학자는 친구가 있었다. 
바빙크의 신학 수업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앙 교육이란 언제나 가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신앙을 먼저 배우지 않았다면 일평생 단순한 신앙으로써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주의 학문과 더불어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고전어 숙달을 통해 기독교 역사에 자유자재로 접근하고 자료를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취급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긴 신학적 안목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빙크의 보편성은 이런 능력에서 확보되었다. 그리고 특히 보수 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빙크의 열린 모험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현대 신학과 맞섬에 있어 고립주의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바빙크와 같이 정면 대결을 통해 전통적·보수적 신학을 더욱 성숙시키는 것이 좋은 태도이다. 
박사, 목사, 캄펀 신학교수로서의 생활 
1880년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츠빙글리의 윤리학』(De ethiek van Ulrich Zwingli)이었다. 그는 칼빈이 도덕적인 것을 기독교적인 것에만 국한하였다면, 츠빙글리는 기독교적인 것을 도덕적인 것에까지 확대하였다고 보았다. 이 논문은 츠빙글리를 아주 좋게 평가하는데, 이후에 바빙크는 그 어떤 글에서도 그때만큼 그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칼빈의 입장을 더 따르게 된다. 학위를 마친 해 6월에 캄펀에 신학 졸업 시험을 치렀고, 1881년 3월 13일에 아버지 얀의 주관 하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프라너커에서 약 2년간 목회를 하면서 그는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고, 성도의 교제와 목회적 실천을 통해 교회를 배우게 되었다. 
바빙크는 캄펀 신학교가 개교한 지 1주일 만에 태어났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바빙크는 캄펀 신학교에서 1883년 1월 3일 2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 취임 강의를 한 것을 시작으로, 1902년 12월 9일 고별강의를 하기까지 20년을 가르쳤다. 캄펀 신학교에서 그의 대작 『개혁교의학』 4부작을 1895, 1897, 1898, 1901년에 걸쳐 완성했고, 말년 좀 더 구체적으로 1913년에 그는 교의학 서적들을 모두 처분하고, 교육학과 철학에 전념한 것을 볼 때에, 그의 신학의 성숙과 완성은 이 캄펀 신학교에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자유대학에서 가르친 업적도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 아무래도 말년의 그의 강의는 이전만큼은 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바빙크의 정치적 활동으로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일은 1892년 6월 17일에 이뤄진 분리측(Afscheiding)과 애통측(Doleantie)의 합동 운동에의 기여이다. 이 연합된 교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이다. 이 교회는 지역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인정하고, 당회만이 치리권을 가지게 하고, 이를 모든 정치의 기초로 삼았다. 상회와 하회라는 개념이 없고, 연합 모임은 임시적이다. 
바빙크의 신학적 업적은 자유주의적인 레이던에서도 보다 보수적인 캄펜에서도 동시에 인정받는 탁월성을 보인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 간에 너무 대화가 없는 교회·신학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보다 공교회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열심히 노력하여 바빙크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의 교회정치 제도를 벌코프가 자신의 교의학에서 소개하는데, 한국에서도 박형룡 박사(『교회론』, 150)와 박윤선 박사(『개혁주의 교리학』, 397f)가 공히 이 제도를 모범으로 삼고 있다. 만일 이런 교회정치 제도를 한국 장로교가 도입했더라면 오늘날 만연한 교권주의의 병폐는 많은 부분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회 연합 시도와 좌절, 자유대학 교수 시절 
그런데 합동된 교회는 양 신학교육기관(캄펀 신학교와 자유대학 신학부)의 통합을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바빙크는 신학교를 대학 신학부와 합치고자 하였으나 그의 뜻은 좌절되었다. 이 문제는 10년을 넘게 끌었다. 하지만 바빙크는 이 과정에서 린더보옴과 로오만 등의 동료들과 관계가 뒤틀렸고, 나중에는 카이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1902년 아르넴 총회에서 통합안을 제시한 바빙크의 안이 통과되었으나, 옛 애통측 통대인 판 쉘펀은 협박성 발언을 통해서 결국 그 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이와 더불어 바빙크의 노력은 좌절되고 그는 교회정치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합동개혁교회의 분열도 뒤따라왔다. 
