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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구약신학

언약과 하나님나라

언약과 하나님나라 

김성수 교수


1.들어가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입니다. 이로 인해 성경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지식의 습득과 이에 근거한 신관의 정립은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를 위한 첩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가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의 정립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시급해 해결해야 할 선행 과제입니다. 교회 속에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를 세우신 이유가 다름 아닌 이 일을 위해서입니다. 말씀의 원리를 좇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이런 일의 결국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르고 온전하며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2.펼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라고 정의 할 때, 하나님 나라는 성경계시의 총체적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 나라가 세상 역사 속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과정을 구속사라 부릅니다. 언약적 구속사란 표현이 보다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를 방편으로삼아 진행될 때 '선 언약과 후 성취'라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사를 푸는 열쇠는 다름 아닌 언약이란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계시역사는 구속사이며 동시에 언약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약과 구속의 총화인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상호 밀접히 연관돼 불간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언약에 근거한 구속사의 진행과 그 결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총체적인 주제 속에 담긴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이며 점진적인 관계성과 진행상의 세부적인 내용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의적 숭배신앙의 미혹에 빠지게 돼 결국은 편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고 마는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늘 날 한국적 기독교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와 목회적 배경이 계시 의존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종교적이라 함은 신앙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이 보다 자의적인 사실로 인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현세지향적인 특성을 띠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목적 삼는 것이 아닌, 수단과 방편을 삼음으로 하나님을 사유화시켜 개인의 수종자로 여기는 우상숭배적 종교행위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성격이 계시의존사색적이 아닌 자기본위의 종교적 특색을 띠고 나타나게 될 때, 대부분의 신앙행위의 중심에는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성공이라는 인본주의적 명제가 자리잡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마치면서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의 신앙은 불가피하게 또 다른 성도와의 유기적인 연합의 관계성 속에서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된 특성을 더불어 이루어 가는 생명공동체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적 속성이 다름 아닌 의와 평강와 희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적극 지향하는 것으로 표출돼야 함이 교회가 지상에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성령을 통해 세상 가운데 존재케 하신 유일한 천상적 기관으로 존재합니다. 어떤 유사기관(para church)도 교회를 대신하거나 교회와 동등한 권한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에 보조적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보다 깊이 있고 정당하게 해명되면 될 수록, 성경적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 및 바른 목회관의 정립을 통한 한국적 기독교의 개혁은 그만큼 앞당겨 지리라 확신합니다. 개혁은 결코 외적 제도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내적 의식의 변화가 전제돼야 합니다. 이때 내적 의식의 변화의 동인은 다름 아닌 성경계시가 지향하는 총체적 본의에 깊이 접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음 단계로 이를 부단히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변화된 삶의 내용까지를 포괄한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서 천상적 통치의 개념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가장 능력있는 권세로 현시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이처럼 이미(already) 이루진 과거적 하나님의 나라와, 지금(now)도 이루어 지고 있는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및 앞으로(not yet) 이루어 질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와의 긴장 속에서 전투하는 하나님의 군사된 자격과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오직 참 된 진리 안에서 승리를 위한 건투를 빕니다. 


