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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지금 그리고 여기

지금 그리고 여기
노승수 목사 

인간은 시간의 존재이다. 시간과 인간의 운명을 늘 같이 간다. 시간이 없는 인간의 삶을 존재할 수 없고, 특별히 현대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언제나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간과 싸우고 있다.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시간과 투쟁을 한다. 알고 보면 인간이 받는 대부분의 스트레스 역시 이 시간으로부터 온다. 회사에서 기한 내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은 시간 맞추어 등교해야 하고, 가정에서 엄마들은 때 맞춰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난 것을 이유로 연인들이 싸우기도 하고, 중요한 계약이 깨지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과 구별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떤 점에서 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의 삶을 지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결국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럼 과연 우리는 이 시간을 정말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애완용 동물 중에 다람쥐나 설치류를 키우다 보면, 우리에 쳇 바퀴를 넣어둔다. 운동을 위해서 넣어둔다. 보기에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 소용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쓸데없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다람쥐 쳇 바퀴 돌 듯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시간 사용이 이와 같다는 점을 통찰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시간의 많은 부분을 우리의 것으로 사용하며 살고 있을까? 
어떤 여학생이 한명 있었다. 그 여학생은 코가 빨개서 어린 시절부터 딸기코라는 별명이 있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너무 싫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마다 모멸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어느 신입생 환영회를 하게 되었다. 자리가 자리니 만큼 술이 빠질 수 없었고, 여기저기서 술잔이 오고 가는 중에 어느 4학년 남학생이 이 여학생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왠지 매력적인 얼굴에 호감이 갔던 것이다. 이래저래 말을 걸고 싶은 마음에 눈치를 보다 술잔을 건내며 마땅한 말이 없어서인지, 쑥스러워서인지, "어 우리 과에 주당이 한명 들어왔네, 딸기코 아가씨, 내 잔 받어"라고 말을 건냈다. 이 남자의 마음은 관심이었고 호기심이었지만 이 여자가 경험하는 것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모멸과 수치를 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그녀의 과거의 감정은 현재에도 살아 있어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녀에게 이렇게 현실이 왜곡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흔히 '콤플렉스'라고 한다. 
우리의 육신은 지금과 여기에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과거의 감정들로 현재를 사는 것이 보통이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배척감을 경험한 여인은 결혼해서도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배척한다고 느낀다. 이처럼 우리의 과거의 감정은 현재에도 살아 있다. 우리의 과거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현재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현재를 살지만 다람쥐가 쳇 바퀴를 돌듯이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과 참된 영성은 현재를 현재로 받아들이는 능력, 지금을 지금으로 받아 들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왜곡을 가지고 있으며 이 왜곡의 정도가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면 그것을 정신증이라고 하고 일상생활을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정도가 되면 그것을 신경증, 혹은 인격장애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정상인의 경우에도 사실 현실 수용 능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6.25전쟁, 군사 독재, 군사문화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 신경증을 앓고 있다. 요즘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조승희 군의 문제도 다 이 문제의 연장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야 하며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하며, 교회는 이러한 건강함을 회복하는 영적이며 정신적 치유의 과정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영성은 역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찾을 수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나 사람들이 이 말씀 뒤에 어떤 구절이 있는 지는 잘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라는 연결사는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을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염려로 오염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염려 역시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재에 살아 움직이는 과거의 감정을 '핵심감정' '아동기 감정양식' '내적 어린아이' '상처입은 어린아이' '내재 과거아' 이런 용어들로 부른다. 
그러므로 영적 건강, 정신적 건강이란 '지금 그리고 여기'를 사는 삶이다. 이 삶을 방해는 하는 것이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감정적 손상과 상처들이며 이 상처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는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를 살수 없다. 끊임없이 과거가 현재에 살아서 움직이며 우리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에 매인 삶을 살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의 기도와도 이 문제가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도란 두 인격체 간의 대화이자 만남이다. 그것도 사랑의 대화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도에 있어서 늘 먼저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그러나 과거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화를 듣지 않는다. 자신의 문제해결만이 유일한 관심사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은 것으로 기도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는 부당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늘 현재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기도의 언어는 언제나 현재이다. 20세기 언어철학의 거성 비트겐슈타인은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기도가 사랑의 행위이라면 그것은 늘 현재적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곧 지금 그리고 여기의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과거를 다루는 하나님의 손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분의 현존 가운데로 초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 그리고 여기'를 살게 하신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그와 같은 치유의 순간이다. 우리의 과거가 지워지고 우리의 삶의 중심이 '지금 그리고 여기'로 옮겨 오는 순간이다. 이런 건강함이 있는 사람과 목회자는 수용적이며, 온유하며, 기품 있으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무엇이 현실인지를 통찰하는 힘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길들어져있어서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안다. 그의 삶은 꾸밈이 없고 소박하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진정한 비결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과거를 후회할 게 아니라, 또 장래를 걱정할 게 아니라, 현재의 이 순간에서 얻어 낼 수 있을 만큼 얻어 내는 것입니다. 1초, 1초를 즐길 작정이에요. 그리고 즐기고 있는 동안,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작정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쟁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둔한 지평선 위에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려 하는 거예요. 그리고 너무 성급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지나치는 아름답고 조용한 전원의 경치를 하나도 못보고 말아요. 그리고 나서 비로소 깨닫는 것은 이미 자기가 늙고 지쳤다는 것과, 목적지에 도착하든 못하든,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길가에 주저 앉아 작은 행복들을 산처럼 줏어 모을 생각이에요.. " 이 삶이 우리의 삶이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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