이에 바빙크는 더 이상 캄펀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1903년에 자유대학으로 옮긴 바빙크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비워놓았던 자리를 이어받아 교의학을 가르쳤다. 이후에는 교육학, 심리학, 기독교철학 등도 가르치며 총장도 역임했다. 생애 후기에 기독교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상원위원으로 교육정책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바빙크의 중재 노력은 교회 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좌초되고, 도리어 양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처지에 빠지게 만들었다. 목회자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보편성을 추구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교회 연합을 추구했던 바빙크였지만,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바빙크가 더 많은 세력을 확보한 다음에 활동했었더라면 어땠을까? 거사를 행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따라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더욱 포용력을 가져서 뭉쳐야 할 필요가 있다. 
신학 교육의 중요성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나, 한국 교회는 대체로 신학 교육에 대해 무관심하다. 교회는 신학 교육의 책임자로서 신학 교육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고서, 원칙에 따라서 신학교를 운영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성 있는 목회자를 길러 내도록 실제적인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바빙크 시대의 특징과 같이, 신학 교육 개혁은 원칙과 원칙의 토론이 되어야지, 각인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바빙크, 그의 말년 
이 시기 정치적 야욕이 점차 커진 카이퍼와 바빙크는 점점 관계가 멀어져 갔다. 카이퍼는 수상의 재임에 실패한 얼마 뒤 수상시절의 비리가 폭로되자, 바빙크는 그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 일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서 카이퍼 나치를 지지하자, 바빙크는 이를 또한 반대하였고, 말년에 점점 권력에 집착하는 카이퍼에게 지도자의 자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말년에 바빙크는 개혁교회 내의 소장층 운동의 중심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외에 등장한 수많은 변화에 대해 대안을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를 이을 만한 뛰어난 신학적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바빙크는 고착화된 보수주의를 경계하면서 개혁신학의 특징을 강조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29일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바빙크는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했기에 또한 갱신시켰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개혁 신학자로서 살았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라 사는 자는 일시적 흥분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사상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바빙크는 1884년 7월에 발표한 『윤리신학파』라는 논문에서 종합과 중재를 통해 대립되는 사상들을 통합하려는 윤리신학파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윤리신학파적 종합이 아니라 “반제에 입각한 고립”으로써 신앙과 학문,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화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윤리신학파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지 않았던 바빙크는 신학 작업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재와 종합의 노선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학 작업이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끝까지 성경과 신앙으로 신학을 개진해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때때로 사변에 빠져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겠지만, 그는 이성이나 사색보다 “신앙”을 내적인 인식원리로 천명했다. 이하에서 우리는 그의 대작 『개혁교의학』의 순서를 따라 그의 신학 사상을 정리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때때로 1909년에 출판한 『하나님의 크신 일들』도 참조한다. 
신학 총론 
교의학자 바빙크에게 교의학이란 “신지식에 관한 학문적 체계인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말씀으로 교회에 계시하신 것에 대한 지식”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 하나님 지식을 중심에 두고, 성경으로 그 지식을 탐구했다. 그는 역사적인 종합적·발생론적 방법을 따라, 교의들의 발생을 추적하고 재해석한다. 특정 주제의 발전 과정을 다룰 때에 중세 시기 로마 가톨릭에 의한 부패를 종교개혁이 회복시켰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루터파보다 개혁파가 더 우월함을 부각시킨다. 이는 그의 스승 스홀턴에게서 배운 바처럼, “유태교보다 로마교가 낫고, 로마교보다 루터파가 낫고, 루터파보다는 개혁파가 낫다.”는 명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개혁파가 루터파보다 더 낫다고 여긴 까닭은 후자는 “인간론적”인데 반해, 전자는 “신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학과 교의학이 문화와 사상의 일부라 보았기에 바빙크는 당대의 철학과 심리학, 교육학, 지질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 세계를 자신의 교의학에서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에, 칼빈이 당대 인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면, 바빙크는 신토마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적 자연주의는 거부했다. 
