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선지동산 33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 / 길성남 교수
한국교회 성도들은 욥기 8장 7절을 매우 사랑합니다. 신자가 운영하는 사업장이나 식당, 사무실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구가 걸려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대해지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눈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본문에 머물고, 또 그 본문이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입니다. 특히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본문을 애송(愛誦)합니다. 목회자들도 개업식 예배 설교를 할 때 이 본문을 자주 택합니다. 이 본문처럼 사업하는 신자들이 모두 심히 창대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욥기 8장 7절은 믿는 자들의 성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욥기의 문맥을 살필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 본문은 반드시 문맥 안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그 본문의 의미를 결정해주는 부분을 문맥이라고 합니다. 욥기의 문맥을 살펴보면, 8장 7절이 앞의 본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히 창대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5, 6절).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이고, 그 결과 심히 창대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창대하게 되는 비결은 5절과 6절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두 절을 떼어놓은 채 7절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물론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항상 형통하게 되고 창대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의 내용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본문을 마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입니다. 문맥의 범위를 넓혀서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 본문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의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1절). 6장에서 욥은 빌닷을 포함한 자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6:29, 30). 이렇게 자기 의로움을 강변하는 욥에게 빌닷은 크게 분개합니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의 죄나 자녀들의 죄의 결과입니다. 욥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욥이 현재의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창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닷이 보기에, 욥은 먼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빌닷의 이러한 생각과 말은 아주 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욥기는 마지막 부분까지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빌닷의 말은 물론, 엘리바스와 소발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서 하나님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7, 8절).
하나님은 빌닷과 엘리바스와 소발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매합니다. 또 그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그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7, 8절). 이것은 욥기 8장 7절과 관련해서 무엇을 알려줍니까? 이 본문에 담긴 빌닷의 말 역시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본문을 포함한 빌닷의 모든 말이 정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신 것을, 마치 하나님의 약속처럼 받아들이고 애송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경건하게 사는 의로운 자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앞세우며,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을 벌하시고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상을 내리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분이라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이 항상 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죄의 결과이거나 하나님의 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청결하고 정직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닥치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기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본문을 의지하여 성도들은 무조건 성공해야 하고 창대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3:12).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구절은 분명히 우리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본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문맥 안에서 읽고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본문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것인지, 또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를 꼼꼼하게 살펴야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역자들은 더더욱 신중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본문을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이 설교자들을 통해 성경 본문을 읽는 방식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말씀 사역자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 둔 노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다음호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 .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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