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4:40-41의 데려감을 당하는 자 vs 남겨지는 자에 대한 현대 주석가들의 견해]
김창훈 목사
마태복음 24:40-41에서 쓰인 중요한 두 동사("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와 "아피에미"[ἀφίημι]) 자체는 긍정적인 뉘앙스와 부정적인 뉘앙스에 다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단어 자체를 두고 의미를 결정하려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 24:40-41의 의미는 본문이 위치한 좁은 문맥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맥 안에서도 본문의 의미 결정에 영향을 주는 거의 "상반된" 근거들이 둘 다 존재하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 어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현대성경학자들 사이에서 마태복음 24:40-41의 "데려감"(파라람바노; παραλαμβάνω)과 "남겨짐..."(아피에미; ἀφίημι) 중에 어느 것이 구원이고 어느 것이 심판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거의 반반으로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R. T. France는 1984년 주석에서는 (1) 견해를 지지했다가, 2007년 주석에서는 (2)의 견해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1)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아무런 표시가 없고, (2)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노란색 하이라이트와 별표가 있습니다.)
(1) 구원을 위해 데려가고, 심판을 위해 버려둠
Morris, Hagner, Luz, Carter, France, Bruner, Hendriksen, Nolland 등은 "데려감"이 31절에 나오는 재림 시에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데려감"을 구원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2) 심판을 위해 데려가고, 구원을 위해 남겨둠
그러나 Gundry, Blomberg, Mounce, France, Wright 등은 "데려감"이 39절과 더 많은 연관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39절을 보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면서 종말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홍수가 "데려가 버렸다"(aorist, 아이로; 데려가다, 제거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0-41절에서 "데려간 것"은 홍수가 사람들을 휩쓸어 데려가 멸망시킨 것처럼 심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실, "데려간 것"이 심판인지, "남겨진 것"이 심판인지는 본문에서 마태가 중점적으로 말하려는 주제는 아닙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주님의 재림의 확실성, 그러나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불예측성,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과 심판으로 분명히 양분하게 된다는 엄격한 분리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가 "데려감"과 "남겨둠" 중에 어느 것이 구원이고 어느 것이 심판인지를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이 본문에서 마태가 꼭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둘 중에서 어떤 견해가 마태의 의도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2)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31절보다는 39절의 흐름이 40-41절의 의미에 더 많은 연관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39절에서 노아의 홍수로 인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는데, 그 심판을 홍수를 통해서 "데려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데려감"이 "파라람바노"가 아니라 "아이로"(αἴρω)라는 단어를 통해서 쓰여졌지만, 두 단어는 문맥 내에서 동일한 의미로 교환될 수 있는(interchageable) 동사들입니다. 38-39절에서 "데려감"을 통한 심판을 말한 마태는 40-41에서도 "데려감"을 통한 심판을 말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물론 본문 자체가 둘 중 하나의 해석을 뚜렷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의 부차적인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 마태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main idea)에 더 주목하는 것이 옳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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