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한국인의 주체적 DNA

한국인의 주체적 DNA


노승수 목사


원래 한국인의 DNA는 상당히 주체적이다. 갑질 문화는 내가 볼 때, 친일의 산물인 거 같다. 갑질하면 내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친일파와 연계되어 TV 드라마의 소재였다. 원래 일본인들은 친절하다. 이유는 아마도 사무라이 문화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좀처럼 일본인들은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윗집이 밤새 시끄럽게 떠들어도 밤새 귀막고 아침에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정 안 되면 야쿠자를 사서 없앤다. 질서를 어기는 법도 없고 앞에 차가 아무리 밀려 있어도 차선을 넘어 추월하는 법도 없다.

그런 사무라이들이 한국에 와서 같은 방식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평등 사상이 매우 강하고 주체적이어서 이런 위에서 내리누르는 문화에 일본인들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거기서 꼬붕 노릇하던 친일파들과 깡패들로부터 갑질이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본다. 군사문화를 들기도 하지만 미군정은 일본이 만든 경찰, 군대를 그대로 받았고 그중에 박정희가 있다. 군대의 까라면 까는 문화도 일본식 문화다. 원래 조선은 왕이 시켜도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던 나라다.

그리고 사실 도덕 수준으로 치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다. 카페에 노트북이나 귀중품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훔쳐가지 않는다. 외국에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빼앗아가고 뉴욕의 밤거리는 안전을 담보하기 힘들다. 한국은 이미 세계 치안 1-2위를 다투는 나라다. 16년의 촛불 혁명을 생각해보라 그 많은 인원이 시위를 하면서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나라다. 미국이나 유럽이었으면 아마 폭동으로 번졌을 것이다. 도산 선생이 지적한 거짓말이라는 망국병이 잘 안 고쳐지고 있기는 하지만 공동체적이면서도 주체적인 한국인의 문화는 윤리면에서도 서양인들보다 나은 면이 있다. 97년 IMF 위기에도 금 모으기로 단기간에 경제위기를 탈출한 나라다. 중국은 이때 우리의 금모의기를 이해를 못했다. 중국인은 "메이관시" 즉, 나와 관계가 없으면 옆에 아이가 죽어가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한국을 보고 조금씩 영향을 받지만 한국인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태안반도의 기름 유출 사건에도 그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은 누구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성인들이 모이면 항상 정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는 공동체성과 정치적 결정에 대한 주체의식을 보여준다. 문제는 청산되지 않은 친일 무리가 정치 경제 지도자들 중에 많다는 것일 것이다. 부패지수는 사실 서민과 거리가 멀다.

어제 축구를 보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더 당당해도 되는 우리 선수들이 이런 문화 풍토에서 자라다보니 이런 대형 경기대회 나가서 주눅든 거 같아 좀 마음이 좋지 않다. 아마도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전국민적인 비난에 직면할 것이 두렵고 그래서 더 주눅이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DNA에는 이런 윤리적 공동체성만 있지않고 주체적인 특징과 평등에 DNA가 있다.

그리고 시대가 상당히 변했다. 나는 다음 세댸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교회가 위기인 이유는 어느 정치 집단처럼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빨리 원래 성경이 지닌 메시지로 돌아가야 교회가 산다. 70-80년대 후반까지는 교회가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다. 사실 학교나 사회에 이렇다할 문화가 없을 때, 교회는 문학의 밤이 있었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 교회는 여름성경학교와 주일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90년대 중반을 들면서 역전 현상이 생겼다. 이젠 세상이 더 좋은 문화가 많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는 이런 걸로 아이들과 청년들을 꼬셔 보려는 중이다. 교회의 차별점은 그런 문화가 아니라 복음이다. 더 주체적이고 더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야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다. 2류 공연을 보려고 교회에 오겠나 세상이 들려 줄 수 없는 것을 들려 주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은 주체적으로 크고 있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멘탈과 스피릿을 심을 다음 세대의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의 필요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혁신학의 좌표  (0) 2018.12.07
친밀감과 경외심  (0) 2018.09.24
동아시아 윤리관과 한국인의 주체성  (0) 2018.06.29
결핍과 균형  (0) 2018.05.29
거짓 선지자 발람의 교훈  (0) 2018.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