Ⅰ. 도입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啓示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 마음에 품으신 계획과 작정을 세상역사 가운데 펼쳐 보이신 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40여명의 저자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무려 1500∼1600여 년에 걸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담당하신 분이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기도 한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성령께서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듯 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간섭하여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들의 전 인격을 유기적(有機的)으로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쓰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내적 간섭과 감동을 입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발동시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체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요 14:16∼17)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이 성경의 원저자가 되신다는 의미인 동시에 진리와 함께 일하셔서 성경을 친히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전인적(全人的)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도, 찾을 수도, 나아가 자력으로 섬기거나 무슨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와 영적 파산자로 정의(定義)하고 있기 때문(창 3:8∼10; 마 8:21∼22; 롬 3:10∼12; 엡 2:1)입니다. 처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과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오염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통로인 영적 기능이 마비돼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의 발동이 방향감각을 잃게 된 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게 된 것”(롬 1:21∼23)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성경을 주신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씀중심의 신앙 또는 신학적으로 계시의존사색신앙(啓示依存思索信仰)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딤후 3:16∼17; 행 17:11).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은 처음부터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철저히 의존(依存)하는 것으로서 성립됩니다. 이렇게 성경계시를 생명과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 접촉됩니다.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에 무지하거나 결핍되면 그것에 비례해 자신의 종교심을 발동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바, 곧 자의적(自意的) 숭배신앙에 빠져듭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은 신앙의 근거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곧 자신의 내적 종교심의 발로로부터 나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계시에서 이탈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합니다.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행복과 안녕이라는 현세적 복과 성공의 개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일의 성취를 위한 수종자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인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이런 자의적 숭배신앙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므로 항상 신앙의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창 3:5; 왕상 12:25∼33; 사 1:10∼14; 마 16:23∼24)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도의 첫걸음이 자기 부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의 자아는 항상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한다는 것(마 16:21∼24; 민 13:31∼33)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을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배경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지상적 사역의 절정인 예루살렘의 고난을 막무가내로 만류했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신앙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역사와 시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성경은 늘 경계해서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여전히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신이 인본주의적 유사 기독교 신앙관에 붙들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자기 기만적(欺瞞的) 신앙에 깊이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더욱 한 시대에 절대 다수가 이런 신앙관을 공유하여 제도권을 이룰 때,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신앙이 당대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대변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는 여전히 왜곡된 진리와 가치로 판정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신약시대에 유대교와 중세 구교(舊敎)의 실체가 이랬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에 있어서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체계인 계시를 의존해서 좇는 것이 아닌, 자신의 종교적 의를 힘써 추구해 나가는 것임으로 불복종과 불법으로 정죄 당했던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이유로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왜곡된 해석에 기인된 것이 교회역사의 증언입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범죄이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치열한 접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결정적인 구속사의 승패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림(再臨) 때까지는 아직도 사단의 잔존세력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은 곧 말씀의 성경적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힘써 공부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를 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바른 해명(解明)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교회와 신앙을 동시적으로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 


