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하여
이태훈 교수
1. 들어가는 말
시편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장르가 개인 탄식시이다. 궁켈은 이 장르에 속한 시들로 약 39개 정도를 제시하는데, 게르스텐베르거는 약 50개를 꼽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편 전체에서 개인 탄식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적으로 거의 1/3에 해당된다. 우리는 시편에서 “원수”, “대적”, “악인”과 같은 단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들은 동의어로서 시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괴로움을 주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밝히는 것이 시편주석가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시편에서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서술되어서 그 정체에 대한 구체성이 결여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존재 자체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실제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들을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여기기에는 그 존재가 매우 실제적이며, 그러나 그 정체에 대한 정보는 너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베스터만이 밝혔듯이 탄식시는 하나님-시인-원수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이 삼각관계 속에서 시인의 모든 활동이 전개된다. 시인이 받는 고통은 실제로 거의 원수가 가져다주는 것이다. 원수는 시인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탄식 속에 살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서술하며 구원을 간구한다. 시인은 탄식 뿐 아니라 신뢰의 고백이나 구원의 확신 등 다양한 주장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시도록 설득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시인을 고통에서 구해주는 것이며 둘째는 시인의 원수를 징계하여 심판하는 것이다. 이런 삼각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시편에서 원수의 존재나 활동은 매우 실질적으로 나타난다. 시인에 대한 원수의 괴롭힘이 없었다면 아마도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같이 관찰해볼 때 원수가 탄식시에서 모든 고난의 원인이 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탄식시를 이해함에 원수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원수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가 탄식시의 성격이나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원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공동체 탄식시나 찬양시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방민족(나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시 44:5,7; 60:11; 68:1,21,23; 74:4,10,23; 78:42,53,61; 80:6; 81:14; 83:2; 106:10; 108:12-13; 136:24 등). 공동체 탄식시나 찬양시에서는 탄식기도나 찬양을 드리는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탄식시에서는 원수에 대한 정체가 분명하지 못하다. 원수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로 서술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탄식을 드리는 주체인 시인을 누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수의 정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학자들은 수많은 제안들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제시된 원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는 것이 개인 탄식시에 나타나는 원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시편의 원수를 집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데 베테(W. M. L. de Wette, 1807-23)가 개인 탄식시에 나오는 원수의 정체에 대해 처음으로 밝혀보려고 시도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편을 포로기 때 쓰인 것으로 여겼고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에서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두 개의 단어인 고임(~yIAg, 이방민족)과 자림(~yrIz", 이방인)이 원수와 동의어로 쓰인다고 생각하여 대적을 “이방민족”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편이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부터 다양한 시대에 걸쳐 쓰인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시편의 연대에 대해 포로기나 그 후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두 단어보다 다른 단어가 원수나 대적을 더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는 사실로 인해 데 베테의 주장은 잊혀져갔다. 스멘트(R.Smend, 1888)가 개인 탄식시에서 시인에 대한 정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다. 그는 개인 탄식시의 ‘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인화한 집합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인 탄식시에서 원수는 자연히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민족이 된다. 후에 부텐비이저(M. Buttenwieser, 1938)가 스멘트의 주장을 더욱 강화한다. 푸코(A.F. Puukko, 1950)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적으로 나타난 애굽,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이방민족이 시편에서 신화적 존재로 서술된다고 말한다. 랄프스(A.Rahlfs, 1892)는 대부분의 시를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며,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자’ 혹은 ‘경건한 자’라고 불리는 무리와 ‘악인들’이라고 불리는 두 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인 탄식시에서의 원수들은 시인을 포함하여 고난 받는 ‘가난한 자들’의 대적들이 된다. 