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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권위와 권위주의

우리 사회가 권위에 얼마나 우호적인가를 어디서 알 수 있냐면 담임과 부교역자가 범죄했을 때 드러난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다 피부로 느끼는 일이라 설명은 생략한다. 권위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권위주의는 혁파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럼 어떤 게 권위고 어떤 게 권위주의일까?

사무엘 러더포드가 Lex Rex를 통해서 왕이더라도 법 위에 있지 않고 "법이 왕"임을 천명했다. 이것은 법치의 정의를 알려주는데 법대로 다스리는 데 법치의 정의가 있지 않고 권력자의 권한을 법으로 제한하는 데 법치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더 법에 의해서 제한받아야 하며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더 죄가 엄중하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권한을 가진 자의 죄가 더 엄중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라 누구에게 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법은 평등하지 않다. 권력자에게는 순한 양이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는 폭군이다. 이런 조선시대적인 반상의 윤리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교회를 지배한다.

어떤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부패 꼬리표와 오늘 보이는 교회의 부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지 권력자와 명성있고 돈 있는 자들에게는 관대하고 서민들은 쥐잡듯이 잡는다. 세상에 제일 쓸 데 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그들의 부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걱정하고 대기업 총수가 범죄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걱정하고 그런 것들을 주요 언론들이 조장하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군, 학교, 체육계 등에서 터져 나오는 비리들 역시 바로 자신이 지닌 법적 지위를 넘어선 권리 행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와 같은 것을 제제하는 것을 법치라 일컫지 않고 아랫 사람을 누르고 일벌백계하며 그들에게 폭군처럼 구는 것을 법치라 여긴다. 이런 생각에는 대중들과 신자들의 생각에도 크게 차이가 없다.

정말 우리가 장로교 다우려면 권위자로서 리더들에게 더 책임을 물어야 하며 권위자는 따르는 자들을 사랑과 귱휼로 돌보며 섬기는 자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 큰 자는 섬기는 자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제자들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도 그것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남의 제사상에 훈장질은 해도 가난하고 약한 무리들을 돕는 일에는 눈을 감는다. 인권 문제는 교회를 핍박하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연한 권리이다. 교회는 이런 일에 민감하게 굴 것이 아니라 오늘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지 못하는 것을 통회하며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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