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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평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 2>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평

 

김 병 훈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시작하는 말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이라는 표현과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독자들은 제목부터 낯설고 이런 주제의 글에 대해 접근하고 싶지 않은 인상을 받을 것이라 염려된다. 하지만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은 개혁신학이 성경적 진리로 발견하고, 확신한 복음의 설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신학적 도전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구원론을 무너트릴 뿐만 아니라, 기독론의 수정까지도 요구하며 신론과 인간론을 망라하는 신학 체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친다. 한국 신약학계는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미 ‘새 관점 신학’을 수용하고 그 신학적 결과물을 성경적으로 받으면서 종교개혁신학을 부정하는 자신의 신학을 은닉하고 있는 형편에 처해 있다. 이에 간략하나마 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비평의 요점을 밝혀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2009년 새해 첫머리에 합신이 지켜가야 할 바른 신학, 곧 개혁신학의 틀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다.

 

1‘바울신학의 새 관점들’(New Perspectives on Paul)이란?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이하 ‘새 관점 신학’으로 줄임)은 바울신학의 새로운 해석 유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1983년 제임스 던(James Dunn)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새 관점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로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에 의해서 규정된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의 이해가 16세기 천주교회와의 교리 논쟁 가운데 천주교회에 대한 비평 점을 유대주의에로 적용한 잘못된 결과일 뿐이며,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바울신학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비평하는 학문적 노력은 1963년 크리스터 스텐달의 논‘사도 바울 그리고 서방의 내성적 양심’에서 의미 있는 출발점을 갖는다. 그 이후 ‘새 관점 신학’의 실질적 토대는 1977년에 출간된 샌더스(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구축이 된다. 이 책에서 샌더스는 바울과 충돌하였던 팔레스틴 유대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개개인이 공로를 통해 구원을 얻는 ‘행위-의’를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팔레스틴 유대주의는 율법주의적 공로에 근거한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는커녕 ‘언약적 율법주의’로 특징을 부여할 수 있는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다.

 

더스의 주장에 힘입어 영국의 제임스 던과 라이트(Wright)와 같은 이들의 선도적인 학문적 노력에 의하여 소위 ‘새 관점 신학’은 구체화 되었다. ‘새 관점 신학’의 소개는 인터넷 상에서도 적극적이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에 ‘새 관점 신학’은 바울과 초대교회에 대한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주며, 교리의 성경적 기초를 공고히 해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적 일치점을 증진시켜준다. 아울러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대화를 개선하여 주는 등의 유익이 있음을 언급한다.

 

2‘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이 주장하는 바들

 

‘새 관점 신학’이 주장하는 바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먼저 그것이 구조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토대 위에서 ‘새 관점 신학’의 구체적인 주장들을 대표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새 관점 신학’의 구조적 토대 : ‘언약적 율법주의’

 

‘새 관점 신학’이 주장하는 바들은 모두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구조적 토대 위에서 개진이 된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언약’과 ‘율법주의’의 두 개념들을 조합한 것인데,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고,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고 있음을 뜻한다.

 

샌더스가 주장하는 바는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신학을 따를 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getting-in)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인한 선택의 결과이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온 자들이 그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기’(staying-in) 위해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요구를 지켜야만 한다. 즉 율법의 순종과 관련하여 팔레스틴 유대주의가 가르치는 바는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일 뿐,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세분하여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의 특징에 대하여 설명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②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니, ③이 율법은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표현한다. ④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율법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며, ⑤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⑥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고, ⑦그 속죄의 수단을 통하여 언약 관계의 유지와 회복이 가능하다. ⑧순종과 구속과 하나님의자비로 언약 안에 보존된 사람은 종국에 가서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2) ‘새 관점 신학’의 주장들

 

‘새 관점 신학’은 팔레스틴 유대주의가 ‘언약적 율법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굳게 확신한다. 바울이 논쟁을 벌인 팔레스틴 유대주의를 그렇게 이해할 때, 바울신학은 전통적으로 이해하여 온 것과는 사뭇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예를 든다면 ‘율법의 행위, 의롭게 됨, 하나님의 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 등에 있어서 그러하다.

 

① ‘율법의 행위’ : ‘새 관점 신학’은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순종을 통한 공로의 가치’라는 의미에서 ‘믿음’에 대치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공로를 쌓는 도덕적이며 율법주의적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바울이 반대한 ‘율법의 행위’란 할례, 음식, 안식일 등과 같이 유대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일종의 ‘문화적 표지’(cultural marker) 또는 유대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표시하는 표지(badges)나경계석(boundary marker)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 바울의 논점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관련한 것이다.