둠(B. Duhm, 1899)도 대부분의 시를 포로기 이후로 보지만, 랄프스와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안의 두 파의 갈등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 밖의 대적이나 마카비 시대의 헬라 파 무리들로 여긴다. 한편 커크패트릭(A.F. Kirkpatrick, 1902)은 시인이 스스로를 ‘가난한 자’라고 부르는 것에 착안하여, 시인의 원수를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는 귀족계층으로 추측한다. 비르켈란트(H.Birkeland, 1933)는 시편에서 ‘공동체시(우리)’, ‘제왕시(나)’, ‘개인시(나)’의 세 그룹을 비교하여 서로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처음 두 그룹에서 그는 국가의 환난이 주된 주제가 되는 것을 보고, 대적을 국가의 적인 이방민족으로 이해한다. 이를 근거로 그는 개인 탄식시의 ‘나’도 왕이나 국가의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개인 탄식시에 서술되는 환난도 전쟁 등 국가적 환난이며 따라서 그 대적은 이방민족들이라고 말한다. 엥넬(I. Engnell, 1963)은 비르켈란트와 같이 시편에서 주인공인 ‘나’는 왕을 가리킨다며, 대적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마귀와 같은 이방의 세력이라고 말한다. 루퍼트(L.Ruppert, 1972)는 ‘고난 받는 의인’의 주제를 구약과 유대교에서 추적한 결과 시편에서 그 역사를 발견한다. 그리고 시편 18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는 왕의 감사시인데 왕은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하면서 자기가 공동체에 보인 신실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보상인 동시에 왕의 의로움의 확인이라는 것이다.
2) 시편의 원수를 제의적이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모빙켈(S.Mowinckel, 1921)은 구약의 시를 바빌로니아 시의 문맥에서 해석한다. 그는 포알레 아벤(!w<a"
yle[]Po, 악행자)이라는 단어가 원수를 대변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아벤을 악한 마술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이해하기 때문에, 포알레 아벤을 악한마술을 행하는 마술사로 이해한다. 시인이 겪는 다양한 고난은 마술사가 마술을 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페더센(J. Pedersen, 1926)은 모빙켈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러나 드라이버(G.R. Driver, 1926)는 바빌로니아 시와의 비교는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궁켈은 포알레 아벤은 시편에서 단지 5번 사용된 단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리더보스(N.H. Ridderbos, 1939)도 시편에서 마술사의 존재나 활동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없다고 모빙켈을 비판한다. 켈(O.Keel, 1969)은 시편에서 원수에 대한 서술이 정형성을 갖는 것에 주목하여 새로운 해석을 모색한다. 그는 개인 탄식시에서 원수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어떤 정의도 포기한다. 대신에 그는 원수들은 어떤 실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기도자가 갖는 두려움과 슬픔 등을 반영하는 “투영(Projektion)"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투영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외부세계에 반사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시인은 두려움 가운데 사로잡혀 누군가를 적으로 여길 수 있다. 예를 들면 병, 고통, 두려움, 분노 등이 마귀, 악령, 마술사 등의 대적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대적이 객관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대적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3) 시편의 원수를 개인의 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델리취(F.Delitsch, 1859-60)는 시편을 다윗의 저작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 원수들을 다윗의 생애에 나타나는 다양한 대적들로 해석했다. 그러나 현대의 시편연구에서는 시편에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붙었을지라도 반드시 다윗의 저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다윗이 지은 시편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시편에 나타나는 악인들을 다윗의 개인적인 적들로 해석할 수는 없다. 힛치히(F. Hitzig, 1863-65)는 시편의 저자로 다윗 외에 여러 다른 사람들을 말하면서 원수는 이들의 개인적인 적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발라(E.Balla, 1912)는 개인탄식시의 ‘나’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스멘트의 집합적 해석에 반대하며, 명백한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개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궁켈(H. Gunkel, 1904-32)이 그의 견해를 전적으로 따르며, 병이 주된 주제로 나오는 시편에서 원수를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이웃으로 생각한다. 그 당시에 병은 죄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원수는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시인의 병이 그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책망하던 이웃이라고 주장한다. 쉬미트(H.Schmidt, 1927)는 시인을 ‘무고하게 고소한 자’를 원수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개인 탄식시를 무고하게 송사당한 자들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도라고 해석한다. 기도자가 일반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을 때 성전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제의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판결을 직접 받는다. 델레카트(L.Delekat, 1967)는 쉬미트의 해석을 개정하여, 개인 탄식시의 배경을 기도자가 성전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가 성전의 피난처를 찾아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송사한 자들은 그가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고 성전에서 나올 때까지 그를 잡기 위해 밖에서 기다린다. 그래서 그는 개인 탄식시가 ‘원수에 대한 탄식’과 ‘기도응답의 고백’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바이얼린(W.Beyerlin, 1970)은 쉬미트나 델레카트와 가까운 입장을 갖는다. 그는 원래 탄식시가 법정기구와 연관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기구에서 독립적인 영적인 시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개인 탄식시를 법정기구와 연관된 탄식시와 법정기구에서 독립적인 탄식시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여기서 전자의 시편이 성전의 법정과 연관되며 재판의 여러 과정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3. 원수는 어떤 존재들인가
