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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경외감과 친밀감

경외감과 친밀감



연인의 이별과 부부의 권태에 결여된 것은 친밀감이 아니다. 친밀감의 결여로 연인이 이별을 경험하거나 부부가 권태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존경심이 결여가 이별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관계를 위해 친밀감에 몰두한다. 그러나 친밀감의 탐구가 끝나면 곧 권태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감은 관계를 유지하는 진정한 원천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밀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경외>로 요약되는 존경심을 요구한다.

유교적 덕목에서 부부간을 유별한 것으로 부자간을 유친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부 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존경심이고 부자 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친밀감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친밀감은 중독의 일부이다. 관계 중독이고 이 중독은 보다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권태를 경험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대는 친밀감을 기본적으로 결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에서도 친밀감이 목회와 신앙의 중심 잇슈를 등장하지만, 이는 관계를 망치는 원천이 된다.

그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을까? 오늘날 결코 친밀감이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과하다. 신앙적 방종은 바로 이런 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J.I. 패커는 현대 복음주의를 일컫기를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현대적 친밀감의 요구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친밀>이 아니라 <존경>이다. <경외심을 결여한 신앙>은 오늘날 신앙의 보편적 행태이다.

그래서 이 친밀감을 증진할 여러 <신앙적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이 프로그램들은 신자들의 영적인 만족 특별히 친밀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신앙을 제대로 진단한 것이 아니다. 잠언이 증언하듯이,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외라는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 경외감의 보다 적극적 형태가 <경건>이다. 경건이란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으로 요약된다. 경외감은 그래서 성경에 천착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열정이 우리를 신앙적 성숙으로 이끈다. <신앙적 프로그램>들은 뭔가 성숙한 느낌, 친밀감 등등의 자기 만족적 감정을 가져다주지만 다람쥐가 챗바퀴를 도는 것이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백화점 쇼핑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영적 쇼핑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과 성숙은 성경을 아는 지식의 성장에서부터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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