 

② ‘의롭게 됨’ : ‘새 관점 신학’은 바울이 말하는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원한’ 지위를 부여하는 단 한 번의 완성된 행위나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의롭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가는(getting-in) 사건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살아온 전 생애 동안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잘 머물러 왔는가(staying-in)에 따라 결정이 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③ ‘하나님의 의’ : ‘새 관점 신학’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죄인들에게 전가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본질적으로 ‘의로움’이란 ‘전이’ 또는 ‘전가’될 수 있는 어떤 사물이나 실체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신실히 지키셨음을 뜻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주와 구주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실히 지키셨으며, 또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게 반응을 하면 그들도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④ ‘믿음으로 의롭게 됨’ : ‘새 관점 신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의롭게 되는 일이 ‘율법의 순종을 통한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전통적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순종을 통하여 언약 백성으로 끝까지 머무르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주지하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문화표지나 경계석인 ‘율법의 행위’를 지키지 않고도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복음적 선포에 대해 순종을 하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⑤ ‘믿음에서 믿음으로’ : ‘새 관점 신학’은 구원론과 관련하여 믿음과 행함이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을 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신실함’을 뜻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롬1:17)는 ‘신실함에서 신실함으로’로 해석 되는데, 첫 번째 신실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키셨음을 뜻하고, 두 번째 신실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하는 신실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실함이란 믿음과 행함이 통합되어 있는 반응을 뜻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하여 인간이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며 그 가운데 율법의 순종을 통해 언약 백성으로 끝까지 종말론적 지위를 유지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언약적 율법주의’와 관련한 개혁신학의 비평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비평은 두 가지 점에서 행하여 질 수 있다. 첫째는 과연 팔레스틴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확정된 학문적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믿는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이 ‘언약적 율법주의’와 본질상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1) 팔레스틴 유대주의는 ‘은혜의 언약적 율법주의’인가?

 

바울이 논쟁을 벌였던 상대인 팔레스틴 유대주의 혹은 유대주의적 기독교는 ‘언약적 율법주의’이므로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공로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종교라는 샌더스 또한 ‘새 관점 신학’의 전제는 견실한 증거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적 율법주의’가 팔레스틴 유대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문적 이의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틴 유대주의 문헌들 가운데는 ‘들어감’(getting-in)이 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선택임을 보여주는 것들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실은 이미 칼빈에 의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외경으로 분류가 되는 1세기 유대주의 문헌들에 대해서 칼빈은 어떤 (바룩 2:18)에 대해서는 정통 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하는 반면에, 또 다른 어떤 것(집회서 15:14~17)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으로 강하게 비평한다.(기독교강요 2.5.18)

 

2)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의 종교인가?

 

둘째로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구원론적 구조는 모두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새 관점 신학’은 전통적인 바울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팔레스틴 유대주의가 ‘언약적 율법주의’임을 강조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에 바울의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 관점 신학’의 결론은 바울도 또한 ‘언약적 율법의’의 틀 안에서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전제를 슬그머니 받아들여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에 따라서 바울을 재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이 이해하는 ‘은혜’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와 본질상 다르기 때문에 바울 신학을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는 ‘새 관점 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①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 : ‘새 관점의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감’을 입고, 일단 들어온 후에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머무름’을 통하여 종말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부여받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언약적 율법주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의 언약 백성이 되는 초기의 ‘의롭게 됨’을 받았으나,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종말론적 ‘의롭게 됨’을 누리지 못하는 위험성을 열어 놓는다. 개혁신학의 5대 교리 가운데 적어도 ‘제한속죄’와 ‘성도의 견인’ 교리와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 :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은혜와 전혀 다르다.

은혜 언약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신의 백성을 언약 안으로 불러 끝까지 붙드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은 채 마침내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은혜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ⅱ) 어떤 이들은 은혜 언약 안에 담겨 있는 조건성, 예를 들어 모세 언약에서 발견되는 조건성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은혜 언약에서도 그 조건성을 이루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라는 점을 지적하며, 은혜 언약과 ‘언약적 율법주의’의 일치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이다. 구원의 위기와 관련하여 나오는 은혜 언약 안의 조건성의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의 외적 언약에 속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선택을 받은 자인가, 그렇지 못한 자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정적 선택을 받지 않은 백성들은 언약의 조건성에 불순종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반면에, 예정적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완전하나마 조건성에 순종하므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증거의 열매를 맺는다.