시편에서 원수에 대한 서술이 일반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그 정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원수에 대한 정체가 시인인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통해서 시편의 대적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원수에 정체에 대해 외부에서보다 좀 더 시편 내부의 증거를 잣대로 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원수에 대한 서술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언급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은 그들이 무고한 송사, 압제, 약탈, 살인, 도둑, 거짓말, 거짓 증언 등의 행동을 한다고 탄식한다. 우리는 같은 원수가 이런 일들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 다양한 종류의 원수들이 이런 행동들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동체 탄식시나 제왕시에서는 원수가 국가적인 적을 나타내지만, 개인 탄식시에서는 개인의 대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시인은 원수의 핍박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간구한다. 원수들의 주된 목표는 시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원수들은 가난하고 병든 의로운 시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시편에서 원수나 대적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악인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 원수나 대적이 시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원수에 대한 정체를 밝혀보려 한다.
1) 악인에 대한 서술
시편에서 악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악한, 죄 있는”이란 형용사인 라샤([v'r')의 복수형인 레샤임(~y[iv'r>)이 많이 사용되며 단수형은 비교적 적게 사용되는 편이다. 이로서 우리는 시편에 나타나는 악인이 한 개인을 지칭하기보다 다수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악인이 단수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시편 26:5에는 시인이 악인들의 모임을 싫어하며 그들과 같이 앉지 않았다고 무죄를 고백하는데, 악인들이 무리를 지어 행동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악인의 특성에 대해서 시편 10이 대표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악인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심판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악인은 자기 마음에 있는 탐욕은 대놓고 자랑하나, 여호와는 저주하고 무시한다(시 10:3). 악인은 코를 높이 들고 교만하게,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죄를 묻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다(시 10:4; 참조. 시 36:1-2). 그러나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고 악인의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시 9:12).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참조. 시 14:1; 53:1). 악인은 사람을 해하고도 뉘우침이 없이, 심지어 “누가 우리를 보겠느냐”, “우리 계획은 완벽하다”고 자화자찬한다(시 64:4-6).
둘째로 악인은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누리던 사람으로 보인다. 악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하지 않고, 또 자기가 하는 사업이 성공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대적들조차 가볍게 여길 정도로 자신만만하다(시 10:5). 그래서 그는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아,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고 교만하게 말한다(시 10:6). 이같이 악인은 자신의 성공을 믿고 자만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악인이 매우 폭력적이지만 무성한 백향목처럼 번성했던 것을 본다고 말한다(시 37:35; 참조. 시 73:3-12; 92:7).
셋째로 악인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 모함, 폭언 등 언어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악인의 입은 “저주, 거짓, 폭언”으로, 그리고 그의 혀는 “재난과 재앙”으로 가득하다(시 10:7). 이같이 악인은 남을 저주하고, 거짓말로 사기치고, 폭언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사람이다(참조. 시 36:3). 악인의 폭언은 독사의 독같이 무섭고(시 58:4), 몰래 쏘는 화살처럼 치명적이다(시 64:3). 악인은 재앙을 잉태하여 거짓을 낳는 사람이다(시 7:14). 그리고 악인은 겉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악을 품는 이중적인 사람이다(시 28:3). 악인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도둑질과 간음을 꾀하고 거짓말로 형제까지도 비방한다(시 50:16-20). 이같이 악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곁길로 나가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다(시 58:3). 악인은 이유 없이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며, 선을 악으로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사람이다(시 109:2-5).
