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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bullying과 violence

bullying과 violence


노승수 목사


bullying과 violence의 구별, 전자는 대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후자는 확실하게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다.

세상 법정에서는 violence만 죄(Crime)로 보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bullying도 죄(Sin)다. 6계명과 9계명을 어긴 죄다. 우리 주님의 산상수훈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 마음의 동기에 대해서도 심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우리 마음의 동기나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을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세상법은 우리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 예컨대, 누군가 자살할 사실을 알거나 혹은 그와 같은 일을 조장하여서 그로하여금 그런 선택을 한 행위에 대해서 죄라 묻는다. 그래서 방조죄나 미필적고의 등의 죄목이 있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이웃에게 책임있는 존재라는 의미며 성경이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법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bullying은 학교 장면에서만 있지 않고 직장생활 같은 성인들의 생활 장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직장과 학교 장면이 다른 점은 권력구조와 평등구조다. 권력과 힘이 개입된 것은 어느 경우나 violence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 우리에게 말로 상처를 주려 들 때, 그냥 대응하지 마라. 대응하는 이유는 사실 내 안에 연약과 열패감을 그가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차오르는 분노 탓이다. 그러나 누군가 세력과 힘으로 나를 공격하고 위해를 가하려 할 때, 분명한 저항을 해야 한다.

상처를 받으면 상처가 주고 싶어진다. 이는 우리 연약함 때문이다. 여기에 지배구조가 개입되면 왕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품위있게 더 성숙하게 대응해야 한다. 내가 바보가 아닌데 바보라고 나한테 하는 말이 왜 문제가 되는가? 반에서 1등하는 아이에게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욕을 누군가 한다면 그 아이는 상처를 받을까? 물론 내면적 상태에 따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상처가 되지 않는다. 왜? 그건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가 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나도 외면하고 있던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던 어느 면을 상대가 콕 찝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를 정말 못하는 친구에겐 이것은 상처가 되는 말이다. 대부분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어 bullying을 한다. 뚱뚱하다느니 못 생겼다느니 일을 못 한다느니 이런 식이다.

bullying에 더 품위 있게 대하려면 우리의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나의 약점을 직면하지 않고 무시하면 결코 자존감은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만물의 찌끼처럼 대접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공부를 많이해서 혹은 집안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이유는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곳에는 우리의 비참한 형편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제서야 그리스도가 복음이 된다. 비참 없이 만나는 그리스도는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자기 비참 가운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이웃의 bullying에도 더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자는 이제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의이므로 세상이 나에게 뭐라 해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의 귓전에는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칭의의 선언이 들릴 뿐이다. SNS 상에 보면 그리스도인 중에서 이런 넘치는 bullying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이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박윤선도 그랬던 것이 "임석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bullying은 다 우리 내면의 상처의 발로다.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향기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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