뜻 보면 이것이 마치 언약적 율법주의가 말하는 ‘머무름’과 비슷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실체 상 전혀 다르다. 예정을 입은 자의 순종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entia passiva)을 근거로 하여 이들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obedentia activa)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이미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룬 자로 받으시고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들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의 조건성은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성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 곧 성화의 삶을 사는 자들임을 증거 하는 열매로서의 조건성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오직 은혜의 언약일 뿐이다.

ⅴ) 이러한 사실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서의 은혜 언약의 대상을 구별함으로써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은혜 언약의 대상은 영원한 작정에 따른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넓은 의미에서의 언약의 대상은 외적으로는 은혜 언약에 속하였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는 예정적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율법의 조건성이 구원을 결정하는 의미를 갖게 되며, 율법에 의한 정죄 아래 놓임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칼빈은 로마서 11장 2(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답은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행하여 아브라함의 후손 전부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그렇지만 선택(adoption)의 열매가 육신의 모든 자녀들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비밀한 선택과 관련하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좀 더 상세히 풀어주고 있다. ‘이제 두 번째, 좀  제한적인 선택,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좀  분명하게 나타나는 선택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겠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버리셨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을 교회 안에 소중히 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보호하심을 보이셨다. 영적인 언약이 할례의 표지에 의하여 이스마엘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스마엘도 그의 동생인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 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후에는 수많은 수의 사람들, 거의 온 이스라엘이 제외 되었다. 이스마엘, 에서 등의 사람들이 제외 된 것은 바로 그들 자신들의 흠과 죄책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충실치 못하게 그 언약을 위반하였기 때문이다.’(기독교 강요 3.21.6)

 

나가는 말

 

‘새 관점 신학’의 주장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이유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의 민족적 문화 표지들을 따라 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며, 결코 유대주의를 율법주의적 공로주의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새 관점 신학’의 주장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어 아래 집약 되고 있는 종교개혁의 구원론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새 관점 신학’의 주장에 의하면 ‘언약적 율법주의’도 역시 은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한 이해의 차이들로 인하여 설령 ‘언약적 율법주의’가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팔레스틴 유대주의가 ‘율법적 공로주의’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은혜 교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것으로 지적한 세미-펠라기우스적 오류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관점 신학’의 주장은 그들이 이해하는 팔레스틴 ‘언약적 율법주의’를 개혁신학이 성경에서 발견하여 제시한 은혜 언약 위에 덧씌워 결국 바울신학에게서 세미-펠라기우스적 구원론을 이끌어 내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새 관점의 신학’이 주장하는 ‘율법의 행위’, ‘믿음으로 의롭게 됨’, ‘초기의 의롭게 됨과 종말의 의롭게 됨의 구분’ 등의 모든 것들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 안에서 바울을 재해석한 것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울의 신학을 ‘언약적 율법주의’로 읽을 수 없는 까닭을 개혁신학의 은혜 언약의 이해의 틀에서 확인한 이상 ‘새 관점의 신학’이 주장하는 바들은 모두 설득력을 잃는다.

 

사실 ‘새 관점의 신학’이 ‘율법의 행위’와 관련하여 주장한 주석적 근거들은 흥미롭게도 이미 칼빈이 로마서와 갈라디아 주석 등에서 검토하여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의롭게 됨을 초기와 종말의 시기로 구분하는 것의 잘못에 대해서도 칼빈은 그가 쓴 ‘트렌트 종교회의 교리 강령에 대한 비판’에서 로마서 1장 6절, 하박국 2장 4절, 창세기 15장 6절과 갈라디아 3장 6절, 로마서 5장 1등을 언급하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새 관점 신학’이 주장하는 바는 비록 새로운 학문의 형식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이미 500년 전 칼빈에 의하여 잘못된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내용은 바로 종교개혁의 상대였던 천주교회의 주장들이었던 것이다.

 

‘새 관점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교리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구원론은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자들이므로 스스로 행위를 통하여 의로운 자로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율법적 의를 전가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므로 ‘새 관점의 신학’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죄인의 거룩한 삶의 순종의 결과에 따라서 미래의 종말론적 의의 판결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는 장차 주님의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이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밝혀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위로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 신약 학계의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 복음의 위로를 거절하고 천주교회로 돌아가자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2009년 지금은 한국 교회 안에서 개혁신학을 지켜가야 할 합신의 소명과 각오가 더욱 절실한 때가 아닐 수 없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