넷째로 악인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과 살인까지 행사하여 이익을 취하는 잔인한 사람이다. 악인은 마당 으슥한 곳에 앉아서, 죄 없고 불쌍한 사람을 죽이려고 엿본다(시 10:8). 악인의 잔인함이 사자에 비유되는데(시 10:9),
악인이 죄 없는 불쌍한 자를 폭행하니 넘치는 힘에 그가 맥없이 쓰러진다(시 10:10; 참조. 시 17:11-12).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잊었으니, 영원히 살펴보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며, 어떤 후회의 빛도 없이 하나님을 조롱까지 한다(시 10:11). 악인의 잔인함은 사자 뿐 아니라 듣지 못해 제어할 수 없는 독사로도 비유된다(시 58:4-5). 악인은 사냥꾼처럼 활에 시위를 당겨, 어두운데서 마음이 정직한 사람을 쏜다(시 11:2; 37:14,32). ‘어두운 곳’은 악인들의 의도가 음흉하고 위협적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악인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악인은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과응보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시 7:15,16; 9:15-16; 34:21; 145:20).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인에게는 보상하시고 악인은 징계하셔서, 하나님이 확실히 계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시 58:11; 91:8). 결국에는 악인이 행한 악이 스스로를 죽이게 된다(시 34:21).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 때 겨와 같이 흩어져 망하고(시 1:4,6), 풀과 푸른 채소처럼 말라버려 결국 끊어지게 될 것이다(시 37:2,20,38). 그리하여 악인들은 부끄러움(시 31:17)과 함께 수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시 32:10). 하나님이 악인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니 악인이 이것을 보고 이를 갈게 된다(시 112:8-10).
2) 원수와 대적에 대한 서술
시편에서 원수나 대적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참조. 시 3:7; 17:9; 27:2; 55:3 등). 그리고 일반적으로 악인이 복수로 더 많이 사용되듯이, 원수(byEao)나 대적(rc:, rrEAc, 혹은 rrEAv)이란 말도 주로 복수로 사용된다. 시인은 자기에게 원수와 대적이 너무 많고 강하다고 하나님께 탄식한다(참조. 시 3:1; 25:19; 38:19; 69:4 등). 우리는 원수가 시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첫째로 원수는 시인과 경쟁관계에서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다. 원수는 시인이 흔들릴 때 기뻐하며, “내가 그를 이겼다”고 자랑한다(시 13:4). 이에 대해 시인은 왜 원수가 자기보다 높이 서냐고 하나님께 탄식한다(시 13:2). 시인은 대적들이 승리함으로 기뻐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시 13:4; 35:19,24; 38:16), 반대로 대적들이 패했을 때 그들로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시 30:1). 시인은 원수들이 패하여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시 6:10; 35:4,26; 40:14; 70:2; 71:13 등). 시인은 원수의 압박 속에 울고 다니며(시 42:9; 43:2), 그래서 그의 눈은 대적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침침해질 정도이다(시 6:6-7). 원수가 시인을 추격하여 땅에 메쳐 완전히 매장시키고 죽은 자처럼 어둠 속에서 살게 만든다(시 143:3).
