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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개혁파의 성찬 신학

전통적인 전례에서 성찬기도(anaphora) 중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와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드높이는 수르숨 코르다(sursum corda)는 칼뱅파의 성찬 신학의 핵심이다.
로마 가톨릭의 화체는 성찬시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칼케돈 신조가 말하는 바 신성과 인성이 섞이거나 혼합될 수 없다는 고백에 반한다. 왜냐하면, 성찬 중에 세계 교회마다 인성인 몸이 현존하는 결과를 낳고 이는 마치 인성이 편재하는 속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여기지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루터는 좀 독창적인 의견을 냈는데 공재, 곧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몸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illocality) "실재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루터파는 자기들이 실재론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칼뱅파 입장에선 화체와 차이를 변별할 수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결국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방식이란 인성이 신성적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단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그들 역시 실재를 주장한다고 한다. 이 주장이 사실 어떤 논의를 통해 설득력 있는 주장인지는 난 아직 이해를 못했다.
그에 비해 칼뱅파의 주장은 고대 교회의 전통에 가까우면서도 인성의 신성화를 피하고 가장 신령한 방식으로 이를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아나포라, 곧 성찬 기도의 기원 중 하나인 수르숨 코르다는 칼뱅의 개인적 엠블럼으로 SFC의 뱃지나 미국 칼뱅 세미너리의 학교 심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혁교회의 예배로의 부름도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로 시작한다. 믿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를 파자하면 심장을 의미하는 cardia와 주다(to give)를 의미하는 do가 합쳐진 단어다.
결국 믿음이란 우리 마음과 심장을 들어 올려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위해 에피클레시스, 곧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청원을 드리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들어올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게 하신다.
칼뱅신학의 이런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성격을 조롱하는 의미로 루터파들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 즉 칼뱅주의 신학 밖에서도 함께하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 말인즉, 루터파는 성찬을 우리 현실에 실재로 뿌리내린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루터파들은 실제적이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장로교회들은 성찬 신학의 이런 신비를 많이 잊은 듯하고 오히려 그 신비를 타 교단들을 기웃거리며 거기서 찾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우리가 믿는 성찬과 예배는 우리가 지상에서 예배하고 성찬에 참여하지만 성령에 의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이와 연합하는 신비를 담고 있다. 이 의식이 거룩한 보편교회 의식이며 그리고 여기에 기반해 지교회로서 내가 속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현대의 과학주의 사고가 하늘을 그저 물리적 우주로 인식하게 하고 하늘이란 단어로부터 하나님의 처소로써 영적 세계로서 하늘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칼뱅의_서재 에 연재 중인 #히브리서강해 를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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