성경 기록 과정을 성육신에 비유하여 설명한 바빙크는 베드로후서 1:21, 디모데후서 3:16을 주석하면서 삼위일체적·유기적 영감설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지나친 자연주의와 지나친 초자연주의 모두 배격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연적 인간의 언어를 이용하여 초자연적 계시를 수여하시는 전능한 적응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성령님의 증거를 또한 강조한 그는 “완결된 계시의 영속성”을 제대로 규명하였다. 
신학을 송영으로 파악했던 바빙크는 자신 속에 내재한 주지주의적 사변에 어느 정도 재갈을 물릴 수 있었다. 
삼위 하나님 
바빙크는 신론에 있어 불가지론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불가해성은 인정했다. 이는 토마스주의 신학에서 연유했다. 또한 그는 ‘본유적 신지식’과 ‘신 존재 증명’을 거부했으나, 신지식을 향한 인간의 자질은 인정하였다. 이로써 인간이 가진 잠재력에 고유한 신지식을 어느 정도 제공하는 애매성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긴밀하게 연관시킨 그는 신론과 인간론이 동일선상에서 파악되도록 하였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론을 형식적이나마 수용하고 토마스 신학의 ‘존재의 유비’를 차용한 그는 목적론에 우선성을 주어 존재와 생성을 설명함으로써 신론과 작정론을 사변에 빠지게 하는 우를 범했다. 삼위 하나님의 본질을 부성과 자성과 영성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 그는, 그 본질의 일체성과 뿌리를 헬라 교부들처럼 ‘성부의 위격’에 두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신성’에 둠으로써 삼위내적 관계 외에 또 다른 개념을 끌어들여야 삼위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한계에 봉착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학 스승 칼빈을 따라, 철저하게 자신의 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정립하려고 했다. 
작정론에 있어서 바빙크는 예정을 예지로 약화시킬 약점을 지닌 후택설과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몰 수 있는 전택설 모두를 거부하고, 양쪽의 이점을 살리는 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동일한 문장으로 전택설과 후택설 모두를 긍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에 있어 차라리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침묵함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는 창조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보아서, 이신론과 진화론을 배격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다룰 때에는 성경적 견해와 헬라 철학의 인간관을 조화하려고 했다. 
그는 언약론을 다룰 때에도 로마 가톨릭을 공격하면서 풀어나갔다. 
예수 그리스도 
바빙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존’과 ‘협력’과 ‘통치’로 3분하고 각각을 설명한다. 그리고 악의 기원과 존재를 창세기 3장을 중심으로 하여 설명한다. 
언약론을 더 자세히 다루는데, 삼위 간의 평화언약과 시간계의 은혜언약을 동일시하여, 두 언약이 지니는 차이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차라리 『하나님의 크신 일들』에서처럼 영원과 시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바빙크에게 기독론은 교의학의 중심점이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안셀무스와 개혁자들의 입장을 이어받고, 당대 현대 신학과 대화함으로써, 새로운 고전적 기독론을 창출하였다. 
성령 하나님 
바빙크는 구원의 서정을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은덕이라 하면서도, 소명-중생-칭의-성화-영화의 논리적 순서를 제시한다. 성령 하나님은 이 각각의 단계에서 말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말씀 아래서, 말씀 곁에서, 말씀과 더불어 사역하신다. 그는 중생론과 구원론에 대한 이해에서 카이퍼의 중생전제설이나 영원칭의론을 강하게 비판하지 못했다. 