둘째로 원수들은 거짓말과 악담과 조롱으로 시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이다. 원수들은 거짓 증인으로 악을 토하는 자들이다(시 27:12). 그들은 시인을 모함하여 쓰러뜨리려한다(참조. 시 5:9; 17:9; 26:9-10). 원수들이 “일어난다(~wq, 대적하다)”는 말은 성문 앞 법정에서 증인을 서기 위해 일어난다는 말이다(참조. 신 19:16). 시인은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다그친다고 탄식한다(시 35:11). 이것은 법정 다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원수는 거짓증언으로 시인을 모함한다. 원수들은 시인에게 악담을 하고 그에 대해 나쁜 말만 퍼뜨리는 자들이다(시 41:5-8). 병에 걸려 고통 받는 시인에게 원수들은 “그가 언제나 죽어 없어질까”라고 말하며(5절; 참조. 시 31:13; 38:12), 그를 찾아와서는 거짓되고 나쁜 일만 모아서 밖에 나가 떠들어 댄다(6절). 원수들은 시인에게 나쁜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가 불치병에 걸렸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한다(8절). 원수들은 “온 종일” 시인의 말을 비방하며, 그들의 모든 생각은 시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뿐이다(시 56:5). “비방하다(bc[, 아차브)”는 말은 ‘상처를 주다’, ‘훼손하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짜다’, ‘형성하다’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왜곡하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말은 중상모략, 비방, 정죄, 조롱, 위협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원수들은 시인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한다(시 42:10). 아마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인에게 더 이상 소망을 두지 말고 포기하라며 조롱하는 말일 것이다. 원수들은 하나님도 시인을 버려 아무도 구해줄 자가 없으니, 그를 추격하여 잡자고 음모를 꾸민다(71:10-11).
셋째로 원수들은 시인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는 자들이다. 원수들은 시인을 에워싸고 그의 목숨을 노린다(시 17:9). 그리고 원수들은 자기 기름에 둘러싸여 거만하게 말한다(17:10). 기름으로 둘러싸였다는 말은 무감각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참조. 시 73:7; 119:70). 그런데 원수들이 “이제” 시인을 쫓아와 둘러싸고, 땅에 넘어뜨리려고 노려본다(17:11). 원수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젊은 사자와 같고(17:12), 굶주려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들개와 같다(시 59:14-15). 원수들은 사냥꾼이 동물을 잡듯이 시인을 공격하기도하고, 그를 잡기 위해 매복하여 기다리기도 한다. 그들은 시인의 발뒤꿈치를 쫓아 그가 어디로 가든지 미행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시인의 목숨이다(시 56:6). 원수들의 쉬지 않는 공격은 시인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원수들은 시인의 살을 뜯어먹으려고 다가온다(시 27:2). 이것은 원수들의 잔인함을 나타내며, 그들의 의도가 시인을 착취하여 완전히 망하게 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대적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친구나 이웃, 심지어 길을 가다 그를 본 사람들도 그에게서 도망치는 경험을 한다(시 31:11; 참조. 시 38:11; 55:14; 88:8,18). 그는 공공의 조롱거리로 전락하여 사회적인 소외를 경험한다. 시인은 죽은 자처럼 잊혀 깨진 그릇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31:12). 시인은 원수들을 “강한 자들(~yZI[;, 아짐)”로 부르는데, 권력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시 59:3). 원수들의 공격에 대해 시인은 “악([v;P,, 페샤)”, “죄(taJ'x;, 하타아트)”, “잘못(!wO[], 아온)” 등 3가지 다른 용어를 사용하며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59:3-4; 참조. 시 7:3-4; 17:3-5; 18:21-23; 26:3-5). 시인은 힘센 자들로부터 억울하게 착취를 당한다.
