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되고 음란한 세대
노승수 목사
최근 뉴스를 달구는 내용들은 임실군 지방교육청의 성적 조작 사건, 그 이후 속속 보도되는 각 지방 교육청의 조직적인 거짓 보고와 거짓 해명들, 그래서 전면 재조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일선 사회복지 공무원의 26억에 달하는 지원금 횡령 사건, 액수도 액수지만 이렇게 비양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각종 보도는 우리 사회의 도덕불감증에 대한 보도에 초점이 있기보다 구조적 모순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깊은 탄식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고속철도의 부실공사와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의 개통식을 치르고, 침목 부실로 인해 들어가야하는 비용이 무려 800억 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보도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부정과 거짓이 만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고도 나라가 지탱되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폴 에크만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평균적으로 약 8분에 1번, 하루에 200번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이와 같이 공익을 해 할 뿐 아니라 악의적인 거짓이 범람하고 있다.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세대(롬 1:28)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범죄한 아담이 자신의 과실을 숨기기 위해 했던 거짓말처럼 가인이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항변처럼 하나님 없는 자들의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런 거짓들이 처음부터 커다란 것으로 시작되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EBS에서 도덕성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다큐 촬영을 하면서, 출연료가 10만원이라고 전화로 미리 고지하고 촬영이 끝난 뒤에 15만원을 건네면서, "15만원 맞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95%의 사람들이 "네"라고 대답을 한다.
그럼 이런 소박한 기만은 애교(?)이고 26억을 해먹은 공무원은 천인공로할 만한 죄인인가? 아마도 모르긴해도 이 공무원도 처음부터 이렇게 조직적으로 돈을 빼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5만원의 소박하고 애교있는 거짓이 26억으로 불어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소한 뇌물은 국민의 세금 800억으로 부풀어 되돌아 왔다.
우리 사회는 하얀 거짓말이라며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다. 뿐만 아니라 거짓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스럽게 사과할 줄도 모른다. 국회 인사 청문회 과정을 보면 고위 공직자일수록 이와 같은 도덕적 청렴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만연한 부패를 부패로 여기지 않는 이 문화가 더 큰 부패를 불러 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구조의 탓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마음처럼 심히 부패한 것이 없다고 한다(렘 17:9). 왜 개혁주의가 은혜로만 구원얻는다고 하는가? 이 부패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하는 바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에서도 이 거짓이 신령한 것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각종 예언들이 범람한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그 예언들을 따른다. 왜 우리에게 성경 외에 다른 예언이 필요로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특별계시와 그 결과로서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려주는데 부족한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성경 외에 우리에게 다른 진리가 없음에도 교회 안에 신령주의의 이름으로 혹은 신비주의의 이름으로 거짓되고 더러운 것들이 범람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된 것이 행해지며, 음란한 일들이 일어난다.
교회는 자신의 순결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마이클 레빈은 "깨진 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에서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강조한다. 건물 주인이 깨진 유리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면, 그는 절도나 문서 훼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면, 그는 절도나 문서 훼손, 폭력 등과 같은 강력 범죄에 대한 대비 역시 미비할 것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깨진 유리창을 보며 건물 주인과 주민들이 이 건물을 포기했으며, 이곳은 무법천지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진 유리창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느다.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다!" 라는 것이다.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로 권징을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교회는 문턱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문을 없애버렸고, 담을 허물어 버렸다. 더 이상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교회마다 전도를 힘쓰고 있지만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한 외침이 생각나지 않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그 결과, 사실상 신자를 가장한 불신자는 교회 안에 넘쳐난다. 지금 교회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이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깨어 경성해야하는데, 교회 밖에 있는 영혼에만 온통 관심이 가 있으니 - 사실 영혼에 관심이 있는지 그들이 가진 돈에 관심이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 교회에는 양떼가 아니라 이리떼가 득실거린다. 이 모든 일이 거짓과의 타협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세상이 타락해 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의 결과요 당연한 이치라 치지만, 교회의 부패는 교회가 스스로의 성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결과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