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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신학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혼동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혼동 (양용의, 이승구교수)[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신학적이며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를 주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혼동” 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마련하였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용어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혼동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등의 문제들을 살펴봄으로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지를 점검하고자 한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봄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번 대담은 양용의 교수와 이승구 교수가 함께 진행하.. 더보기
복음과 율법의 균형 복음과 율법의 균형서창원 목사이끄는 말본 논고를이라는제목으로 정한 것은 복음과 율법이라는 주제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복음과 율법이라는제목은 어떤 측면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뉴앙스를 담고 있는 인상을 준다. 복음을 위하는 자들에게는율법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기 쉽고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무용성을 내세울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복음과 율법의 균형이라는 제목을가지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복음과 율법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하고자 한다.복음과 율법의 문제는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심각한 이슈이다. 사도행전에나타난 복음전파의 여정에서도 바울의 정거한 복음과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주의가 항상 부딪혔음을 볼 수 있고 급기야 예루살렘.. 더보기
성경신학적 방언 연구를 통한 현대 방언 비판 성경신학적 방언 연구를 통한 현대 방언 비판I. 서 론현대 방언 기도는 각 교단의 신학적 경향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일선(一線) 목회자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적지 않은 혼란을 겪게 한다. 개혁교회의 목회자와 성도 또한 이에 예외가 아니다. 특히 방언(기도)를 용인(容忍)하는 것과 금지 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필요하며, 분명하고 확고한 해결책(가르침 혹은 성경해석)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약성경 내에서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 볼 것인데, 바울이 방언에 대해 가르쳤던 고린도전서 14장의 주요 구절 해석을 중심으로 하여 방언기도에 대한 바른 신학적 입장을 도출해 내고자 한다.II. 본 론1. 고린도와 고린도교회의 .. 더보기
한국교회와 박윤선 박사의 복음이해 한국 교회와 박윤선 박사의 복음 이해 -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서 론 요즈음 한국 교회에서는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윤리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비판의 대상 가운데는 박윤선 박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박윤선 박사의 잘못된 복음 이해가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의 윤리 부재 내지는 약화 현상을 가져오게 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총신대의 정훈택 교수는 행위, 윤리, 사회 문제 등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가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삶에 대한 성경의 호소는 믿음으로의 값없는 구원이라는 대주제에 파묻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 행위, 윤리, 삶의 문제는 그의 성경관이 만들어 내는 신학체계에서는 설 자리를 얻지.. 더보기
다윗의 무너진 장막 다윗의 무너진 장막조병수 교수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 9:11)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다는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을 장로 야고보가 인용했다(암 9:11; 행 15:1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몇 가지 오해를 한다. 첫째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다윗의 왕국이 재건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시오니즘과 세대주의는 만난다. 이런 오해는 필연적으로 둘째 오해를 낳는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물리적인 차원에서 회복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이다. 이런.. 더보기
예수인가 바울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칭의인가 예수인가 바울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칭의인가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2011.8.25 김병규 옮김 많은 성경학자와 성도들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한 반면 예수님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예수님과 바울이 서로 다른 두 복음을 전했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바울 모두 실제로 이신칭의를 전파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그 둘이 전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일까? 나는 사도 바울과 함께, 그의 터 위에서, 그를 통해, 그 안에서 자랐다. 바울의 편지는 우리가 보는 성경의 핵심이었다.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부터 지금껏 기억나는 설교는 매주 절별로 전체를 강해한 고린도전서와.. 더보기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원(The Genesis of Saving Faith)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원(The Genesis of Saving Faith) 장 해 경 교수 1. 서 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고전적 표어는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가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야 할 구호이다. 그러나 “믿으라-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간명한 요청과 약속은 교회 안에서조차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말의 형식을 그냥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믿음”-“구원”의 관계를 ‘조건’-‘성취’의 공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내가 [약속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신자는 ‘내 믿음’으로 교회에 입문하게 되고, 그 후 줄곧 ‘은혜’가 아닌 ‘율법’ .. 더보기
마태복음과 이방인 마태복음과 이방인 조병수 교수 요약 마태는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방인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이방인은 선교의 대상일 뿐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마태는 이러한 이중적인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추진하고 이방인에 의한 영향을 방지하는 이첨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태가 이러한 역할을 마태가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체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수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인 입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교회들이 이방인과 관련하여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는 현재의 서기관으로서 과거의.. 더보기
주의 만찬과 자기를 살핌(고전 11:17-34) 주의 만찬과 자기를 살핌(고전 11:17-34) Lord's Supper and "Discerning Oneself" (1 Cor 11:17-33) 권연경 (신약신학) 1. 서론: 성찬에 앞선 내적 성찰? 2. 고린도전서 11:17-34절의 흐름 3. “자신을 살피라”는 말의 의미 4. “몸”을 살피는 일: “하나됨”의 중요성 5. 먹는 방식으로서의 “자신을 살핌” 6. 결론 1. 서론: 성찬에 앞선 내적 성찰? 본고의 목적은 고린도전서 11장을 기초로 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거기에 비추어 오늘 우리가 가진 성찬 예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성찬은 ‘상징적인’ 분량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더보기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 비교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 비교 오성종 교수 (칼빈대학교, 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주지된 바와 같이, 칼빈은 신구약 성경책들 거의 전부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 1548년(개정판: 1556)에 세 옥중서신과 함께 출판된 갈라디아서의 주석도 들어 있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양적으로 보자면 비교적 적은 분량의 주석 책에 속한다. 톨룩(A. Tholuck)이 편집한 라틴어판에서 71쪽을 차지할 뿐이다. 칼빈이 저술하여 출판한 신구약 주석 전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분량이다. 단순히 양적인 분량으로 중요성의 인식의 정도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시편이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같이 엄청난 분량으로 주석을 저술한 경우와 비교해보았을 때, 적어도 주석에 있어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