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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란 신학의 탄생 배경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신학을 대표적인 중세 스콜라 신학이라고 합니다. 아퀴나스는 주지주의적 전제를 스코투스는 주의주의적 전제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스콜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적인 전용입니다.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원용해서 전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이 되면 지성이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된 의란 하이델베르트 요리문답이나 개혁파 주요 신앙고백서들에 등장하는 참 지식과 의와 거룩(골 3:10, 엡 4:24)을 의미하며 원의라고 불립니다. 이것의 부재로 인해서 하등한 인간의 구성인 몸과 그 정욕에 의해서 인간이 죄에 빠진다고 본 것입니다. 즉, 타락을 단지 이 원의의 부재로 본 것이죠.

 

아퀴나스의 이 신학 사색은 후기 스콜라 신학인 스코투스와 같은 사람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그 논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월로서 이데아를 사물 안에 놓는 구조에서 있습니다. 즉 초월로서 하나님과 자연이 내재의 원리를 따라 유기적으로 연동이 되면서 하나님의 의지가 자연에 귀속되는 문제를 야기한 것이죠.

 

그래서 후기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의 의지를 더 강조하게 되는데, 이 의지의 강조가 종교개혁 직전에 이르면 원의가 주입된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해서 구원의 공로로서 인간의 의지의 일부가 포함되는 현상을 빚게 됩니다.

 

이 문제가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유명한 자유의지 논쟁이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자기의 모든 책이 없어져도 노예의지론과 소요리문답만 남는다면 사도적 복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며 이 책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중세적인 의의 주입(11.1)을 반대하는 것이죠. 그러나 소급하면 이것, 곧 의의 주입은 어거스틴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어거스틴 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죠.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원의의 부재를 설명하면서 원죄개념을 설명했다는 것을 아는 분은 그렇게 많지 않은 거 같습니다. "원의와 원죄" 뭔가 짝을 이루는 거 같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짝을 이루는 개념이죠. 어거스틴에게서는 타락이란 "원의의 부재"였던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이것의 계승인 셈이었죠.

 

그런데 믿음으로 원의가 주입되었다는 신학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이죠. 주입된 의에 대한 강조가 후기 스콜라 신학에서 의지에 대한 강조와 맞물리면서 주입된 의로 우리 스스로 구원의 공로의 일부로 순종을 행할 수 있고 그걸 근거로 구원 유무를 판단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말할 때,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죠. 면죄부를 사는 공로행위가 우리의 죄를 사한다는 신학의 구조를 성경에 근거해서 타파한 것이죠. 그 정점에 "노예의지" 개념이 탑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타락을 단지 "원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 의지가 "죄를 기뻐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설명하는 신학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이신칭의의 신학에는 인간의 타락을 "전적 부패"로 설명하는 매커니즘이 탑재된 것입니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도르트 신조에서 "전적 부패"교리입니다.

 

소요리 문답 18문에서 죄를 원의가 상실된 것과 본성이 부패한 것으로 놓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어거스틴이나 중세신학과 달리 더 발전된 부분이죠.

 

그러나 루터의 이런 신학은 로마 가톨릭주의자로부터 맹비난을 받습니다. 성도들을 도덕적 해이로 몰아넣는다고 본 것입니다. 기실 이 비난은 그럴만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부정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종교개혁 신학의 문제라기보다 오늘 교회가 종교개혁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적어도 세 가지 대지를 통해서 참 신자에게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믿는다고 해서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의가 전가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본성적 부패가 드러나야 하는데 이것을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성경은 통상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루터의 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들은 모두 사도신경이나 교리를 설명함으로 믿음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주기도와 은혜의 수단과 같은 소망의 방편들을 설명하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 본성적 부패를 확인한 신자와 구도자는 교회를 통해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으로 나아감으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으시는 사랑을 통해서 계명의 성취를 이루는 구조를 제시했습니다. 즉, 율법이 우리 본성적 부패를 깨닫게 하는 역할로 본 것이죠(롬 3:20). 그럴 때 아픈 사람이 약을 찾고 의사를 찾듯이 소망의 수단들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거기서 성령을 통해서 부어지는 사랑을 통해서 다시 십계명의 요구를 성취하는 구조로 설명한 것입니다(롬 8:4-5).

 

이런 구원론적 구조가 정치해지려면 그 구원의 행위를 전적으로 제공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등식이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 행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하기 때문이죠. 지난 번에서 제가 썼지만 가톨릭의 사죄의 구조는 죄의 자각-고해-신부의 보속 요구- 보속의 시행- 신부의 사죄 선언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이 바로 보속이 구원의 행위로 들어간다는 점이고 이 보속이란 우리가 지은 죄 중에서 사망의 형벌을 주님이 사해주셨지만 개인이 지은 죄의 행위는 스스로가 보속해야 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아담의 최초의 죄를 두고 설명하자면 예수께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니가 갚아라 사망의 형벌은 내가 지마"라는 식으로 했다는 것이죠. 이게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이고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를 보속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아담과 같이 두 번째 아담으로서 율법에 순종하신 예수께서 그 행위조차 대속하셨다는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입니다.

 

물론 유해무 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교의사적으로 보자면 예수의 순종을 능동적, 수동적 순종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수동적, 그리고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신 삶을 능동적 순종이라 구분한다. 그러므로 수동적 순종으로는 사죄를, 능동적 순종으로는 영생을 얻었다는 구분도 하나, 이는 올바르지 않다."(개혁교의학: 송영으로서의 신학, 347–348). 율법의 순종을 능동으로 십자가 대속을 수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도 능동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전생애에 순종하신 것에도 수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위한 이 개념의 출발점은 바로 보속 행위를 구원의 일부로 요구한 신학과 보속의 내용에 해당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속으로 편입시키지 않은 신학이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일부로 비집고 들어오도록 빌미를 제공한데서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신학은 능동적 순종을 강조한 것이고 이것은 루터가 바로 그 출발점이며 칼뱅이 그 완성자다. 이런 신학이 종교개혁의 여러 신앙고백서들에 반영되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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