마지막으로 원수는 시인과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다. 시인은 원수가 조롱했다면 차라리 참을 수 있었을 것이나, 자기와 동류인 동무요 친구가 자기를 조롱한다고 탄식한다(시 55:12-14). 원수의 조롱은 차라리 참을 수 있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큰소리치면 피하고 안보면 그만이다(12절). 그러나 그와 동류인 동무, 곧 친구의 조롱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13절). 시인과 그의 친구는 절기 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며 성전에 가며, 달콤한 교제를 나누던 사이였기 때문이다(14절; 참조. 시 42:4). 시인을 조롱하는 원수의 무리에 그가 신뢰하고 음식을 같이 먹던 가까운 친구조차 그에게 발꿈치를 높이 들고 대적의 무리에 합류한다(시 41:9). 친구를 직역하면 ‘평화의 사람’인데(참조. 렘 20:10; 38:22; 옵 7) 식사를 자주 할 정도로(반복을 의미하는 분사가 사용됨) 절친한 사이를 말한다. 아마도 이들은 시인의 원수들에게서 무엇인가 이익을 얻기 위해 그를 배신한 것 같다. 시인을 괴롭히던 자들은 그의 이웃들이었다(시 35:11-16). 이웃들이 거짓 증언을 통해 하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라고 했지만(11-12절), 그는 이웃들에 대한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시인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고통을 같이 나눴다(13절). 심지어 그는 친구나 형제, 어머니처럼 그들을 대했다(14절). 그러나 대적들은 그들의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15절). 오히려 그들은 시인이 흔들려 넘어지자 기뻐하며 무리를 지어 그를 때린다. 그리고 그들은 시편기자가 절뚝거릴 때 절름발이 된 것을 조롱하고, 여전히 이를 갈며 적대감을 보인다(16절). 원수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다(시 38:20).
4. 시편에 나오는 저주기도에 대한 이해
원수들이 하는 일은 시인을 위협하고, 목숨을 노리며,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런 위협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망시켜 주실 것을 간구한다. 많은 탄식시에서 원수를 파멸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나오는데(시 2; 3; 5; 6; 7; 9; 10; 12; 17; 58; 59; 109 등), 이런 기도는 예레미야에서도 발견된다(렘 2:3; 15:15; 18:21-23; 20:11). 원수의 파멸을 간구하는 저주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한 정죄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배치되는가? 시편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보다 저급하여 우리가 더 이상 따라야 할 모범이 되지 못하는가? 시편의 저주기도에 대해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 있다. 탄식시에 나오는 시인의 정죄나 저주기도가 원수들에 대한 복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어, 대적들에게
빼앗긴 공의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할 뿐이다. 따라서 기도자의 원수들에 대한 멸망의 간구는 정의회복의 기도이지 복수의 기도가 아니다. 우리가 시인이 처한 처지를 살펴보면 그가 하는 저주의 기도를 좀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언제까지”, “왜”라는 말로 하나님께 탄식한다. 시인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답답함과, 또 그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인내심의 한계에서 기도드린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드리는 저주기도는 대적에 대한 공격적인 기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수비적인 기도인 것이다. 원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 파멸에 빠지게 되었을 때 조용히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고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할 것이다. 시편의 저주기도를 생존을 위한 최후의 간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탄식시에 나오는 원수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대치시키기보다, 서로 다른 양상의 두 가지 기도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들이 이뤄야 할 이상적인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시편의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기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편의 기도가 우리에게 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의 기도는 이상적이고 신적인 차원의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가 지행해야 할 이상적인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5. 나가는 말
시편에 나오는 원수는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을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지나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원수는 시인을 음해하여 쓰러뜨리려는 자들로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욥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한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욥이 환난에 빠졌을 때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들은 7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욥의 고통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들이 욥을 위로하는 과정가운데 고난의 원인에 대한 문제로 갈등이 야기된다. 욥의 고난의 원인이 죄의 결과라는 친구들의 전통적인 견해에 욥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욥은 고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런 욥의 모습이 친구들에게는 교만하고 불경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마침내 친구들은 욥을 비판하고 책망하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이 급기야 대적들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갈등관계에 빠지게 된다. 음해를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거짓말로 모함을 받기도 한다. 힘센 자들에게 억울함을 당하기도 하고, 경쟁에 밀려 조롱당하고 짓밟히는 삶을 살기도 한다. 믿었던 친구나 친척에게 배신을 당하기도하고, 완전히 몰락하여 죽은 자처럼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도 한다. 시편은 이런 다양한 경험들을 오늘날과 똑같이 반영해준다. 따라서시인이 원수와 경험한 것들은 오늘날 우리들도 생생하게 당할 수 있는 내용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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