Ⅱ. 전개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總和)로서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대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첫 번째 강의(講義)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총체적으로 말씀하는 바에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키고 그 내용과 방향성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참된 성경적 신앙의 의미와 본질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명제와 관련하여 다니엘서 2장 31∼45절에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자태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본문의 역사적 배경 
성경의 역사는 계시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깊은 곳에 간직해 두셨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을 마침내 인류의 역사 속에 언약을 도구로 펼쳐 보이신 구속사(救贖史)입니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당신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사의 경륜을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모형(模型)적, 예표(豫表)적으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택하셔서 선민(選民)으로 삼으시고 열방 앞에 당신의 구속사를 나타내시는 계시적 도구로 삼으신 배경이 이렇습니다(신 7:7∼8). 따라서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언약(창 12:1∼3) 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신정(神政)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친(親)백성들로 삼으시려는 거룩한 사역 곧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담당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가 구체적으로 성취된 시기가 바로 다윗과 솔로몬 통치 초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통일 이스라엘 왕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현시(顯示)하는 계시적 도구 내지는 한시적 예표로 선용됐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체제를 영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 통치 후기에 가서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분열왕국으로 체제가 바뀝니다(왕상 12장). 이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 산 언약(출 19장, 24장)에 대한 불순종으로 야기(惹起)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의 일환입니다.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백성들은 앗수르가 통치 관할하는 전지역에 포로로 잡혀가 흩어져 살게 됐을 뿐 아니라(디아스포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혼인시키니 그로 인하여 태어난 혼혈족 소위 ‘사마리아인’이 입니다. 유다의 포로귀환 시기 후부터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동족(同族)으로 여기지도 않게 돼 일체의 교제권에서 외면당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유대인들과 마찰을 빚으며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에 위치한 수가성의 한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요 4:7∼9)를 보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과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고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됐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9절에서 여인은 물을 달라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 함이러라.” 
남 유다 왕국 또한 북 이스라엘 보다 대략 136년 후인 BC586년경에 앗수르를 패배시킨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1차(605), 2차(597), 3차(586)에 걸쳐 남 유다를 침략해서 결국은 삼차 침공 시에 유다는 완전히 패망하고 많은 유다인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의 말발굽아래 항복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남북의 분열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결과입니다. 일찍이 시내 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할 때에 이방의 신을 섬기고 율법을 신실히 청종치 않을 때, 이와 같이 열국에 흩어서 저들의 압제를 받으며 저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것으로 심판하실 것(신 4:23∼28)을 이미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 시행인 바벨론의 1차 유다 침공(BC605)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1차 침공 시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당시 유다의 젊은 엘리트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비록 적국이라 할지라도 유능한 인재를 등용시켜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출신배경의 차별을 두지 않은 듯 합니다. 비록 그것이 전략적인 정치적 목적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여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의 각별하신 섭리적 인도 아래 바벨론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고급 관리의 위치에서 업무를 관장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나라를 포함한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단 2:21, 4:17, 25. 32; 롬 13:1∼2)을 성경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본문에서 왕이 꾼 꿈의 내용을 통해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극명하게 소개함으로써 과연 인간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서인 이유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2. 왕의 꿈 내용 
이제 오늘 강의의 주제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 31∼35절입니다. 본 절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다니엘에게 이상을 통해 보여주신 내용이 소개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최종 완성되기 전, 특별히 구약계시의 역사 속에서는 꿈이 종종 하나님의 계시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져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완성된 이상,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려는 시도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성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일의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진 이상 구약적 방식, 곧 꿈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나 선지자의 예언 등을 통한 하나님의 추가적 계시의 말씀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완성된 계시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최종적 계시의 마침이 됨을 자증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히 1:1∼2; 계 22:18∼19). 
왕이 꾼 꿈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31∼33절에서는 왕이 꿈에서 본 것이 큰 신상(神像)으로서 인위적으로 고안되고 제작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 신상의 모습은 크고 광채가 나는 것으로 기이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31절).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상의 구조에 있어서도 범상치가 않은 것이 머리는 정금으로, 가슴과 두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 다리는 놋으로, 종아리는 철로, 그리고 발의 얼마는 철로 나머지는 진흙으로 혼합해 만들어 져 보기에 두렵고 특이한 신상이라고 소개합니다. 
34∼35절에서는 또 다른 꿈 곧 뜨인 돌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제작되지 않은 것’(34절상)이라고 설명으로 그 존재와 출처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위적인 신상과 신적 기원에 의한 뜨인 돌이 왕이 꾼 두 종류의 꿈입니다. 이 두 꿈은 출처와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각각 이질성을 자체에 담고 있지만 내용의 전개상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뜨인 돌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뜨인 돌 하나가 앞서 본 신상의 발을 무서운 속력과 힘으로 내려치니 거대한 신상은 한순간에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친 뜨인 돌은 이 후에 태산을 이루는 가운데 온 세계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상으로 대변되는 인간통치 나라는 이 뜨인 돌로 인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뜨인 돌로 인한 신적 기원을 가진 새로운 신정통치의 나라가 인간나라를 대신해 세워진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역사의 진행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바르게 해석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뜨인 돌로 인해 건설 될 새로운 신적 기원의 나라에 정조준(正照準) 할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마 6:33). 
그렇습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부평초(浮萍草)가 아닙니다. 기원(起原)이 있고 과정(過程)이 있고 최종적인 목표(目標)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 저자는 왕의 꿈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섬길 자가 누구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에 진지하고 엄숙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니엘을 통해 주신 꿈의 정확한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과 신앙관을 보다 신중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