교회론을 다룸에 있어 개혁자들의 가시적·불가시적 교회론과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를 다룬다. 고대 교회에서 강조한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부각시키지 못했다. 그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분이 어렵다고 인정한 뒤에 더 순수한 참 교회와 덜 순수한 참 교회를 말한다. 
그는 유아세례를 다룰 때에 합동개혁교회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유아세례를 언약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아이가 중생 받았기에 베푼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결국 1944년 분리에서 중요한 현안이 된다. 
바빙크는 종말론에서 영혼 불멸성, 중간기, 천년설을 다룬다. 바빙크는 성경이 혼의 불멸성을 말하지 않고 있으며, 중간기는 육체는 죽었으나 혼은 죽지 않은 상태라 규정하고, 무천년설을 지지한다. 
영향 
개신교회 안에는 교회에 대한 개혁적인 요소와 해체적인 요소가 공존해야 한다. 
바빙크의 신학은 그의 화란 신학 후예들에게 뿐 아니라, 전 세계 개혁파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에서는 구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칼빈 신학교를 통해서 그의 사상이 전해졌는데, 이는 미국 보수신학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많이 끼쳤다. 오랫동안 미국 보수 조직신학계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사실 바빙크 신학을 무미건조하게 요약·전달하는 서적이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 역사 초기에 박형룡(1887-1978)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통해 그의 영향이 전해졌다. 박형룡 박사는 화란어를 몰랐기 때문에 바빙크의 신학을 직접적으로 흡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의 기본서는 벌코프의 조직신학임을 생각할 때에 바빙크의 간접영향권 아래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박형룡 박사는 자신의 교의신학서 서문에서 자신의 교의학이 하지, 워필드, 댑니, 쉐드, 스미스,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의 신학을 엮어 만든 꽃다발이라고 했다. 
박윤선 박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한 직후인 1930년대 말부터,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 흐로쉐이더, 흐레이다누스, 리델보스 등을 화란어에서 직접 읽고 강의와 주석에서 그들을 인용하고 소개했다. 특히 바빙크는 그의 신·구약 주석(총 20권)에서 80회 이상 언급되며, 그의 사후 편집된 『개혁주의 교리학』(총 689쪽)에서는 약 100회 가량 인용된 것을 볼 때에, 가히 결코 무시 못 할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같은 입장과 노선을 취하면서 그 이후 개혁 신학의 발전을 덧붙여서 사상적으로 통일성을 이루며, 성경과 교회 현장에 밀착한 교의학 서적이 나온다면, 한국과 세계 신학계에 큰 기여를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맥락과 상황에 무관하게 무작정 바빙크의 신학을 본뜨기보다는, 보다 건실하게 교부신학 및 개혁자들의 신학을 연구한 토양을 형성하는 가운데,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하면서, 우리 안에 더욱 개혁해야 할 요소와 또한 해체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잘 분별하면서, 바빙크의 신학을 주체적으로 흡수하여 신학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진정한 “개혁” 신학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Theolog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참고문헌 
H. Bavinck, Magnalia dei : onderwijzing in de christelijke religie naar gereformeerde belijdenis, Kampen: Kok, 1909. 한역: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이 작품은 원래 『하나님의 큰 일』, 김영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C. Jaarsma,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Herman Bavinck, Grand Rapids: Eerdmans, 1935. 한역: 코넬리우스 야스마,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 교육철학』, 총신대학출판부, 1983. 
박윤선(유작), 『개혁주의 교리학』, 영음사, 2003. 
박형룡, 『교의신학』, 백합출판사, 1973. 
유해무, 『헤르만 바빙크-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살림, 2004. 
유해무, “한국교회와 개혁신학”, 『개혁신학과 교회』제 13호 (2002), 146-168. 
유해무, “한국에도 개혁신학이 가능한가?”, 『개혁신학과 교회』제 15호 (2003), 168-201. 
차영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과 한국신학”, 『개혁사상』 창간호 (1989), 7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